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9)화 (39/385)

39화. 제사

그렇게 차남가가 계속해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삼남가가 도착했다.

다른 지객이 다가가 신분을 묻고는 삼남가 사람들을 데리고 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가 밝았던 지서가 그들이 하는 소릴 듣고 입을 열었다.

“숙부댁 식구들은 저희보다 늦게 왔는데 왜 내원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 말에 지객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곤 삼남가를 인솔하는 지객이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이분들은 어제 먼저 예약을 하셨습니다.”

그 말에 위씨 부인이 벌컥 화를 냈다.

“예약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예약이 됐단 말입니까?”

위씨 부인의 역정에도 지객은 여전히 웃은 얼굴로 설명했다.

“부인께서 말씀하신 예약은 조방궁에서 하는 예약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여기 이분들의 경우는 윗전에서 명이 내려온 것입니다.”

위씨 부인은 순간 멍해졌다.

‘위에서 내려온 명이라니? 조방궁 진인의 명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더 강짜를 놔봐야 의미가 없었다. 조방궁에 대장공주께서 계시기 때문에 평소 진인들은 평범한 관원들 정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삼남가를 인솔하던 지객은 위씨 부인이 더 말이 없자, 그대로 삼남가 사람들을 데리고 내원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에 장씨 부인이 방글방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저희 가문에 조방궁 사람이 있단 것을 어찌 잊으신 겝니까? 지온이가 그래도 능운진인의 제자인데, 자리 한 곳 마련해두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요?”

* * *

지온이 대장공주를 직접 알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으니 자리 하나 마련하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대로 내원으로 들어간 삼남가 사람들은 금방 지온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막내 숙부님, 숙모님, 둘째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지온아.”

“큰언니를 뵈어요.”

서로 인사가 끝나자 지온은 그들을 이끌고 한쪽에 자리한 제당으로 들어갔다.

제당 위쪽에 모셔진 위패를 본 지익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형님과 큰형수의 위패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지익이 눈물을 쓱쓱 닦고는 입을 열었다.

“다들 조부님과 백부께 절을 하거라.”

그들이 향까지 모두 올리면 청옥과 함옥이 삼남가 사람들을 회당으로 데려가 줄 터였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장씨 부인이 지온에게 말을 걸었다.

“큰형님께서 전하라 하신 것들이 있으니 조금 있다 가져다주마. 조방궁에서 지내는 것은 어떠하냐? 시녀들은 모두 정성으로 챙겨주고? 필요하면 사람을 더 보내줄까?”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생활하는 데 세 명이면 충분하고 혹시 막내 숙모님께 여유가 있으시거든 밖으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두어 명 보내주세요.”

이는 종으로 부릴 사내가 필요하단 뜻이었다. 여자뿐인 조방궁에서 남자가 지낼 수는 없으니, 조방궁 밖에서 지내며 전령으로 쓸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에 장씨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 네 숙부에게 두 사람을 보내주라 이르마.”

그리곤 목소리를 낮춘 장씨 부인이 조용히 말을 전했다.

“그런데 네 큰숙부 네도 왔단다. 내원으로 들어 명문가들과 인사라도 나누고 지서의 혼처를 알아볼 생각인 것 같더구나! 그런데 평판이 나빠진 탓인지, 외원으로 배정이 되었다. 네게 와서 말썽을 부릴지 모르니 조심하거라.”

지온이 알았다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숙모님. 큰숙부님 얼굴이 그렇게 두껍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러길 바라야지. 지온이 네가 아주 제때 조방궁으로 잘 들어갔어. 집안이 아주 난리가 났었다. 작은 형님 댁에서 어찌나 가산을 내놓길 싫어하던지, 일을 얼마나 만들었는지 몰라. 차라리 조방궁에 있는 것이 조용하고 좋지…….”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목송(目送)한 지온이 가만히 생각했다.

‘조방궁에 있는 것도 그렇게 조용하진 않네요, 숙모님.’

위씨 부인이야 욕심에 돈을 가지고 놀았다지만, 조방궁의 그 사람은 사람 목숨을 두고 놀지 않던가?

* * *

청옥과 함옥이 돌아오자 지온은 그들과 함께 능운진인에게 제를 올리러 갔다.

이번 난리를 겪은 청옥과 함옥은, 능운진인의 위패 앞에서 전에 없이 진심 가득한 눈물을 흘렸다.

과거 제 스승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위험한 순간에 그래도 자신들을 구해준 것은 스승님께서 데려가셨던 그들의 사저뿐이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조방궁에서 진짜 가족은 스승님과 제자 셋뿐이었다.

지온이 입을 열었다.

“사매, 두 분은 이제 상심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우리가 잘 지내면 구천에 계신 스승님께서도 마음을 놓으실 거예요.”

“네, 사저.”

눈물을 닦은 청옥이 다짐하듯 말했다.

“우린 앞으로 진짜 잘 지낼 거예요!”

‘다른 이들이 우리를 괴롭힐수록, 더 잘 지낼 거야!’

제를 끝낸 청옥이 다짐하며 말했다.

“오늘은 사람들이 많아서 저와 함옥은 손님 접대를 도와야 하는데, 혹시 더 필요한 일이 있으세요?”

지온은 고개를 저었다.

“서아랑 다른 시녀들이 있으니 가서 일 봐요. 두 사람도 가서 너무 착하게 굴지 말고, 누가 시비 걸면 나에게 이야기하라고 하세요.”

그 말에 청옥의 눈시울이 다시 촉촉하게 번졌다. 지온의 목소리가 그녀의 뇌리에 메아리쳤다.

‘나에게 이야기하라고 하세요.’

드디어 두 사람도 자신들을 챙겨 줄 뒷배가 생긴 것이다. 

청옥과 함옥이 떠나자 지온이 시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가서 놀아.”

저들끼리 눈을 마주친 시녀 중 서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가씨 옆을 어떻게 비워두겠어요? 하로와 의운만 보내고 저는 아가씨 옆에 남아있을게요.”

“혼자 걷고 싶어서 그래.”

“그래도…….”

지온이 손을 내밀었다.

“물건은 내게 주고, 너희들은 가봐.”

끝내 아가씨를 붙잡지 못한 서아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대바구니를 지온에게 건네며 말했다.

“저는 계속 소원에 있겠습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시면 크게 고함을 치세요. 저희가 꼭 들을 테니까, 꼭 그렇게 하셔야 해요!”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 * *

이윽고 지온을 배웅한 의운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아가씨가 제사용품을 챙겨가셨지? 또 제를 올려야 할 분이 있으신 건가?”

“몰라.”

서아가 대충 대답했다.

“진짜 이상하네. 돌아가신 어르신과 대노야의 제도 지냈고, 능운진인의 제사까지 모두 드렸는데, 아가씨께서 또 제를 올리실 분이 누가 있으시지?”

하로가 입을 열었다.

“영령당에 수많은 명사가 있다는 거 잊었어? 매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찾는데. 아가씨도 그중에 존경하는 분이 몇 분 계신가 보지. 아마 향이라도 올리시려는 거 아니겠어?”

“그런 거겠지……?”

* * *

대바구니를 든 지온이 영령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영령당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중앙에 모셔진 선대 태자의 위패 앞엔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검은 바탕에 금으로 글자가 새겨진 위패를 바라보며 그녀는 한숨을 폭, 쉬었다. 향촉을 하나 꺼내 불을 붙인 그녀가 천천히 노란색 종이를 태우기 시작했다.

“태자 전하, 제가 태자 전하께 향을 올리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지온의 입술 사이로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찌 되었건 그래도 저희가 혼례를 올리고 부부의 연까지 맺을 뻔했던 사이가 아닌지요. 여기 지전(紙錢)이라도 태워 보내니, 전하, 가져가세요.”

‘지전(紙錢)’이란 소리에 문득 누군가를 떠올린 그녀가 웃음을 지었다.

“우습지 않으십니까, 전하. 삼 년 전엔,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 저희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전하께서 한 자루 위패가 되실 줄 누가 알았겠으며, 눈떠보니 제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이리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속세의 티끌 하나 마음에 두지 않던 이가, 이제 보이는 건 돈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 살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말을 멈추었던 지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人傑)은 참으로 간 곳 없습니다. (*物是人非: 물시인비, 세상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그렇지 않다.)

지전을 태우며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지온의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과거의 자신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었었지만, 천하에 이름난 옥형 선생을 조부로 두었었다.

선제는 자신의 선생이었던 옥형 선생을 존경했다. 그래서 태자를 무애해각에 보내 그의 가르침을 받게 하였고 옥(玉)씨 가문과 사돈까지 맺고자 했었다. 그리고 옥씨 가문의 규수였던 자신, 옥종화(玉緟華)를 태자비로 맞이하려 했다. 

당시 무애해각에서 수학하던 이들은, 훈귀가의 후예들부터 한미한 집안의 자제들까지 많았는데, 그중 절반 정도는 옥씨 가문의 큰아가씨인 옥종화를 좋아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었다.

서원이란 것이 본래 금녀의 절간처럼, 일을 돕는 나이든 아주머니를 제외하면 날아드는 파리조차 수컷뿐인 곳이 아니던가? 그런 곳에서 매일같이 거무튀튀하게 수염 난 사내놈들과 뒹굴뒹굴하다 보면, 꼬부라진 할미꽃도 양귀비로 보일 지경이 되고 만다.

그런 환경에 묘령의 소녀가 있었으니 누군들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더구나 옥종화는 가진 재능도 뛰어난 것도 모자라 미인들이 버글거리는 곳에 던져놔도 손색없는 천하일절의 미녀이기까지 했다.

재능에 빠진 이는 옥종화의 재능에 빠져들었고, 아름다움에 홀린 이는 그 아름다움에 정신을 놓았다.

만약 옥형 선생의 높은 명성이 사내들의 기를 제대로 누르지 못했다면, 여색에 미쳐서 돌은 사내들이 옥종화 소저에게 얼마나 달려들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태자도 당연히 옥종화를 좋아했었다.

지온, 과거의 옥종화는 성정이 온화했던 소년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는 소년의 눈엔 늘 반듯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두 사람은 그것이 무공에 관한 것이든, 무엇이든 대화도 서로 아주 잘 통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황제가 사람을 보내어 혼사를 거론했을 때 그녀도 별다른 반감을 품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래도 내가 태자비가 될 가능성은 크지 않았겠지만…….’

그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제를 올리기 위해 다른 이들이 찾아온 것 같았다.

* * *

지온은 물건들을 챙겨 먼저 자리를 떠났다.

회랑을 따라 걸으며 제당들을 하나씩 지나치던 지온은 익숙한 이름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멈춰선 제당은 이름난 문사를 모신 곳이었다.

지온이 문사들을 모시는 제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위패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낙관조차 보이지 않았다.

‘무애해각이 불타 사라졌으니, 할아버지의 시신 역시 한 줌의 재가 되셨겠지.’

시신도 살았을 적의 집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이름만 쓸쓸하게 남아 다른 이들이 올리는 위령제만을 기다리는 고인들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동솥(銅솥)에는 이미 종이가 타고 남은 재가 보였다.

그것만 보아도 지난 삼 년간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할아버지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 자신보다 더욱 슬퍼했을지도 모른다. 이리 대단한 유학(儒學)의 대가가 세상을 떠난 것에 진심 어린 탄식을 흘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그런 것에 연연하셨던가?’

중년에는 아내를 잃고, 노년에는 자식을 잃은 할아버지께선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질 즈음에는 명성과 이익들을 모두 등지고 상해(桑海)로 돌아가 그저 아이들을 가르치실 생각이셨다.

그저 할아버지께서는 무탈하게 키워낸 손녀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을 보고 싶어 하셨을 뿐이셨는데…….

하지만 자신은 무탈하지 못했다.

‘죽었으니까! 할아버지처럼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살해됐으니까!’

천하 만방에 명성을 떨쳤던 노인은 결국 마지막까지 편안하게 가지 못한 것이다.

오랜 시간 참아왔던 지온의 눈물이 그제야 흘러내렸다.

조용히 무릎을 꿇은 지온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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