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43)화 (43/385)
  • 43화. 다시 뵙습니다

    위씨 부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본 장씨 부인이 비웃음을 흘렸다.

    “유씨 가문을 찾으십니까, 형님? 유씨 가문 사람들이 우리와 비슷한 자리에 앉을 리가 있겠어요? 법회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고, 설령 들어왔다 하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도 않을 테니, 마음 접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때, 마침 지서의 눈 끝에 유씨 가문의 유 대부인이 보이자 지서가 다급하게 제 어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위씨 부인은 입씨름을 접어두고 얼른 몸을 일으켜 인사를 건네려 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벌어질까 걱정한 듯한 유씨 가문은 내원에 들자마자 한쪽에 자리한 작은 누각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가려던 위씨 부인을 밖에서 들어가지 못하게 막자, 그녀가 말했다.

    “유씨 가문과 전부터 아는 사람이라 특별히 인사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러자 문을 지키는 조방궁의 여관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오늘 손님이 많으시어 인사가 어려운 것을 이해해 주시지요. 서로 아시는 집안이라면 달리 인사를 나누실 기회가 또 있으실 것입니다.”

    한 마디로 들여보낼 수 없다는 소리였다.

    위씨 부인은 분이 치솟았다.

    혼약이 파기되고 분가로 집안에 난리까지 난 후로, 유씨 가문을 찾아갈 때마다 완곡하긴 했지만 언제나 만남을 거절당했다.

    유 대부인은 집에 없거나 늘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오송원까지 왔겠는가!’

    다시 혼약을 잇는 것은 가능성이 무척이나 낮은 일이긴 했지만, 이대로 지서의 혼사가 물 건너가기 전에 도전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에게 딸이 시집을 못 가더라도, 유씨 가문에 그래도 옛정이 있으니 다른 집안에 혼사에 관한 말이라도 해 달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되면 그나마 다른 쪽과의 혼사라도 쉬워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던 위씨 부인은 씩씩거리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유모지가 들어가는 것을 제 눈으로 본 지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지, 제 자리로 돌아와 한동안 좌불안석으로 불안하게 있더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제가 아는 친우 몇을 보았는데 가서 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가보거라.”

    지서의 말에 위씨 부인은 대충 손을 흔들며 대답했지만, 장씨 부인이 ‘좋은 마음’으로 나섰다.

    “지서야, 조심하거라. 내원에 남객도 많으니 함부로 부딪히면 안 돼.”

    그 말에 위씨 부인이 별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서가 아무 곳이나 다닐 것도 아니고, 함부로 부딪힐 일이 뭐가 있어?”

    장씨 부인이 빙긋 웃었다.

    “네네, 형님. 제가 걱정이 많았네요.”

    그러며 장씨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함부로 다녀도 누가 말릴 줄 알아?’

    * * *

    어머니를 뵙고 난 유신지는 잠기 쉬려 다른 이들과 작은 누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유모지가 그에게 물었다.

    “큰형, 아깐 어디 갔다 온 거야?”

    “당연히 선현(先賢)께 제를 드리러 다녀온 것이지.”

    그러다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를 떠올린 그가 이상한 눈빛으로 제 동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둘째야, 네가 전에 했었던 그 혼약 말이다. 넌 어찌 생각했느냐?”

    갑자기 큰형이 왜 이러나 싶은지 유모지가 입을 열었다.

    “뜬금없이 그건 왜 물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해, 다 어른들이 알아서 결정하실 것을…….”

    “지 소저를 본 적 있다지 않았어? 좋은 여인이란 생각은 안 들었느냐?”

    유모지가 성의 없이 대답했다.

    “미인인 것 같더라.”

    “다른 건?”

    “기억 안 나.”

    유신지가 한숨을 쉬었다.

    “진짜 인연이 아니었나 보구먼.”

    “뭔데, 큰형…….”

    큰형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유모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또다시 루안을 본 유신지가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우연한 만남이 있나! 루 형!”

    * * *

    영령당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루안의 눈에 다시 익숙한 신형이 들어왔다.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내원의 입구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지씨 가문의 둘째 노야이었는데, 그녀와 척을 졌던 그녀의 숙부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싹싹한 미소와 함께 부드럽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차남가는 그녀가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주자 믿기 어려워하는 듯 보였지만, 루안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늘 저런 사람이었는데 믿지 못할 게 뭐라고…….’

    그녀는 철저하게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상대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좋지 않은 의도를 가졌다면 더욱 마음을 넓게 열고 상대가 잘못을 저지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단번에 때리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사실 그녀는 아주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악의만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녀로부터 가장 큰 선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엔 그 복을 차버리는 사람들이 늘 이렇게나 많구나.’

    차남가의 노야와 부인이 가고 나자 사저라는 이가 또 하나 나타났다.

    잠시 조용히 생각하던 루안은 그들의 뒤를 따라 작은 누각으로 향했다.

    그가 아직 이곳에 온 이유를 뭐라 할지 생각하기도 전, 의도를 알 수 없는 거머리 같은 녀석이 또다시 나타났다.

    “이리 우연한 만남이 있나! 루 형!”

    루안은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유신지는 이미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온 뒤였다.

    “루 형, 산책하고 있었소? 법회가 아직 시작되지 않아 별로 볼 것도 없는데 차라리 들어가 차나 한잔하는 것이 어떻소? 아까 헤어질 때, 실은 사건 몇 개가 흥미로워 루 형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우리 같이 사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거절의 말이 입가를 맴돌았지만, 순간 마음이 바뀐 루안이 대답했다.

    ‘그를 따라 들어가면 이목을 끌지 않을 테니 그것도 괜찮겠군.’

    루안의 흔쾌한 대답은 유신지로선 꽤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단숨에 그를 안으로 이끈 유신지는 회랑을 지나 편청(偏廳)으로 향했다.

    유모지는 입을 삐죽이며 그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대체 형님은 저자에게 왜 저리 관심을 보이시는 거야? 저 흉악하고 탐욕 가득한 이리 같은 놈이랑은 숙부님도 웬만하면 엮이지 않는 게 좋다고 하셨는데…….’

    “루 형은 오송원에 나비가 몰려든 원인을 찾았소?”

    유신지가 웃으며 묻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 오송원이 열자마자 이미 많은 이들이 찾아본 것 같던데, 아쉽게도 아무도 원인은 찾지 못한 것 같아서…….”

    “그리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대공자는 뭔가 생각이 있으신가 보군.”

    그저 하는 루안의 대답에 유신지가 말했다.

    “난 냄새가 원인인 것 같소. 하지만 날도 이미 며칠이나 지나는 바람에 나비도 많이 흩어졌고, 특별한 냄새도 맡을 수가 없더군. 더구나 오송원엔 화초들도 많아서 각종 냄새가 섞여 분별하는 것이 더 어렵고 말이오.”

    루안이 대답이 없자 유신지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루 형은 어찌 생각하시오?”

    “그런 것 같소.”

    루안의 대답은 무성의했지만, 유신지는 그가 마치 제 의견에 동의라도 해준 듯한 느낌에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다.

    “루 형이 나와 똑같이 생각할 줄 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이게 바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아니고 뭐겠소?”

    그들의 뒤에서 걷고 있던 유모지는 눈을 까뒤집었다.

    ‘저 혼자 좋아 난리가 났네, 아주 저 혼자 난리가 났어!’

    유신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루 형은 이런 곳엔 거의 안 오는 사람이 아니오? 사람이 너무 성실해도 문제요. 사건조사는 할라치면 끝도 없소. 쉴 땐 쉬어야지. 아니면 사는 것이 너무 재미없지 않겠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모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출근 안 한 농땡이들이 성실해?’

    “음? 벌써 와있는 사람이 있었구먼?”

    그때, 유신지가 중얼거리며 편청(偏廳)의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들려온 음성에, 안에 있던 소녀의 맑고 반듯한 아름다운 이마가 슬며시 들리더니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동그랗게 굽은 창으로 야트막한 빛이 넘어왔다.

    보일 듯 말 듯, 정교한 난초가 그려진 베옷이 우아했다. 작은 백색의 자기 찻잔을 든 열 개의 손가락은, 파랗게 느껴질 만큼 새하얗게 도드라졌다.

    유신지는 멈칫했다.

    조금 전 제당에선 그가 들어갔을 때, 지온은 이미 자리를 정리한 상황이었다.

    평범한 상황에서 만났을 땐 그저 아름다운 낭자라고만 생각했건만, 그는 이제야 같은 미인이라도 환경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감정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유모지가 했던 ‘미인인 것 같더라’라는 무성의한 말을 떠올린 그는, 내심 자조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자신 역시 나중에 지 소저를 떠올리며 그와 똑같이, ‘미인인 것 같더라’는 무성의한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미인도 미인 나름이로구나.’

    “지온 소저이셨군요.”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뵙습니다.”

    지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벌써 다 아셨군요, 대공자님.”

    그리고 다시 루안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루 대인님.”

    곧이어 그들의 뒤로 유모지가 나타나자 지온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웃으며 예를 갖췄다.

    “둘째 공자님.”

    “날 아시오?”

    유모지가 놀라 묻자 지온이 더욱 놀라 되물었다.

    “저를 모르시나요?”

    분명 ‘지씨 가문의 큰 소저’의 기억 속엔 그녀를 도와 주머니를 훔쳐 가려던 도둑을 잡아 준 둘째 공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신지가 제 이마를 철썩 치며 말했다.

    “지온 소저, 둘째 녀석이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서너 번은 만나야 얼굴을 기억합니다.”

    “…….”

    지온은 참으로 생각이 많아졌다.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저 공자가 자신을 좋아해 주길 얼마나 바랐던가?

    ‘설마, 애초에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줄이야…….’

    지온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신지가 유모지를 향해 말했다.

    “지씨 가문의 적장녀인 지온 소저시다. 너도 한 번 뵌 적이 있다.”

    그제야 기억이 난 유모지는 곧 어색한 얼굴이 되었지만, 지온은 오히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조금 전에 이곳에서 사저와 차를 마셨는데 귀하신 분들을 만나 뵐 줄 몰랐네요. 그럼 공자님들께서 오셨으니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지온 소저, 기다리시지요.”

    유신지가 웃음을 머금은 채 읍하며 말했다.

    “먼저 오셨으니 실례는 저희가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밖은 인파로 붐벼 이대로 나가시면 다른 이들과 많이 부딪히실 것입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차를 한잔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제가 차를 조금 배운지라 즐기며 대접할 정도는 됩니다. 소저께도 맛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사람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그리고 화옥이 날 이곳에 남아있으라 한 이유도 이것 때문인 것 같지?’

    지온이 낮게 웃음을 지었다.

    “대공자께서 이리 정중히 초대하시니 그럼 부탁을 드려야겠네요. 이리 오시지요.”

    네 사람은 사방으로 한 자리씩 자리에 앉았다.

    지온은 이곳의 지객을 맡은 여관을 불렀다.

    “물 좀 다시 가져다주세요.”

    그리곤 직접 다구(茶具)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구들에 물을 부어 씻고, 헹구고, 데우는 일련의 과정들이 늦거나 빠르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루안은 그저 조용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사람도 다르고, 장소 역시 달랐지만, 행동은 너무도 비슷했다.

    세상에 이렇게 비슷한 사람이 두 명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이런 모습을 내게 그대로 보이는 것인가?’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행동을 하는 것이 자신이 알아채는 것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듯 보였다.

    만약 그녀가 자신에게 일부러 보이기 위해 이리 행동을 하는 것이라면,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늘 이런 식이긴 했었지.’

    군자처럼 행동하면서도 늘 몇 푼의 재미를 잃지 않던 게 그녀였다.

    마지막 다구까지 모두 데운 지온이 유신지에게 다구를 건넸다.

    “대공자님, 이제 하시면 될 듯합니다.”

    그녀가 다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던 유신지가 웃으며 말했다.

    “지온 소저의 다예(茶藝)가 깊으셨군요. 제가 비웃음을 사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지온이 자연스레 대답했다.

    “문학과 사학, 경의에 매진하시다 과거에 급제하여 능력을 크게 쓰고 계신 기재(奇才)분들과 저 같은 어린 소저와 어찌 비교되려고요.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오를 기회가 없으니 그저 이런 잡기에 마음을 들인 것뿐이지요.”

    그 말에 유신지는 순간 놀랐다.

    그녀의 말은 그저 듣기엔 겸손한 듯 들리지만, 실은 자신의 다예(茶藝)가 그보다 훌륭하단 것을 인정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만이 과하군.’

    안 그래도 어색했던 유모지는 그녀의 말에 제 어미에게 들은 그녀에 대한 평가들이 생각나 내심 중얼거렸다.

    ‘역시 세상 넓은 줄 모르는 철부지로군. 이러니 어머니 마음에 들 수가 있나.’

    그저 루안만이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것들도 그에 비해 부족하지 않을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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