소설리스트

천방 (45)화 (45/385)
  • 45화. 기대하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여관들의 질문세례에 지온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사매들을 놀라게 했네요. 정리하던 중에 실수로 화로를 건드렸지 뭔가요? 이렇게 덤벙거려서야…….”

    그에 여관들이 안도하며 말했다.

    “정리는 저희에게 맡겨두시지요. 사저.”

    여관들은 빗자루와 걸레 등 청소도구를 가지러 갔다.

    계속해서 사과하던 지온은 여관들의 재촉에 그제야 편청을 나섰다.

    루안 역시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힘들 것 같아 그녀와 함께 편청을 나섰다.

    천천히 회랑 아래를 걷는 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텅 비어있었고 그것은 지온의 음성이 들려올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루 대인께서 이런 일을 아주 기대하실 거라 여겨 연기를 해봤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그 말에 루안의 가슴 속에 노기가 치솟았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 역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마주 보았다.

    키도 그리 크지 않고, 몸도 허약해 보이는 그녀가 앞에 서자, 그는 마치 한 손으로도 그녀를 눌러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선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나 차가운지, 손을 데면 얼어버릴 듯한 루안의 냉기 어린 표정에도 그녀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가 누구인가?

    형부, 태평사의 루 낭중이자 과거 북양왕의 넷째 공자가 아닌가?

    두 개의 호칭 중 더 높은 듯 느껴지는 것은 후자인 북양왕의 넷째 공자이지만,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하는 것은 태평사의 루 낭중이었다.

    북양왕의 넷째 공자였던 그는, 친형과 척을 지고 멀고 먼 북쪽에서 도망쳤다. 집 잃은 강아지 같은 신세가 된 그는 도성으로 들어와 황제에게 투신했다.

    그리고 그는 황제 아래의 사나운 개가 되었다.

    집을 잃은 사나운 개는 그를 받아준 주인 외에 달리 고려할 것이 없기에 그것이 사람들을 겁먹게 하는 것이다.

    유씨 가문과 같이 권세 높은 가문도 그 사나운 개에게 물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일을 내가 재밌어할 거라 생각한 건가?”

    평소보다 더 낮은 루안의 음성에는 무시할 수 없는 분노가 가득했다.

    “자신의 평판을 두고 장난을 치는 것이 재미있나?”

    매우 놀란 듯 지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마치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진심 어린 목소리로 그에게 사과했다.

    “대인께는 확실히 재미없는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하게 굴었어요.”

    ‘또…….’

    루안은 제 감정이 어떠한지 형언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다른 이를 화나게 한 것 같으면 빠르게 사과를 했지만, 절대 잘못을 뉘우치는 법이 없었다.

    사과하는 것은 상대방이 그녀가 잘못했다 여겼기 때문이지, 그녀는 애초에 스스로 잘못했다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싫었지.’

    서원에 있던 그녀를 좋아하던 수많은 학생은, 그녀와 친해지면 그녀가 얼마나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루안은 힘겹게 감정을 가라앉혔다. 최대한 평소와 다름없는 음성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사저라는 사람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듯하군.”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데 대인께서 그것을 어떻게 아시는 것이지요?”

    지온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 머무르던 그 순간, 번득 한 가지 생각이 지온의 머리에 떠올랐다.

    “제 뒤를 따라오신 건가요?”

    루안이 정색을 하자 지온이 다시 웃음을 지었다.

    루안이 보기에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는 분명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목한 것은 지온이 웃음을 지을 때, 작게 눈꼬리를 올리는 버릇이었다.

    ‘똑같다.’

    “대인께선 역시 저를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군요.”

    그 말에 참다못한 루안이 결국 미간을 좁히며 낮게 일갈했다.

    “여인이 되어 어찌 이리 얼굴이 두꺼운 것이오?”

    지온이 곧장 대꾸했다.

    “제 부모님께 여쭤보셔야죠? 저도 두 분께서 저를 어찌 낳으신 건지 모른답니다.”

    “당신은…….”

    말을 잇던 루안은 노기를 애써 달랬다. 

    ‘잠깐, 잠깐…….’

    루안은 속으로 이런 식으로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누구냐고 물은 후부터 대화가 이어지지 못하고 계속 튀고 있지 않은가?

    이것 역시 그녀가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좌우 상황을 모두 고려하고 말을 하는 그에게, 이런 식으로 아무 말이나 쏟아내어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것이다.

    ‘이대로 끌려가선 안 돼.’

    이럴 땐 무조건 가장 중요한 것을 짚어내어 바로 그것을 물어야 한다.

    ‘그래서, 넌 누구냐?’

    그러다 문득 루안의 눈빛이 먹먹해졌다.

    ‘이미 마음으론 답을 내렸지만, 만약 아니라면…….’

    너무 길어진 그의 침묵에 지온마저 이상함을 느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새소리가 그의 정신을 다시 돌려놓았고 드디어 루안이 입을 열었다.

    “당신의 사저라는 사람이 악의를 품고 있는 것 같았소. 그 사람이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와 홀로 남긴 것은 분명 다른 생각을 품고 한 행동일 것이오.”

    지온은 그가 다시 그 주제로 돌아갈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그의 목소리로 보아, 이미 노기도 털어낸 것 같았다.

    그녀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당신이 지금 가장 짓지 말아야 할 죄는 다른 사내와 몰래 사통하는 것이오. 조방궁은 수행하는 곳이고, 당신 역시 스승님께 효를 다하겠다며 이곳에 왔소. 더구나 유씨 가문 둘째 공자와의 혼약을 파기한 것 역시 얼마 되지 않은 지금, 당신이 다른 사내와 말 못 할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 나가는 즉시 당신은 그대로 망하는 것이나 다름없소.”

    “네.”

    지온이 다시금 대답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던 루안의 목소리가 다시 조금 떨렸다.

    “그런데 당신은 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저라는 사람을 따라 이곳에 온 것도 모자라, 홀로 남아 공자들과 차를 마시며 사저라는 이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지. 그리고 그녀가 더욱 강하게 기세를 올릴 수 있도록 일부러 맞춰 주었소.”

    고개를 든 지온이 그를 바라보며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네.”

    시선을 마주한 가운데, 루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녀에게 반격할 생각이로군.”

    지온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네.”

    루안이 물었다.

    “그렇다면 실패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은 있소? 여인이 어떻게 이런 일로 도박을 한단 말이오?”

    그의 눈을 바라보며 지온은 미소를 지었다.

    지온이 작게 말했다.

    “그러니 일이 있기 전에 루 대인께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설령 제가 실패한다 해도 대인께선 저와 혼인하여 주실 것이지요?”

    놀란 루안은 자신을 다독였다.

    ‘화를 내서는 안 돼. 절대 화를 내선 안 돼.’

    눈앞의 여인은 화가 난 자신이 그대로 가버리길 오매불망 바라고 있었다. 

    ‘내가 화를 내고 가버리게 하려고 유도하는 거야.’

    가슴에 뜨거운 것이 용솟음치고 있지 않다는 듯, 그가 평소와 다름없이 뱉은 말은 이러했다.

    “내 손에 떨어지지 않길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지온은 그저 웃었다.

    그녀는 대인 손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냐며 묻고 싶었지만, 루안 공자의 모습을 보니 다음번엔 진짜 화를 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에이, 그만하자. 오늘 계획한 큰일을 생각해서라도 그만 놀리는 게 좋겠어.’

    혹시라도 화옥이 다른 마음을 품으면 좋지 않았다.

    “아가씨!”

    서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지온이 몸을 낮춰 인사했다.

    “제 시녀가 찾습니다. 루 대인,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루안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향해, 세가 규수의 표준이라 할 법한 딱 적당한 미소를 지은 지온이 작별인사를 고했다.

    루안은 추억 속의 여인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런 사람이었다.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 완벽한 겉모습 안에, 도리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영혼을 담아 둔 사람.

    규율을 이용하길 좋아할 뿐, 실은 가장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그리고……쉽게 잊을 수 없는 사람.

    “공자님!”

    한등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루안에게로 달려왔다.

    “여기 계셨어요? 소인, 한참 찾았습니다.”

    “날 찾아서 뭐 하려고?”

    ‘음? 공자님 심기가 불편하신가?’

    당황하던 한등이 말했다.

    “법회가 시작합니다! 법회를 보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뭐 볼 게 있다고?”

    말은 그리했지만, 루안의 발걸음은 여전히 밖을 향하고 있었다.

    * * *

    “지온아, 어서 오거라!”

    장씨 부인이 손을 흔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지온이 그녀의 옆에 가서 자리에 앉았다.

    지언이 물었다.

    “큰언니, 조금 전에 어디 갔었어? 우리가 한참 찾았는데…….”

    그러자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아무 곳이나 돌아다녔어.”

    옆에서 듣고 있던 지서가 차갑게 웃음을 지었다.

    “큰언니가 진짜 아무 곳이나 돌아다녔지. 하필 그 아무 곳이 유씨 가문이 쉬는 곳이었고, 하필 유씨 가문의 공자를 만났지만……!”

    지서의 비꼬는 듯한 말을 들은 장씨 부인이 그녀를 질책했다.

    “무슨 말을 그리해? 오송원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크다고, 아는 얼굴을 만날 수도 있지 그게 무엇이 이상하다고? 조금 전에 두 사람도 유씨 가문의 유 대부인을 만나러 가지 않았어? 뭐, 들여 보내주진 않았지만 말이다.”

    아픈 곳을 찔린 위씨 부인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동서,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내가 유씨 가문의 유 대부인께 인사를 하러 가는 것이 잘못됐단 말이야? 우리 가문과 유씨 가문은 본래 서로 왕래가 있던 집안이었네, 말은 왜 그리 듣기 싫게 하는가?”

    “말이 듣기가 싫으셨으면 따님 관리부터 하시지요.”

    장씨 부인 역시 지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지온이가 유씨 가문의 공자를 만난 것을 지서가 어떻게 알았단 말입니까? 뒤를 밟았던 것이 아니고요? 누가 다른 속내를 품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소리에 금방 눈시울이 붉어진 지서가 위씨 부인을 잡아당겼다.

    “어머니!”

    딸의 난처해하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진 위씨 부인이 화를 냈다.

    “동서! 숙모면 숙모답게 굴어야지, 뭐 하는 짓인가? 누가 제 질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해!”

    “형님께선 참으로 숙모 같은 모습을 가지셨나 봅니다. 바로 조금 전에 지온이의 덕으로 내원에 들어와 놓고 얼굴을 이리 빨리 바꾸다니요?”

    “자네, 정말…….”

    한미한 집안 출신이긴 했지만, 그래도 세가의 귀부인으로 여러 해를 지낸 덕에 이렇게까지 욕을 들어본 일이 없던 위씨 부인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치미는 화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목이 땅땅하게 부풀었다.

    무시하듯 비웃음을 흘린 장씨 부인이 다시 말에 뼈를 박았다.

    “형님, 제가 형님이었으면 지금이라도 딸을 고분고분하게 다시 교육하겠습니다. 유씨 가문으로는 못 갔어도, 그래도 시집은 가야지 않겠어요? 오늘이 얼마나 기회가 좋습니까? 계속 그렇게 위만 쳐다보다간 정말 시집도 못 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위씨 부인이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 그녀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세요. 여기는 집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이 들으면 얼마나 안 좋겠어요?”

    “…….”

    그 소리에 위씨 부인은 그대로 목구멍으로 치고 올라오는 핏물을 꾸역꾸역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우선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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