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42)화 (42/385)
  • 42화. 오해를 푼 사자매

    오송원에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지온은 손을 흔들어 도동(道童)을 불렀다. 도동에게 대바구니를 거처에 가져다 두게 한 지온은 홀로 걷기 시작했다.

    조방궁이 전에 없이 시끌벅적했다.

    ‘화옥 사저가 이 기회를 놓치지는 않겠지?’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저희도 같은 식구예요. 저희 가문 큰아가씨께서 능운진인의 제자거든요……정말입니다, 저희가 왜 속이겠어요? 아휴, 참. 왜 또 말을 그리하세요? 제가 지금 바로 저희 큰아가씨를 찾아가면 될까요?”

    “어라 저기, 저쪽에! 큰아가씨 아니셔?”

    “지온아, 지온아!”

    지온이 돌아보자 차남가 사람들이 지객(*知客: 손님을 맞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과 실랑이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온이 그들을 발견하자 위씨 부인은 안면근육을 비틀어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지온아, 너도 이곳에 있다니 참으로 잘 되었다.”

    지온이 다가가 예를 올렸다.

    “숙부님, 숙모님, 큰오라버니를 뵙습니다.”

    지형 역시 전에 없이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한동안 집에 오지 않았는데, 궁관에선 잘 지내고 있는 것이냐?”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부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녀의 부드러운 태도에 지형이 다소 안심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이 청명절이라 우리도 제사도 드리고 너도 살필 겸 찾아왔다.”

    지온이 감사하다며 말했다.

    “둘째 숙부님, 숙모님께서 오시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하지만 지온이 그들이 원하는 말을 꺼내지 않고 지형 역시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못하자 결국 위씨 부인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섰다.

    “혹시 내원에 자리 하나 부탁을 해도 될까? 오늘 법회가 이리 성대하니, 우리도 조상님들과 아버님을 위해 함께 제에 참여하고 싶구나.”

    “네, 그럼요!”

    다른 핑계를 댈 생각도 없었다는 듯, 지온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위씨 부인이었다.

    “으응? 해, 해주겠다고?”

    지온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한 가족이 아닙니까, 그리 큰일도 아닌 것을요.”

    그리곤 그녀가 지객을 향해 돌아섰다.

    “사매님들, 내원에 자리 하나 받을 수 있을까요?”

    지객이 잠시 고민을 하곤 대답했다.

    “대부분 자리가 다 찼습니다. 내원 외각에 몇 곳 빈 곳이 있긴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앉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등자를 몇 개 더 놓고 아이들은 좁게 끼어 앉으면 어떨까요?”

    “저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사저께선 잠시 기다려주시면 저희가 총관 선고께 여쭙고 오겠습니다.”

    지객의 대답에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게요, 사매. 지난번에 대장공주님께서 내려주신 차가 있는데 나중에 두 분께 좀 나눠드릴게요.”

    그러자 지객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해주시다니요, 사저.”

    * * *

    총관에게 간 지객은 금방 돌아와 차남가 사람들을 안내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만족한 위씨 부인과 차남가의 가족들은 희희낙락 웃으며 지객 뒤를 따라나섰다.

    “사매가 성격이 참 좋아. 집 떠나기 전에 차남가의 숙부와 척을 졌다더니, 그래도 도와주겠다고 이리 발 벗고 나서다니…….”

    들리는 음성에 지온이 고개를 돌려보니 다른 제자 몇 사람과 함께 화옥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화옥은 복장을 제대로 갖춰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부용관(*芙蓉冠: 연꽃 모양 관모)을 쓰고, 연화복(*蓮花服: 연꽃이 수놓아진 옷 혹은 연꽃잎 모양의 옷)을 입은 화옥은, 옅고 길게 그린 눈썹과 손에 든 불진(*佛塵: 중이나 도사가 번뇌 따위를 물리치는 표지로 쓰는 총채)이 잘 어우러져 고인의 기도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며칠간의 금족령으로 갇혀있었던 터라 아래턱이 마른 각을 드러내어 다소 날이 서 보였다.

    지온은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화옥 사저.”

    고개를 끄덕인 화옥이 조금 전 일을 다시 언급했다.

    “저들을 위해 자리까지 얻어다 줘도 결국 고맙단 이야기도 듣지 못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있나?”

    담담한 화옥의 어조에선 지난번 청옥과 함옥을 함정으로 밀어 넣던 악심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모르는 이가 들으면 사저가 좋은 마음으로 사매를 일깨워주는 듯 보였을 것이다.

    의아함을 감춘 지온은 더욱 진심 어린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별것도 아닌 일을 마음에 담아둘 것이 무엇이겠어요.”

    화옥의 신색이 가볍게 흔들리는 듯하더니, 화옥은 감탄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매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구나. 그것도 모르게 편견 때문에 사매에게 못 할 짓을 했으니…… 지난번 일은 내가 잘못했으니 부족한 날 사매가 용서해 줘.”

    그러며 화옥은 허리까지 굽혔다.

    상대가 저리 작정을 하고 나오는 마당에 지온이라고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얼른 허리를 굽히는 화옥을 붙든 지온이 가슴이 다 절절하게 대답했다.

    “이러지 마세요, 사저! 사소한 오해에 이렇게까지 하실 게 무엇이랍니까? 청옥과 함옥이 아직 철이 없다 보니 누군가에게 미움을 산 것이겠지요. 그러다 모함까지 당한 것이겠지, 그게 사저와 무슨 상관이 있으려고요! 사저는 궁관 일을 관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문제가 생긴 것도 모자라 두 사람의 일에 연루까지 됐으니 충분히 조급하셨을 만한 것을요.”

    화옥이 감동한 듯 와락, 지온의 손을 다시 움켜쥐었다.

    “사매가 그리 말해주니 내가 더 부끄럽네. 사실 흉수를 못 찾으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라 그땐 정말 마음이 급한 게 사실이었거든. 하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함부로 죄를 확정해선 안 됐던 것은 사실이잖아. 사매에게 묘수가 있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청옥과 함옥이 정말 큰일 날 뻔하지 않았어?”

    함옥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매가 손을 써준 덕분에 내가 크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던 거야.”

    지온이 함옥의 연기에 쿵짝을 맞춰 주며 오해 푼 사자매 지간을 연기했다.

    “왜 또 그런 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제가 사저에게 죄송해야 맞는 것이죠. 사저는 장(杖)도 맞고 거기에 금족령으로 정실에 갇히기까지 하셨잖아요. 모르는 이들이 보면 사저가 동문을 질투해서 모함하고,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말을 퍼트리는 바람에, 능양 사숙께서 어쩔 수 없이 가족 같은 사질을 대의멸친(*大義滅親: 큰 도리를 위해 부모나 형제를 돌보지 않음)하려 한 줄 알겠지만…… 휴, 다 제 탓이지요.”

    지온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떨어질 때마다 화옥의 얼굴 근육이 씰룩이며 꿈틀거렸다. 그러나 끝까지 참아낸 화옥은 웃음을 짜내는데 성공했다.

    “다 같은 도문의 사자매인데 지나간 일은 그만 넘어가야지…….”

    ‘건방진 년!’

    화옥은 속으로 거칠게 욕설을 뱉었다.

    굳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나씩 까발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모두 자신을 도발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역시 독한 계집이야!’

    지온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사저께서 제대로 차려입으신 것을 보니 법회에 오르시나 보네요. 그럼 한가한 저는 그만 민폐를 끼치고 이만 가보겠어요.”

    지온이 그대로 떠나려고 하자 화옥이 얼른 나서서 말렸다.

    “왜 그리 급히 가려고? 오늘은 큰 법회라 스승님께서 주관하시고 난 그냥 옆에 서 있는 것뿐이라 괜찮아.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제대로 대화할 기회도 없었던 것 같네. 지금 시간도 많으니 가서 차라도 한잔하지 않겠어, 사매?”

    “그건…….”

    “일정에 문제는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법회까진 아직 시간도 여유 있게 남았잖아. 아직 사람들도 오지 않았고.”

    화옥이 제 의도를 슬쩍 전했다.

    “사매는 오래 도성을 떠나있었으니 아는 사람도 많지 않지? 그동안 사저가 돼서 크게 이룬 것이 없지만, 그래도 궁관에 머물며 높은 관리와 훈귀가의 부인들과 소저들과는 자주 왕래가 있어 아는 사람들이 있거든. 내가 사매를 도와 그들에게 사매를 소개해 줄 수도 있어.”

    ‘아, 내가 여길 돌아다니는 게 윗사람들과 엮여보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았나 보네.’

    참으로 차남가와 다를 것이 하나 없는 속내가 아닌가?

    ‘차남가의 원도 들어줬는데, 사저의 원이라고 못 들어줄까!’

    지온이 마음이 흔들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구나…….”

    흔들리는 듯한 지온의 모습에 화옥이 더욱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문사 집안 출신에 값을 매기기도 어려운 가문의 천금 같은 소저인 사매는 우리완 다르지. 이번에 조방궁에 수련하러 온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이지, 스승님의 상(喪) 기간만 끝나면 가문으로 돌아가 높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이번에 다른 집안을 알아두면 나중에 좀 더 쉽게 왕래를 이어갈 수 있을 거야.”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지온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화옥은 그런 지온을 끌어, 잠시 휴식을 할 수 있는 작은 누각으로 향했다.

    “어서 따라와 사매. 이 사저가 높은 분들을 여러 해 모시면서 차는 좀 우릴 줄 아니 사매도 맛이나 보라고.”

    못 이기는 척 따라가며 지온은 화옥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 * *

    오송원 귀퉁이엔 작은 누각이 한 채 있었다.

    위치가 편리하여 높은 귀인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누각이었지만, 아직 귀인들이 도착하기 전이라 화옥이 잠시 사용하기 위해 찾은 것이었다. 마침 방해가 될 만한 이들도 없었다.

    두 잔쯤 차를 마셨을 때 지온이 다소 집중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화옥이 때마침 입을 열었다.

    “법회가 곧 열릴 것 같아. 내가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 사매랑 더 있어 주지 못할 것 같네, 어쩌지? 사매는 잠시 누각에 있어. 이야기 조금 후에 계속하자고.”

    지온이 기다렸다는 듯 득달같이 대답했다.

    “편하게 가보세요, 사저. 저도 이곳의 주인이라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화옥은 손을 모으며 다시 여러 번 실례를 구하고서야 자리를 떴다.

    누각을 나선 화옥의 얼굴엔 더는 미소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대로 살피고 있어.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한다 싶으면 바로 와서 내게 알리고.”

    “네, 대사저.”

    두 명의 제자가 대답하자 화옥이 다시 누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활처럼 굽은 궁형(弓形)의 창 아래로 차를 마시며 고개를 숙인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고동빛 창틀과 칠흑의 비단 같은 귀밑머리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더욱 도드라졌다.

    화옥이 차게 웃었다.

    ‘참으로 반반한 얼굴이야. 하긴, 그러니 귀인들과 엮이고 싶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떤 ‘귀인’을 만나느냐는 이제 그녀의 운이 얼마나 좋은지에 달린 것을!

    * * *

    장씨 부인이 익숙한 부인들 몇 명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할 때쯤, 위씨 부인이 지서를 데리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삼동서, 성격도 급하지 어찌 우릴 기다리지 않고 혼자 가버린 것이야?”

    “둘째 형님?”

    장씨 부인이 놀란 모습을 보이자 기가 산 위씨 부인이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왜, 우리가 들어오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가? 별것도 아닌 일을, 무엇이 어렵다고?”

    장씨 부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속이 다 뻥 뚫리는 기분의 위씨 부인이었다.

    다른 손님을 맞으러 가야 하는 지객이 다시 한번 주의하라고 하였다.

    “부인, 어서 자리에 앉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 사저가 부탁하셨지만, 내원에 자리가 부족하여 다른 분께서 먼저 자리에 앉으시면 저희도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깨달은 장씨 부인이었다.

    “결국, 지온에게 도움을 받으신 거였네요.”

    붉으락푸르락, 낯빛이 흔들리는 위씨 부인이 항변했다.

    “어찌 됐건, 한집안 식구가 아닌가! 우리도 아버님과 큰형님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니 그 아이도 제 몫을 해야지!”

    장씨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지온이가 이미 오송원에 위패를 모셨으니 법회엔 당연히 제 몫을 한 것이지요.”

    그리곤 비아냥거림도 잊지 않았다.

    “짐승도 제 밥 챙겨주는 이는 물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둘째 형님? 지온이의 이름은 야무지게 챙겨 드셔놓고, 왜 입을 싹 닦으십니까?”

    “내가 언제 입을 닦았다고 그러는가? 이 정도 사소한 일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생각해야 하겠어?”

    두 사람은 언쟁을 벌이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사내는 앞쪽에 자리를 잡았고 여가솔들은 뒤쪽으로 앉았다. 자리가 좋다 할 순 없었지만, 내원에 드는 것도 힘들었으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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