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40)화 (40/385)
  • 40화. 참으로 공교롭습니다

    “어?”

    이미 흰 초에 불이 밝혀진 것을 본 루안의 시종, 한등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 이미 누가 다녀간 모양인데요!”

    미간을 좁힌 루안이 다른 쪽에 있는 출구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사라지는 것이 여인인 듯했는데, 자신들이 오기 전에 떠난 것 같았다.

    조방궁은 여자들밖에 없어 대장공주를 곁에서 시중드는 이들도 모두 여인들뿐이었으니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혼자 선대 태자 전하의 제를 드리러 왔다고? 그건 좀 이상하군…….’

    “네 일이나 해라.”

    “네.”

    덤덤한 루안의 말에 대답한 한등이, 향촉을 꺼내 제를 지내기 위한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불을 붙인 향을 받은 루안이 선대 태자의 위패를 향해 공손하게 몸을 굽혔을 때, 밖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 형이 아니시오? 선대 태자 전하께 일찍 제를 드리러 오셨군.”

    대답도 하지 않은 루안은 끝까지 제를 마친 후에야 몸을 돌렸다.

    “대공자도 일찍 왔군.”

    찾아온 것은 유씨 가문의 대공자, 유신지였다.

    “그래도 루 형보다 늦었소.”

    그리 대답한 유신지는 선대 태자의 위패로 시선을 돌리며 제 시종에게 향촉을 달라 눈짓했다.

    진지한 모습으로 향을 들어 올렸던 그가 향로에 향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유신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난 참 루 형이 부럽소. 당시 나도 무애해각에 수학하러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께서 너무 저어하시는 바람에 결국 가지 못했소. 그렇지 않았다면 나 역시 루 형과 동창이 되지 않았겠소?”

    루안이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공자는 타고난 재능이 워낙 뛰어나 무애해각에 가지 않고도 갑과(*甲科: 과거 대과 시험에서 1등, 2등 3등을 한 이들의 등급. 갑, 을, 병으로 등급을 나눔)에 들지 않았소?”

    유신지가 다시 웃었다.

    “그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소? 과거에 급제한 이들 중 앞선 열 사람은 실제 학문의 수준보다 다른 것들을 더 많이 고려한다는 것은 모두 알지 않소? 내가 탐화(*探花: 석차 3등)를 하고 루 형은 급제만 했다지만, 그것이 꼭 루 형의 시권(試卷)이 나만 못하단 의미는 아니지. 그저 루 형의 넷째 공자라는 신분이 방해되었을 뿐일 거요.”

    짧은 대꾸에 일장연설이 흘러오자 루안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언제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대공자께서 생각이 많으셨나 보군.”

    “아, 그렇소?”

    쥘부채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린 유신지가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게 됐소. 사건 문서를 오래 파다 보니 자꾸 생각만 많아지는구먼. 꼭 무슨 단서를 놓칠 것 같아서 말이지. 아, 그러고 보니 루 형도 매일 사건만 쳐다보고 있지 않소? 해결한 사건도 적지 않은데 좋은 경험 좀 없소? 같이 법(法) 밥 먹는 처지에 서로 교류하고 지내면서 능력도 키우면 좋을 텐데.”

    ‘무슨 말이 이렇게 많지?’

    속으로 짜증을 내던 루안이 대답했다.

    “오늘은 청명절이니 제를 지내는 것이 중요할 것 같군. 다음에 하기로 하지.”

    그리고 루안이 제 시종에게 물건들을 정리하여 다음 제사 장소에 갈 준비를 하라고 전했다.

    그런데 루안의 예상을 뒤집고 유신지가 또다시 루안에게 따라붙었다.

    “또 누구에게 제를 드리러 갈 생각이오? 루 형의 스승인 옥형 선생께 갈 생각이라면 나도 함께 가지! 나도 옥형 선생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모르오! 당시 얼굴 한 번 뵙지 못해 얼마나 아쉬웠는지! 그대로 영영 뵙지 못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

    루안은 더는 그를 상대하는 것도 귀찮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유씨 가문의 대공자는 매번 자신을 볼 때마다 오래 알고 지낸 지우처럼 친한 척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이자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군.’

    * * *

    지온은 상자를 열어 며칠 내내 필사한 종이를 태우며 말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이건 제가 요즘 연습한 것들이에요. 막 깨어나고선 상처를 치료해야 해서 보름이나 붓을 들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후엔 매일 서책을 보고 글 연습을 했어요. 한 번도 게으름피우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이 몸이 글을 많이 썼던 몸이 아니라 전 같지는 않아요. 그래도 그냥 보세요.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으면 제 꿈에 오셔서 욕이라도 해주세요.”

    잠시 말을 멈추었던 지온이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찾아오지 마세요.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활달한 분이신데, 괜히 오셨다가 고혼야귀로 세상에 떠돌면 안 되잖아요.”

    그녀가 다시 필사한 종이를 한 장 꺼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오류선생(*五柳先生: 중국의 시인 도연명을 말함)의 시에요.”

    그리곤 지온이 읊조렸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기 마련이니,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도 운명이 아니겠는가. 간밤엔 함께 살았으나, 아침엔 함께 저승에 있구나…… 가족은 혹 슬픔이 남았으려나, 타인은 이미 잊고 즐거이 노래를 부르겠네. 죽어 가는 길에 무슨 말을 하랴, 그저 몸을 뉘어 산이 되는 것이리.”

    (*도연명: 만가시挽歌詩/의만가사擬挽歌詞 3수 중, 도연명이 죽음을 예감하고 쓴 시)

    불꽃이 검은 먹줄이 가득한 종이를 집어삼키는 것을 보며 지온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보세요, 할아버지. 저 아직 이렇게 잘 살아있으니 이제 안심하고 떠나세요.”

    * * *

    건물 밖에 있던 루안이 문득 걸음이 멈췄다.

    ‘누가 시를 읊는 것 같았는데…….’

    루안은 아까 전 들은 시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가족은 혹 슬픔이 남았으려나, 타인은 이미 잊고 즐거이 노래를 부르겠네. 죽어 가는 길에 무슨 말을 하랴, 그저 몸을 뉘어 산이 되는 것이리.’

    도연명의 「만가」는 옥형 선생께서 가장 좋아하던 시가 아니던가?

    “왜 갑자기 멈춘 것이오?”

    불쑥 들어온 목소리에 루안은 순간, 그를 흠씬 두들겨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제발 방해 좀 그만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 루 형! 나도 같이 가시오!”

    루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유신지가 그를 따라 제당으로 들어갔다.

    조방궁의 공식적인 제(祭)가 아직 열리기 전이라 이곳 제당엔 한 사람만이 있었다.

    서 있는 여인의 신형을 본 루안의 심장이 덜컹 흔들렸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지?”

    지온이 아주 적당하게 놀란 표정과 함께 웃음을 지었다.

    “루 대인님? 대인께서도 제를 드리러 오신 것입니까? 참으로 공교롭습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루안의 시선이 옥형 선생의 위패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향촉으로 옮겨갔다가 미처 다 타지 못한 종이에 붙들렸다. 그러나 루안의 시선은 다시 지온에게로 돌아왔다.

    눈을 끔벅이며 루안과 그녀를 번갈아 보던 유신지는, 루안이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자 먼저 입을 열었다.

    “유신지라고 합니다. 낭자께선 이름이 어찌 됩니까?”

    그 이름을 들은 지온의 눈썹이 가볍게 위로 솟았다. 눈가에 놀란 기색이 스친 지온은 웃으며 물었다.

    “혹시 태사부의 대공자님이신지요?”

    유신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낭자께서도 제 이름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셨던 것입니까? 영광입니다.”

    “듣지 못했을 리가 없지요! 탐화랑의 웃음 한 번에, 흔들리는 여인들의 붉은 소매가 건물을 덮는다는 얘기는 도성에 모르는 이들이 없는 것을요.”

    예로부터 탐화는 영준하면서도 능력 있는 소년에게 주어졌고, 그것은 유신지가 과거를 치렀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탐화 인선에 오른 이들 중 하나는 유신지였고 다른 하나는 루안이었다. 능력만 보자면 상위 열 명 모두 비등비등 훌륭했지만, 시험관들은 모두 유신지를 선택했다.

    어찌 되었건, 루안의 넷째 공자라는 신분이 무척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황제가 특별히 은혜를 베풀지 않았더라면, 가문에서 쫓겨난 그는 과거조차 볼 수 없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탐화가 되어 갑과(*甲科: 과거 대과 시험에서 1등, 2등 3등을 한 이들의 등급. 갑, 을, 병으로 등급을 나눔)에 오른다면 사람들이 무어라 떠들어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 역시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유신지를 탐화로 선정했고 루안을 을과(*乙科: 과거 대과 시험에서 4등부터 10등까지 한 이들의 등급)로 급제시키고자 했다. 시험관들은 그 정도로 만족하여 황제의 체면을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유신지는 본래 잘 웃는 사람이었는데, 급제자들의 시가행진인 유가(游街) 때 이로 인해 소동이 있었다.

    그가 말을 타고 한 건물 앞을 지날 때, 잘생기고 훤칠한 모습의 그를 본 여인 하나가 자신의 손수건을 던졌다. 제 몸으로 떨어진 손수건을 주워든 유신지가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짓자, 그 모습을 본 여인들이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다들 그를 향해 소매가 떨어져 나가도록 손을 흔들었던 것이다.

    군자의 점잖은 행동은 아니었지만, 젊은 날에 어느 정도 풍류를 즐기는 것이 그리 흉잡힐 만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 일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도성 전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었다.

    “낭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유신지가 재차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그럼 낭자의 성함이……?”

    지온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모르시는 것이 나으실 것입니다, 대공자님.”

    어찌 되었건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인 자신은 둘째 공자와 혼약이 있던 이가 아니던가. 제수씨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 그로선 다소 어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리 나올수록 유신지의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모르는 것이 나을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함자를 알리기 곤란하시다면, 성이라도 말씀해주시지요.”

    그저 미소만 짓던 지온이 두 사람을 향해 작별인사를 고했다.

    “제당에서 사담을 나누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그만 두 분의 제를 방해하지 않고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곤 대바구니를 챙겨 그대로 밖으로 떠나버린 지온이었다.

    궁금함에 뱃속이 다 근지러워진 유신지는 루안에게 캐물을 수밖에 없었다.

    “루 형, 저 낭자 누군지 아시오? 대체 어느 집안의 소저요? 왜 날 보고 모르는 게 낫다는 건지, 참!”

    동솥을 향해 걸어간 루안이 태우던 종이를 뒤적이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모르는 것이 낫지. 그녀가 바로 그대의 동생과 연이 닿지 않았던 그 혼약자니까.”

    유신지의 반듯한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제 시종에게 물었다.

    “둘째의 그…… 혼약이 있던 여인이 누구였었지?”

    시종이 작게 대답했다.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이십니다.”

    “그 소저였구나!”

    제 이마를 철썩하고 때리는 유신지였다.

    그도 당연히 지씨 가문을 알고 있었다. 노노야가 있을 적엔 그래도 가세가 상당했던 집안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혼약을 맺을 일이 없지 않았겠는가.

    다만 지씨 집안의 운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능력 있고 뛰어났던 대노야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후로 집안이 기울어 버린 것이다.

    “보기엔 괜찮아 보이는데, 어머니께선 어찌 말씀을 그리…….”

    괜찮다 뿐이던가? 그 용모며 자태며, 그녀보다 더 뛰어난 규수를 떠올리려 애써도 당장 떠오르지 않을 정도인 것을!

    나눈 대화라곤 몇 마디가 다였지만 적어도 선을 지키는 여인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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