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7)화 (37/385)
  • 37화. 청명절 (1)

    각루에서 이어지던 대화가 끊어져 고개를 돌린 어린 궁녀는, 옥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금벽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추아(墜兒)야, 가서 뭣 때문에 이리 시끄러운지 물어보고 와.”

    대답한 어린 궁녀가 얼른 그들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어린 궁녀가 알아 온 것을 전했다.

    “마마, 저들은 지금 나비를 보러 간다고 합니다. 무슨 연유인지 오송원에 많은 나비가 날아들어, 높은 곳에 오르면 보인다고 하여 지금 가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옥비가 멈칫했다.

    “나비……?”

    “마마?”

    금벽이 옥비를 살뜰히 살피며 무슨 일이냐는 듯 불렀다.

    그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옥비가 창가를 향해 걸어가더니 창문을 활짝 열었다.

    황성은 본래 다른 건축물보다 더욱 높게 짓는다. 이 각루는 그런 황성에서도 높은 위치에 지어진 건물이라 창을 열면 이곳에서 황성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옥비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오송원이 있는 방향에 역시나 오색찬란한 빛을 뿌리는 무언가가 부유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 나비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저게 나비가 만든 광경이에요?”

    금벽이 감탄했다.

    “무슨 술법인지, 아주 신묘합니다!”

    옥비의 눈으로 수많은 감정이 스쳤다.

    보이는 광경은 충격적이었고 아득했으나, 그리웠던 광경이었다. 슬픔이 담담하게 옥비의 가슴에 차올랐다.

    잠시 후, 옥비가 조용히 읊조렸다.

    “어려운 술법이 아니다. 나비는 꽃가루를 좋아하니 그들이 좋아하는 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불러들일 수 있지.”

    금벽의 눈에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그런 것도 아시다니, 마마께선 참으로 박학다식하십니다.”

    금벽의 칭찬을 들으며 옥비의 마음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녀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만들기까지는 매우 어려운 결심이 필요한 법이지. 가서 누가 만든 것인지 알아보고 오거라.”

    “예, 마마.” 

    대답한 금벽이 막 문을 나서려 할 때 밖에서 음성이 건너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 * *

    향수 한 병이 수많은 나비를 불러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지만, 지온에게 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청옥과 함옥을 다독여서 보내고 지온은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경의(經義)부터 시사(詩詞)에 이르기까지, 서책에 손이 닿는 어느 쪽이든 상관하지 않고 쓰고 있었다.

    그렇게 글을 쓰다 지치면 그제야 붓을 내려놓았다.

    서아가 필사한 종이들을 들추며 물었다.

    “아가씨, 오늘 이렇게 많이 쓰신 거예요?”

    “청명절이 곧 다가오잖아.”

    서아가 멈칫했다.

    “청명절이 왜요?”

    “제를 지내야 해.”

    그제야 생각한 듯 서아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가씨, 이거 부모님께 드리려고 쓰신 거죠? 아가씨의 서체가 얼마나 좋은지 보여드리려고요. 대노야, 대부인 모두 아가씨께서 이렇게 잘 크신 것을 보시면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지온은 그저 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요 며칠 열심히 모은 글들을 한 장 한 장 세심하게 접을 뿐이었다.

    날은 이미 까맣게 저물어, 곁채도 불이 꺼져있었다.

    서아가 말했다.

    “선고님들께서 기분이 아주 좋으세요. 저희와 식사도 같이 하시고 그릇 씻는 것도 도와주셨어요. 그리고는 방으로 돌아가셔서 경을 읽으시더니, 금방 불을 끄고 주무시는 것 같아요.”

    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옥과 함옥은 사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작은 관심이었으니까.

    ‘기왕에 사자매가 된 거, 힘든 것도 아니고 도와주지 뭐.’

    더구나 두 사람이 자신을 도와준다면 조방궁에서 하려는 일도 더욱 쉬워질 터였다.

    탁자에 오른 지온의 손가락이 톡톡, 소리를 내며 탁자를 쳤다.

    ‘청명절까지 화옥의 금족령이 떨어졌으니, 아직 며칠 시간이 있겠어.’

    * * *

    깊고 조용한 밤.

    정실(靜室) 벽에 기댄 화옥의 얼굴은 곧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남에게 이렇게 심하게 곤욕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능운진인이 여행을 떠난 후로, 화옥은 청옥과 함옥, 두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나중에 그들을 더 괴롭히지 않은 것도, 두 사람을 괴롭히는 일에 더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스스로 그만둔 것이었다.

    이번 일은 사실 두 사람을 이용하여, 지온, 그 계집에게 경고를 보낸 것이었다.

    ‘조방궁은 내 구역이야. 하찮은 규수 따위가 함부로 위세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알겠어?’

    그런데 그년이 청옥과 함옥을 더욱 끈끈한 사이로 만들어 버렸다.

    둘의 우애가 어찌나 깊던지, 먹은 것을 다 게워낼 뻔하지 않았던가!

    예전부터 화옥은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왕지사 더욱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한 청옥과 함옥을 그냥 죽여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자신의 계획은 확실했다.

    지온, 그 계집이 만약 제 사매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얼굴을 들이민다면, 입이 열 개, 아니,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단 것이 어떤 감정인지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었다.

    만약 그 계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청옥과 함옥의 죽음을 지온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천 번, 만 번을 생각하고 계획했는데 그년이 그딴 수작을 벌일 줄이야! 그깟 향수 한 병에! 그깟 환약 한 알에!’

    자신이 계획한 모든 것이 깨끗하게 엎어졌고, 이젠 오히려 자신이 갇혀버린 신세가 되었다.

    스승님은 당연히 자신에게 직접 죄를 시인하라 하지 않으실 터였다. 그러나 죄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다더라도 대장공주의 화를 삭일 수 있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했기에 자신이 장, 스무 대를 맞고 갇힌 것이다.

    차가운 정실에는 덮을 만한 담요 한 장 없었고, 간이 변기통에서 나는 악취가 그림자처럼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화옥이 이를 바득하고 갈았다.

    ‘내가 나가면, 너희들 모두 도망칠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다!’

    * * *

    오송원의 나비는 며칠이 지나도록 날아가지 않았다.

    신비로운 경치에 한바탕 파란이 일며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졌다.

    누군가는 조방궁에서 모시는 화신(*花神: 꽃의 신)이 현신하여 그렇게 많은 나비를 불러온 것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화신(花神)의 진전(眞傳)을 이어받은 진인(眞人) 중 하나가 술법을 대성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이들은 나비가 유독 오송원에만 나타나는 이유를, 바로 오송원에 신령한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였는데, 그 신령한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선대 태자와 옥형 선생에 이어, 이름난 신하나 명성이 높았던 장군들 모두 그 명단에 올랐다.

    그러나 조방궁은 다물린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꾹 닫은 채, 대외적으로 그와 관련한 어떠한 내용도 언급하지 않았고, 심지어 많은 이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오송원도 개방하지 않았다.

    조방궁이 그렇게 나올수록 사람들은 더욱 애가 탔다.

    ‘대체 어떤 신비로운 것이 있길래? 오송원에 가서 직접 보고 싶어!’

    “정말 신비롭지 않은가? 안남후가(安南侯家)에서 제사를 지내기 전에 먼저 들어가 선조의 위패를 정리해두고 싶다 했다던데, 그 역시 들여 보내주지 않았다고 하네!”

    “진짜 무슨 술법이라도 쓴 거 아니오?”

    “거,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오! 술법은 태조께서 금하신 것인데…….”

    일순 사람들의 입이 닫치며 조용해졌다.

    조방궁과 같은 황가의 궁관은 평소에도 그저 착실하게 향이나 태울 뿐, 요괴나 귀신과 같은 괴력난신에 관한 일들은 언급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성급하게 굴게 뭐가 있겠나? 청명절엔 오송원도 열지 않겠는가? 아니면 다들 어디 가서 제를 올리겠는가?”

    “그렇지, 청명절이 되면 정확하게 알 수 있겠구먼!”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나비가 몰려든 신비한 일을 떠올리며 청명절만 손꼽아 기다렸다.

    * * *

    고 대인이 방에서 나오자 마침 대바구니를 정리하는 루안의 시종이 보였다.

    “이것이 무엇이냐?”

    고 대인이 바구니에서 노란색 종이를 주워들며 묻자 그를 본 시종이 마침 잘 만났다는 듯 기뻐하며 물었다.

    “안 그래도 여쭙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마침 잘 오셨습니다, 고 선생님! 내일 제사에 함께 가십니까?”

    고 대인이 멈칫했다.

    “제사?”

    “네, 청명절이지 않습니까!”

    잠시 고민을 하던 고 대인이 되물었다.

    “자네가 가는가, 아니면 대인께서 가시는 것인가?”

    “당연히 저희 공자님께서 가시죠.”

    시종의 대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고 대인이 시종에게 캐묻듯 물었다.

    “오송원으로 가는가?”

    어리둥절한 시종이 고 대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당연히 오송원이지요, 저희 집안 친족 장지가 이 동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무시를 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튼 고 대인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대인께선 어디 계신가?”

    “서재에 계십니다.”

    그 말에 고 대인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

    * * *

    루안은 언제나처럼 서재에서 공문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선 늘 성실한 사람이었다.

    형부(刑部)에 들어온 후, 루안은 쉬는 날도 거의 없이 늘 사건 문서와 함께 지냈다. 지난 며칠, 매일 조방궁을 들락거릴 때조차 공무엔 언제나 소홀함이 없었다.

    “대인.”

    루안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이 시각은 자네가 밖에서 놀고 있을 시각인데…….”

    고 대인이 웃었다.

    “저인 줄 보지도 않고 어찌 아십니까? 역시 대단하십니다. 안 그래도 막 나가려던 차에, 한등(寒燈)이 제사 물품들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고 대인이 루안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대인, 내일 오송원에 가십니까?”

    “그렇네.”

    루안은 행선지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네도 함께 갈 생각인가?”

    루안의 질문에 고 대인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

    “대인께서 가시면 저도 당연히 같이 가야죠.”

    그리곤 망설임을 거듭하던 고 대인이 결국 뒷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대인, 왜 갑자기 오송원에서 제사를 지낼 생각을 하신 것입니까?”

    고 대인은 그가 가문에서 내쫓겼단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루씨 가문의 넷째 공자는 이미 과거의 신분일 뿐, 지금의 루안은 속한 곳이 없는 이였다.

    도성으로 도망 온 후로 루안이 제 과거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북양왕에 관한 것이든, 제 가문에 관한 것이든, 그는 한 번도 입 밖에 낸 일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제사는 말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대인이 누구의 제사를 지낸단 말인가?’

    고 대인은 꽤 시간이 흐르고서야 루안의 대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폐하께서 선생님의 위패를 오송원에 세우셨지만, 지난 삼 년 동안 난 감히 걸음조차 할 수가 없었네. 그곳에 가면 꼭 선생님께 크게 꾸중을 들을 것 같았어.”

    고 대인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옥형 선생의 제를 지내러 가시는 것입니까?”

    “선생님께서 날 꾸중하지 않으실까 모르겠어.”

    대답인 듯 아닌 듯한 루안의 말에 고 대인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당연히 그러지 않으실 것입니다. 대인도 어쩔 수 없으셨잖아요.”

    루안이 비웃음을 지었지만, 그 웃음이 다른 이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그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가 다시 공문을 살피기 시작하자 고 대인은 그만 자신이 나가봐야 하는 걸까,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때, 루안이 입을 열었다. 

    “고찬(高燦),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고 대인, 고찬이 흠칫 놀랐다.

    고찬이 미처 대답을 내기도 전, 루안이 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도 전에는 그런 것은 믿지 않았어. 죽은 자는 부활할 수 없다. 그러니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란 없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고찬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지금 대인께서 이미 죽었어야 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말을 하시는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최근 사건들은 모두 정상적이지 않았나?’

    고찬의 머릿속으로 온갖 요괴며 귀신, 따위의 괴력난신(怪力亂神)에 관한 것들이 밀려왔지만, 그는 스스로 그런 생각을 지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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