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44)화 (44/385)
  • 44화. 드리지 않았을 리가요

    바쁜 와중에 잠시 쉬러 나온 화옥은 물을 마셨다.

    그때, 여관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밖에서 작게 그녀를 불렀다.

    “사저! 대사저!”

    작은 누각을 지켜보라 남겨둔 사제인 것을 확인한 화옥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일이라도 생겼어?”

    여관이 화옥의 귀에 대고 몇 마디를 속삭였다.

    “세 명이에요. 운도 좋습니다.”

    화옥이 입술을 비틀었다.

    “어떤 사람들이야?”

    “유씨 가문의 공자 두 사람과 형부, 태평사의 루 대인이에요.”

    “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랐지만, 기분이 좋아진 화옥이 되물었다.

    “유씨 가문의 공자? 전에 혼약이 있었던 그 공자?”

    여관이 눈썹마저 아래로 쑥 내리며 대답했다.

    “네, 바로 그 집안의 둘째 공자예요. 그리고 유씨 집안의 대공자 역시 함께 있고요.”

    흥미진진하다는 듯 화옥이 말했다.

    “인연은 인연인가보네! 전 약혼자에 전 큰아주버님까지 있으니 고르기도 어렵겠어!”

    여관이 그녀를 따라 웃음을 지었다.

    화옥이 다시 물었다.

    “지금 그대로 남아있는 거야? 안 떠났어?”

    “네, 지금 차를 마시고 있어요.”

    화옥의 눈에 경멸의 빛이 번쩍이고 지나갔다.

    “시녀도 없이 사내 셋과 함께 차를 마시다니, 아주 마음이 달았네.”

    그 누각은 귀한 분들의 휴게용으로 준비된 장소였다.

    화옥이 지온을 그곳으로 데려가 홀로 남겨둔 것도,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인 지온이 기회를 잡는지 아닌지 확인을 해보기 위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주 많이 기다렸다는 듯 기회를 덥석 붙잡지 않는가!

    ‘하긴, 혼약도 억지로 파기했을 텐데,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조방궁에 틀어박혀 수행이나 하고 싶었겠어?’

    화옥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던 그 사매가 조방궁에 모습을 보였던 그날, 그녀가 당장 돈 많고 부귀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 내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스승님의 상을 치르기 위해 궁관으로 돌아와 수행한다고 한 것도, 혼인할 다른 방법을 찾으려는 것일 뿐이겠지.’

    지씨 가문에서 혼인할 방법은 차남가에 의해 막혀버렸으니 이제 그곳에서 좋은 혼처를 찾기란 어려운 일일 터였다.

    그렇다면 쉽게 만들어 주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이렇게 사매를 잘 챙기는 좋은 사저라니까…….’

    화옥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방해하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 나눌 수 있게 해줘. 기왕이면 서로 더 깊은 인상을 남겨서 아쉬워하면 더 좋고…….”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여관이 낮게 대답했다.

    “네, 사저.”

    * * *

    편청 안에 모인 이들은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확하겐 유씨 가문의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언쟁을 벌이고 있다고 해야 했다.

    두 사람은 오송원에 나비가 어떻게 온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중이었던 것이다.

    사고(思考)가 비교적 틈이 없고 엄격한 대공자는 나비의 습성을 떠올렸고 그것에서부터 주장을 펼쳤다. 그는 오송원의 무언가가 나비를 불러들였고, 그것은 꽃가루 향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유모지의 논리는 조금 허술했다. 속된말로 구멍이 많았는데, 그는 오송원에 나비왕이 나타났고 마치 새들이 봉황을 따르듯, 주변의 나비들이 나비왕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며 유모지는 제 추측을 기반으로 온갖 사건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어찌나 생동감 넘치게 이야기를 하던지, 지온은 여기서 더 끊지 않으면 곧 이 얘기를 서책으로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온 소저, 소저께선 조방궁의 사람이니 어찌 된 영문인지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원인이 무엇이라 하던가요?”

    유신지가 적당한 때를 보아 화제를 돌렸다. 계속 가다간 제 동생인 유모지가 전기수(*傳奇叟: 과거 이야기책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던 사람)로 나설 것 같았던 것이다.

    지온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저희 조방궁에선 화신(花神), 여이(女夷)께 공양을 올립니다. 하여 조방궁 제자 대부분이 화초를 가꿀 수 있지요. 특히 진인 중에 몇 분께선 향분을 배합하실 수 있고 향환 역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분들께서 어떤 비방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루안이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두루뭉술한 말 속에 온갖 의미들이 가득했다.

    유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진인분의 능력으로 벌어진 조화인가 봅니다.”

    유모지가 다소 불만스러운 듯이 입을 열었다.

    “내 의견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데, 왜 다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유신지는 그저 웃음만 지어 보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온은 오히려 유모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공자께서는 소설을 써보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유모지가 짜증을 냈다.

    “지금 내가 헛소리를 한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설마 헛소리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지온이 다시 말했다.

    “마침 저희 집안에 세책방(貰冊房)이 있어 가끔 소설책을 내기도 합니다. 저도 그 소설들을 가끔 읽는데 다 재미가 없었거든요. 오히려 공자님께서 조금 전에 들려주신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 말씀을 드린 것이지요.”

    갑자기 온화한 얼굴이 된 유모지가 자랑하듯 말했다.

    “당연합니다. 집안에 동생들도 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가장 좋아하거든요. 어렸을 땐 매일 한 편씩 이야기를 지었었는데, 녀석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이야기의 뒷부분을 안 들려줬습니다.”

    “크흐흠…….”

    유신지가 헛기침을 하며 유모지에게 눈을 흘겼다.

    “내년이면 과거를 봐야 하는데 조부께서 말씀하신 진도는 모두 따른 것이냐?”

    유모지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어지자 지온은 입을 가리고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이 집 형제들은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 재밌네.’

    “공자님!”

    그때, 유신지의 시종이 들어와 그에게 말을 전했다.

    “제사를 지낼 시각이 되어 부인께서 소인에게 공자님 두 분을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유신지는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몸을 일으켰다.

    “루 형, 지온 소저, 오늘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나중에 다시 뵙지요.”

    지온 역시 마주 일어나 인사했다.

    “저 역시 그러길 바랍니다.”

    그리고 문 앞까지 걸어갔던 그가 다시 몸을 돌리더니 말했다.

    “루 형, 전에 지온 소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여인이니 너무 무섭게 나무라지 마시오.”

    유신지는 루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유모지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형제의 대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그게 무슨 뜻이야, 큰형? 루 낭중이 여인까지 괴롭혀?”

    “쓸데없이 궁금한 것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이냐? 요즘 공부할 것이 적은 것이야?”

    “아니, 왜…….”

    음성이 멀어지고 편청 안엔 침묵이 찾아왔다.

    기왕 자리에서 일어선 지온은 역시 자리를 뜨기로 하고, 루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루 대인, 제게 다른 용건이 없으시면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루안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하지만 지온이 그의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그가 손을 뻗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지온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그의 팔을 밀어냈다. 그리곤 가슴 앞으로 팔을 모으려 했지만, 그에게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흠칫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례를 범하려는 건가요?”

    개의치 않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 루안이 다른 손을 들어 그녀의 소매 속을 뒤적였다.

    손수건을 꺼낸 그가 팔을 풀었다.

    그녀의 손목을 잡았던 손바닥엔 향을 내는 향고(香膏)의 향이 남아있었고, 손수건에는…….

    지온은 이미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루 대인. 사랑의 마음을 확인할 약속의 증표가 필요하시다면, 소녀가 드리지 않을 리가 없지요. 한 장으로 부족하시면, 열 장, 스무 장이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루안의 차가운 얼굴에는 심각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손수건을 든 그의 손엔 시퍼런 핏줄이 불거져 있었고 눈빛 역시 전처럼 안정적이지 않았다.

    낮게 내려앉은 그의 음성이 지온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넌 누구지?”

    ‘누구냐니…….’

    지온의 눈 속으로 수많은 감정이 흘러갔다.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한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소녀, 성은 지(池) 이름은 온(韞)이옵고 지씨 가문의 적장녀로 가문의 본적은 남주(南洲)입니다. 부친의 함자는 지원(池元)이라 하시고, 과거 장릉현령(長陵縣令)과 순조어사(巡漕御史)를…… 태어나신 곳은…….”

    “난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루안이 고함을 치자 그의 뺨에 어린 붉은 기운이 더욱 선명해졌고 눈은 전보다 더욱 형형하게 빛났다.

    지온이 대답했다.

    “대인,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마시지요. 생일도 곧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 네 생일을 알고 싶다고 했지?”

    지온이 의아한 듯 물었다.

    “생일을 알지 못하면 어찌 납폐(*納幣: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신부의 집으로 폐물을 보내는 일, 보통 사주단자를 교환한 후 이루어짐)를 보내시려고요?”

    그리곤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그녀가 놀라 물었다.

    “설마, 대인께선 책임지실 생각이 없으신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지요. 저희 집안이 그래도 문사 출신의 관가입니다. 중매의 예도 갖추지 않고 사통을 하는 것이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맞아 죽을…….”

    그가 손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처 그녀의 목에 닿기 전, 지온이 별안간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대인, 안 됩니다! 남녀가 유별하지 않습니까!”

    부드럽고 말랑한 것을 품에 둔 루안은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 가지 질문이 루안의 머릿속에 스치자마자, 루안의 귀로 비명이 들려왔다.

    ‘걸린 건가?’

    지 소저는 차남가와 척을 지고 조방궁으로 온 상황이었다.

    혼사를 물린 것도 돌아가신 스승님께 효를 다하기 위해서라 했었다.

    그런 상황에 만약 그녀가 다른 사내와 몰래 만나는 모습을 들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으니 그 여파도 아주 심각하겠지.’

    예를 들어 그녀가 사라진다면, 지씨 가문의 차남가와 삼남가는 지 소저의 부친이 남긴 유산을 나누어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스승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조방궁은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다. 오히려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듯한 사저만 있으니 그녀를 더욱 절벽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녀의 목숨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책임만 지면 되는가?’

    본가와는 이미 연을 끊었으니 혼인을 하는 데 그들을 통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혼인하겠다고 나서면 분명 좋아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은 술수를 내어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폐하를 뵈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루안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장 어려웠던 사건을 해결할 때보다 루안은 더욱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어 드디어 지금의 상황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품 안은 이미 비어있었고 비명 역시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작은 화로를 엎었다.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놀라 묻는 여인들의 음성이 밀려들었다.

    “무슨 일이세요? 왜 그러세요, 지 사저?”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실은 사고가 그대로 멈추어 있었던 루안은, 그제야 눈앞에 정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온은 이미 그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진 다탁(茶卓) 근처에 서 있었다.

    작은 화로는 그녀가 엎은 것이었고 비명 역시 그녀가 지른 것이었다.

    조금 전의 포옹도 그저 그의 착각 같았다.

    ‘착각이 맞는 것이겠지?’

    자신조차 의심이 들 정도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