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8)화 (38/385)

38화. 청명절 (2)

고찬이 일단 절에 가서 참배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루안이 고개를 들었다.

하얗지만 이상할 정도로 붉은빛이 도는 그의 얼굴은 마치 술기운이 오른 사람의 것 같았다. 루안의 눈빛마저 평소보다 흐릿하게 느껴졌다.

“난, 그래도 날 더 믿는다.”

스스로 말하고도 루안은 우스웠다.

사건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증거 따윈 하나도 없이 오직 자신의 직감만을 믿는 것이다.

“대인…….”

고찬은 위로를 건네야 할 순간이라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그는 자신의 직속 상사이자 북양에 있을 때부터 모시던 이가 아닌가?

어떻게든 생각을 짜내어 그를 위로할 말을 떠올리려던 고찬이 간신히 두어 마디를 생각해냈다.

“사실…….”

“그만 됐으니, 이만 가봐.”

다시 시선을 내린 루안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눈은 이미 맑아진 상태였고, 음성 역시 무척이나 차가웠다.

“…….”

뱃속부터 솟구치는 말을 하고픈 욕망이 고찬의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삼켜지지도, 그렇다고 꺼낼 수도 없는 말을 고찬은 속으로 되뇌었다.

‘지금이라도 북양으로 돌아갈까? 세자께서 용서해주시려나?’

고찬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나비에 대한 백성들의 갈망을 하늘도 이루고 싶었던 것인지, 이번 청명절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청명절엔 비가 온다는 속설이 있음)

이른 아침부터 시녀들이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겼다.

지온이 직접 필사하고 세심하게 접은 종이들은 조심스레 함의 가장 아랫부분으로 들어갔다.

청옥과 함옥도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각자 하나씩 대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도 역시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이 담겨 있었다.

“돌아가시고 처음 맞이하는 청명은 본래 더 제대로 치르는 게 맞긴 해요.”

청옥이 말했다.

“하지만 저희 상황이 많은 이들을 부를 수가 없는 상황이니, 스승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께서 사매들의 마음을 아시면 분명 흐뭇해하실 거예요.”

의운이 일산(*日傘: 해를 가리기 위한 큰 양산)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가씨, 이제 가셔도 돼요.”

지온이 대답하고는 일산(日傘)을 받쳐 든 의운을 보았다.

“어깨 수련을 하길 잘했네. 역시 네가 무공에 가장 잘 맞아.”

금방 울상을 한 의운이 소리쳤다.

“아가씨!”

‘매일 활쏘기는 너무 어렵다고요!’

그 모습에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준비 다 끝났으면 이만 가자!”

* * *

어두운 얼굴의 화옥이 정실 밖으로 나왔다.

“대사매!”

줄줄이 달려온 능양진인의 제자들이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며칠 구금된 사이, 다소 초췌해진 화옥의 얼굴은 차가웠다.

“스승님은?”

“난택산방에 가셨어요.”

화옥의 물음에 그녀와 가까운 사저가 쪼르르 다가오더니 말했다.

“요 며칠 대장공주께서 잠을 잘 못 주무셨어요.”

화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옥과 함옥을 죽이는 것이 실패했으니 그 죄를 뒤집어쓸 다른 이를 찾아야 했다.

먼젓번에 지온이 나비를 불러들여 사건을 워낙 크게 만든 터라, 대장공주 쪽에서도 분명 의심을 하고 있을 터였다.

‘대장공주님을 달래려 스승님께서도 애를 쓰시는 거겠지.’

화옥이 입꼬리를 올려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오늘이 청명절이니 오송원에 소홀함이 있어선 안 돼. 준비는 제대로 했겠지?”

* * *

중춘(*仲春: 음력 2월)과 만춘(*晩春: 음력 3월)이 교차하는 시기의 청명절은 선조에게 제를 지내는 날이자 답청(*踏靑: 청명절에 교외를 거닐며 자연을 즐기는 중국풍속 중 하나)의 날이었다.

평소 집안 깊이 숨어 지내던 규방의 소저들도 이날만은 거리낌 없이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다닐 수 있는 날이었기에, 한 달이 넘도록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지던 지(池)씨 가문에도 드디어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종들과 행장을 준비하던 위씨 부인이 밖을 향해 외쳤다.

“지서야, 입을 옷은 정했느냐? 그 옷은 너무 밝아 안 되겠구나!”

위씨 부인의 말에 지서가 싫은 내색을 보였다.

“어머니, 전엔 검소해 보여야 한다고 좋은 옷도 못 입게 하셨잖아요. 이제 분가까지 한 마당에 왜 또 옷을 바꿔 입으라고 하세요? 이 옷, 이제 막 지어다 입은 옷이에요. 제가 금수방에서 얼마나 오래 고르고 고른 옷인데! 요즘 얼마나 유행하는 옷인지 아세요?”

위씨 부인이 그런 지서를 좋은 말로 타일렀다.

“오늘은 청명절이지 않느냐. 제사를 지내러 가는데 그렇게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은 좋지 않아. 담청색 옷이 있었지? 그 옷도 예쁘니, 그것으로 갈아입고 오너라. 착하지?”

“그 옷은 너무 심심하다고요!”

“그럼 붉은 빛의 자색 옷은 어떠냐? 그래, 그게 좋겠구나.”

위씨 부인이 다시금 타일렀다.

“어린 규수는 그런 색이 가장 맵시 있어 뵈는 것이야.”

“싫어요!”

지서가 화를 냈다.

“지난번에 그 자색 옷을 입었다가, 다른 애들이 제 피부가 어둡다고 흑련화(黑蓮花)라면서 비웃었다고요!”

그리곤 제 성질을 못 이겨 화가 북받친 지서는 곧 울음을 터트리려 했다.

다소 어두운 피부 빛을 가진 지서는 밝으면서 연한 빛깔의 옷들이 잘 받지를 않았다. 그러나 아직 어린 소녀인 그녀도 다른 친우들처럼 밝은 빛의 반짝거리는 옷을 입고 싶었던 것이다.

“누가 그런 이상한 소릴 해, 검은 연꽃이라니? 네가 어딜 봐서! 그저 다른 애들처럼 허여멀건, 아파보이지 않는 것뿐이지, 어른들은 너처럼 건강하고 활발한 아이들을 좋아하는 법이야. 자색 옷이 싫으면 그 옷 말고, 담청색 옷으로 입자. 그거면 되지 않느냐?”

지서도 더는 어미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 * *

한편, 장씨 부인 역시 행장을 꾸리고 있었다.

자고로 부인과 소저들이란 단 하루를 나서더라도, 필요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챙겨야 하는 법이다.

그래도 버릇이 없는 지서에 비하면 셋째 소저인 지언은 착하고 말을 잘 듣는 소녀였다.

아침 일찌감치 일어난 지언은 옷을 입고 제 물건을 챙기고 여동생인 지선까지 마저 챙겼다.

차남가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은 시녀가 농을 하듯 장씨 부인에게 말을 전하자 그 이야기를 들은 장씨 부인이 콧방귀와 함께 비웃음을 흘렸다.

“흥! 둘째 아주버님 본인이 제를 지내도 똑같다며 아버님의 위패까지 다 치울 땐 언제고, 오송원은 왜 갑자기 가려는 것이겠느냐? 이번 기회에 지서와 혼인할 집안을 물색하려는 게 아니고 뭐겠어?”

장씨 부인의 심복 시녀가 장씨 부인을 따라 비웃었다.

“그렇겠죠, 부인. 그래도 유씨 가문과의 혼사를 물린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너무 급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혼사를 무른지 길게 잡아봐야, 겨우 한 달 조금 지났을 뿐이었다.

혼약이 파기되고 다시 가산을 나누어 분가를 한 일로 가문이 얼마나 요란했던가! 차분히 뒷말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지는 못할망정, 벌써 이리 급하게 지서의 혼처를 찾겠다고 나선들 어디 좋은 혼사가 들어오겠느냐는 말이다.

“하긴, 지서가 벌써 열다섯이니 마음이 급하기도 하겠지.”

그리곤 다시 조롱하듯 말을 뱉는 장씨 부인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하다고 뜨거운 것을 다짜고짜 집어삼켜야겠는가?”

‘지온이를 보고 배울 생각을 해야지!’

지온이가 얼마나 똑똑한지, 유씨 가문이 좋은 말을 퍼트려줄 때 당장 짐을 싸서 조방궁으로 수행하러 가지 않았는가?

유씨 가문에서 지온이 효녀라는 이야기를 퍼트려주기도 해서, 지온은 지씨 가문의 떠들썩한 추문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이대로 한 일 년 지나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평판을 챙기고 거기에 유씨 가문의 도움까지 받으면, 혼처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때가 돼도 열일곱 살이니,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지!’

장씨 부인도 자신이 지온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남편이 셋째 아들인 것을 어쩌겠는가? 관직이 높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수입이 있는 것도 아닌 남편은, 막내아들이라 받은 유산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 자식들을 생각하면 이용당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지온이가 참 대범하지. 그리 많은 재산을 이리 쉽게 양보하고 말이야. 몇 년, 제대로 관리하면 우리가 차남가보다 못하겠어?’

더구나 제 자식들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 혼처 역시 한두 해 정도는 더 기다렸다 알아볼 수도 있었다.

‘이용? 견딜 수 있고말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장씨 부인이 시녀에게 말했다.

“우리가 혹시 챙겨야 할 물건은 없는지, 희화원 큰형님께 가서 여쭙고 오너라.”

“네, 부인.”

* * *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하자, 가문마다 문을 나선 마차들이 조방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리 나선 누구도 황궁이 들썩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궁녀와 내시들이 잔뜩 긴장한 채 황제의 행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 * *

지씨 가문의 차남가와 삼남가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방궁으로 향했다.

분가하고 서로 얼굴조차 보지 않는 사이가 되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밖에서까지 안면몰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제 여식과 마차에서 내린 장씨 부인이 웃는 얼굴로 위씨 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둘째 형님, 오늘 얼굴이 참 좋으십니다. 꼭 선단(*仙丹: 신선이 만든다는 장생불사의 영약)이라도 드신 것 같습니다. 몇 년이나 어려 보이시는 것이 정말 부럽습니다.”

그러나 위씨 부인은 장씨 부인만큼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녀로선 지씨 가문의 대부인인 자신에게 장씨 부인이 먼저 웃는 낯으로 찾아오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선녀들의 왕인 서왕모(西王母)가 함부로 설치고 다니는 요망한 요녀를 웃는 낯으로 대하면 제 신분만 격하시키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겉으로만 웃어 보인 위씨 부인이 입꼬리만 끌어 올린 채 지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만 올라가자꾸나. 늦으면 좋은 자리도 없을 것이야.”

장씨 부인 역시 위씨 부인의 태도에 개의치 않는 듯 빙긋 웃으며, 두 사람을 따라 산문(山門)으로 향했다.

요망한 요녀가 좋아할 일은 좁쌀 한 톨 만큼도 하고 싶지 않았던 위씨 부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오늘은 청명절이 아니던가! 명문 권세가 집안이 제를 올리기 위해 오송원에 얼마나 올지 알 수 없으니, 늦었다간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할 수도 있었다.

‘좋은 자리를 얻지 못하면, 안 그래도 마주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우리 지서를 어찌 보여줘!’

슬쩍 뒤를 돌아본 위씨 부인의 눈으로 급할 것 하나 없다는 듯 유유자적한 장씨 부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속으로 크게 비웃음을 흘렸다.

‘집안 관리를 안 해본 태가 아주 가관이구먼! 어디 구석에 처박힌 가게들을 물려받아 장사치들과 함께 몰려다니면 수준이 안 떨어지고 배기는지, 내 한 번 눈여겨볼 것이야!’

* * *

지씨 일가가 산문에 도착하자 지객(*知客: 손님을 맞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나와 이들을 맞았다.

지씨 가문의 총관이 신분을 밝히자 지객이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지형이셨군요? 지씨 가문의 도량(*道場: 중이나 도사가 법사를 행하는 곳)은 이미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 말에 총관이 얼른 물었다.

“선고님, 저희가 배정을 받은 곳이 어디인지요?”

지객이 위치를 전하자, 위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곳은 외원이 아닙니까? 저희가 이리 일찍 도착하였는데 왜 내원이 아니라 바깥 장소를 주는 것이죠?”

그러자 지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부인, 다른 분들께서 더 일찍 오셔서 저희도 이렇게 장소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원에 낼 자리가 정녕 한 자리도 없단 말입니까? 내원으로 누가 다 들어간 거죠?”

지객이 웃음을 지었다.

“자리를 낼 수 있었다면 드리지 않았을 리가 없지요. 그저 규정이 이러할 뿐입니다.”

내원으로 들지 못하면 명문권세가의 사람들과 함께 자리할 수 없을 것이 자명했기에 위씨 부인은 그대로 외원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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