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41)화 (41/385)
  • 41화. 등수에 연연하고 있던 건

    잠시 생각에 빠졌던 유신지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루안은 여전히 동솥 속 종이를 뒤적이고 있었다.

    이제 막 태운 종이라 아직 남은 글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본 유신지가 웃음을 지었다.

    “듣자니 학자들 중에 자신이 공부하던 것들을 가져와 옥형 선생께 태워 올려 학업에 요행을 바라는 이들이 있다던데,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태운 것은 어느 집안사람의 것인지 모르겠군.”

    유신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은 루안은 조심스레 미처 다 타지 못한 종잇조각을 꺼내며 말했다.

    “한등.”

    “예, 공자님.”

    루안의 부름에 한등이 얌전하게 서책을 찾아 펼치더니 서책 사이에 남은 종잇조각을 끼웠다.

    부지깽이를 내려놓은 루안이 손에 묻은 재를 털었다. 그리곤 종잇조각을 끼운 서책을 받아들곤 종잇조각을 자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루안의 진지하고 신중한 모습에 농을 하려던 유신지마저 웃음을 접었다.

    “뭘 하는 것이오? 설마하니 지 소저가 사건에 연루됐소?”

    그 역시 법을 집행하는 이였기에 루안이 하는 일이 증거를 찾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루안은 대답도 하지 않고 종잇조각에 집중했지만, 아쉽게도 종이에선 다 타고 반쯤 남은 글자 하나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 정도론 필체를 확인할 수 없었고 동솥에 타고 남은 종이도 이미 한 번 뒤적여 다 부서진 터라 더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루안의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갔다.

    ‘우연인가? 아니면 그녀의 고의?’

    만약 진짜 ‘그녀’라면 순간적이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루 형, 대답이라도 한마디 해주면 어디가 덧나시오?”

    유신지는 여전히 종알종알 떠들고 있었다.

    그러자 루안이 물었다.

    “유씨 집안은 호기심이 전통이오?”

    “음?”

    “둘째 공자도 그러더니, 대공자도 그러는군.”

    말을 마친 루안이 손수건을 꺼내 손을 깨끗하게 닦곤 다시 향을 올렸다.

    덩그러니 세워진 위패를 본 그는 할 말이 너무도 많았는데 막상 말을 하자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옆에 말 많은 자까지 있으니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겠어.’

    선생님께선 영(靈)이 되셨으니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이해하실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께선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셨으니, 어쩌면 도연명의 시처럼 몸을 뉘어 산이 되신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남은 더럽고 추잡한 일들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맡기시는 것도 좋지.’

    루안을 따라 향을 올리던 유신지가 제가 거의 끝날 때쯤 슬쩍 물었다.

    “루 형, 이제 어디로 가실 것이오?”

    유신지의 그런 모습에 한등마저 유신지에게 눈을 흘겼다.

    “대공자는 집안 제사는 안 드리는 것이오?”

    루안의 질문에 유신지가 웃었다.

    “다들 아직 오지도 않아 급할 거 하나 없소!”

    바로 그때 밖에서 누군가 유신지를 찾으며 들어왔다.

    “대공자님, 어찌 아직 여기 계십니까! 부인께서 찾고 계십니다!”

    “어휴…….”

    유신지가 한숨을 쉬자 한등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대공자님, 집안에 일이 있으신 듯하니 저희 공자께서 공자님을 더 번거롭게 하면 안 되겠습니다.”

    제 집안사람의 눈먼 주먹에 맞은 터라 유신지도 이번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대로 공수를 하며 작별을 고한 유신지였지만, 한 마디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렵게 여기까지 나왔으니 루 형, 조금 있다 너무 급히 가지 말고 우리 같이…….”

    “대공자니임!”

    “알았네, 알았어! 감세!”

    하인이 재촉하며 난리를 부리자 엉성한 작별인사와 함께 유신지가 부리나케 시종과 떠났다.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한등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저 대공자란 사람 뭘까요? 어쩐지 공자님께 들러붙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어찌 알겠느냐?”

    루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매번 만날 때마다 저리 살갑게 나오지 않습니까. 무시해도 소용없고 말입니다. 꼭 남정네가 여인네 뒤꽁무니를 쫓는 것 마냥…….”

    순간 한등이 화들짝 놀랐다.

    “유씨 가문이 원래 남쪽 출신이던가요? 그쪽은 남색을 한다는 소리가 있던데, 설마…….”

    루안이 미간을 좁히며 한등을 힐난했다.

    “요즘 대체 뭘 보고 다니는 것이냐? 남색이란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왜, 너도 한 사람 필요한 것이냐?”

    한등이 연신 손을 저었다.

    “에이, 그런 농담 마십쇼. 저도 전기수(*傳奇叟: 과거 이야기책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던 사람)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유신지 관련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았던 루안이 한등에게 물건을 정리하라 지시했다.

    “너도 알아서 놀다가 법회가 끝나면 다시 만나자.”

    “알겠습니다, 공자님.”

    * * *

    유신지 쪽에서도 그와 비슷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공자님께선 어딜 가시든 크게 환영받지 않으십니까? 루 낭중만 공자님께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일관하는데 공자님은…….”

    “왜 계속 칼바람에 궁둥짝을 들이미냐고?”

    “헤헤헤, 소인이 또 언제 그렇게까지…….”

    유신지가 웃으며 물었다.

    “네가 보기에 루 낭중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더냐?”

    시종이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엄격하고, 냉혹하고, 잘 안 웃지도 않잖습니까.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심장이 다 떨립니다. 아, 그리고 돈을 엄청나게 밝힌다던데요? 본인 직위를 이용해서 협박하고 돈을 강탈한다고 들었습니다.”

    시종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유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마지막, 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되물었다.

    “그가 왜 그리 돈을 좋아하는 것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시종이 멈칫했다.

    “돈 좋아하는 것에도 이유가 필요한 것입니까?”

    “평범한 이들에겐 이유가 필요치 않겠지. 하지만 그는 북양왕실의 넷째 공자였다. 북양의 영지는 스스로 나라라 칭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만큼 광활한 곳이 아니냐? 그러니 루 낭중은 어려서부터 산처럼 쌓인 온갖 금은보화들을 보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지금은 하나, 남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시종이 말을 이었다.

    “가문에서 쫓겨났으니 그는 더는 북양왕족이 아닙니다. 전에는 가졌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가졌다가 없어져서 그렇게 돈을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유신지가 까딱까딱,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틀렸어.”

    “무엇이 말입니까?”

    “루씨 가문은 도성에도 가산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루안의 손에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때 그가 어떻게 북양 왕세자와 척을 질 수 있었겠느냐?”

    시종은 여전히 아닌 것 같단 표정이었다.

    “그것도 그냥 공자님의 추측이 아닙니까?”

    “자칫했으면 대공자인 날 탐화랑에 오르지 못하게 했을 뻔한 녀석이다. 넌 그런 녀석이 그렇게 멍청할 것 같으냐?”

    유신지가 웃음을 흘렸다.

    “북양왕의 사망 소식이 알려졌을 때 그는 영지에서 먼 상해(桑海)에 있었다. 마침 무애해각이 불타 없어지는 일을 겪었을 때였지. 그의 형은 그보다 나이도 한참이나 많고 오래 북양을 수호해온 터라 기반도 탄탄했다. 천 리 밖 먼 곳에서 그가 상을 치르기 위해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무엇 하나 제 형님보다 나은 것이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란 말이지. 그런데 형과 왜 왕위를 두고 경쟁을 하겠느냐?”

    시종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그러니 진 게 아닙니까…….”

    “지는 것은 예정된 결과였을 뿐이다.”

    유신지의 말이 이어졌다.

    “무엇하나 우세를 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문제를 만들지 않았어야 옳았던 것이지. 루 낭중이 사건을 해결할 때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을 하는지 보지 못했느냐? 그런 그가 과연 그것을 몰랐을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시종이 얌전하게 물었다.

    “그럼 공자님은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그러자 유신지가 아무렇게나 팔을 휙 휘두르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지!”

    “…….”

    유신지가 쥘부채로 시종의 머리를 탁하고 때렸다.

    “어허, 그 무슨 눈빛이냐! 증거가 없는 이상 무엇도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아무튼, 그는 비빌 언덕 하나 없이 왕위를 두고 정쟁을 벌일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또 비빌 언덕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사사로운 돈에 연연하며 죽자사자 모아봐야 의미가 없단 말이지. 그러니 그에겐 분명 뭔가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리곤 그가 활짝 웃음을 피어 올렸다.

    “대공자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다. 그가 감춘 비밀을 내가 풀어낸다면, 더는 누구도 과거에서 내가 그를 실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란 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 아니냐!”

    그제야 시종이 완전히 이해한 듯 입을 헤, 벌렸다.

    “등수에 연연하고 있던 건 사실 공자님이셨군요? 아얏!”

    시종은 다시 날아든 쥘부채에 한 방을 맞고 말았다.

    루안은 홀로 향기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공기에서 아직 완전히 흩어지지 않은 향수 냄새가 났다.

    때때로 나비가 날아들어 루안 주변을 돌며 춤을 추자 원내에 들어온 사람들의 이목과 함께 탄성이 울렸다.

    루안은 걸으며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 * *

    월말에 보는 달 시험이 막 끝나고 옥형 선생님께선 서원의 학생들을 이끌고 바다로 야유를 나가셨다.

    태자와 그녀는 그사이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늘 대화가 잘 통했다.

    섬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을 본 태자가 문득 과거의 일 하나를 떠올리며 말했었다.

    “과인이 어렸을 때의 일이었네. 생신 선물로 고모님께 세상에 모든 나비를 드리겠다, 약조한 일이 있었어. 어려 참으로 무지하였지. 결국,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한 것이지.”

    가만히 생각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하신 그 약속,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태자가 웃으며 물었다.

    “또 무슨 괴상한 생각을 떠올린 것인가?”

    그러자 그녀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괴상한 생각이라니요? 제가 낸 꾀가 언제 효과가 없던 일이 있었나요?”

    태자는 당시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녀에게 말했었다.

    “과인이 말실수했구먼! 옥 소저,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나비는 향으로 날아드는 것이니, 그 향이 강하기만 하다면 많은 수의 나비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마침 서책에서 비슷한 방법을 보았는데, 꽃을 재배하는 화농(花農)으로 나비를 불러들여 꽃가루를 전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방법을 좀 더 개량한다면 근처에 있는 나비들을 전부 불러들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수많은 나비가 몰려들어 춤을 추게 만들면, 전하께서 하신 그 약속도 지키신 셈이 아니겠어요?”

    태자가 손뼉을 쳤다.

    “좋은 방법이야! 과인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가 모두 소저에게 달린 셈이군!”

    그러자 그녀가 볼멘소리를 냈다.

    “전하, 지금 제게 그 방법을 개량해보라고 하신 것입니까? 전하는 쉽게 말씀하시지만, 저는 또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는데요!”

    “능력 있는 이에게 일도 몰리는 법이지. 그러게 누가 옥 소저더러 그렇게 뛰어나라던가?”

    “흥!”

    고개를 휙, 하고 돌린 그녀가 소리쳤다.

    “금벽아, 잊지 말고 장서각에 가서 금명견문록이란 서책 좀 찾아놔.”

    그 후 향수 배합법을 알아낸 그들은 효과를 시험하기 위해 섬으로 향했다.

    단 한 병뿐인 향수였지만, 섬에 있던 모든 나비가 향을 따라 훨훨 날아들었다.

    나비의 행렬은 그 후로도 며칠이나 이어졌고, 신비한 광경에 서원의 다른 이들은 감탄을 쏟았었다.

    * * *

    ‘맞아, 바로 이 향이야.’

    루안은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음을 확신했다.

    유독 오감(五感)이 예민한 그에게 그녀는 특별히 향수에서 나는 다른 향을 구분해줄 수 있냐며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래서 이 향수의 배합과 제조법을 아는 이는 세상에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궁에 있었다.

    ‘제삼자는 절대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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