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6)화 (36/385)
  • 36화. 옥비마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루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오송원을 떠돌며 떠나지 않는 나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신지 역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옆에서 함께 나비를 구경했다.

    “정말 두 번 보기 어려운 기이한 광경이오. 이렇게 많은 나비가 한꺼번에 날아들다니, 루 형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글쎄.”

    루안이 차갑게 한 마디를 뱉었지만, 루안의 차가운 태도에도 짜증이 나지도 않는지 유신지는 제가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조방궁은 꽃의 신(神)인 여이(女夷)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소. 백화를 관장하고 초목을 기르는 신이니 나비 역시 아주 무관하다 볼 순 없겠지.

    루 형, 궁관에 있는 진인 중 하나가 신묘한 술법으로 나비를 불러 춤을 추게 한 것 같단 생각이 들지 않소?”

    루안은 여전히 그와 말을 섞을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유신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신선이나 요괴와 같은 이야기가 듣기엔 황당할 순 있지만, 세세하게 들어가 보면 또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요. 향을 따라 나비가 춤을 추며 날아들다니, 글로 쓰기에 아주 좋은 주제 같지 않소? 오송원의 무엇이 나비를 이끌어 이런 절경을 만드는 걸까……. 루 형은 어찌 보시오?”

    “대공자의 말이 맞겠지.”

    그리고 고개를 돌린 루안이 말했다.

    “가자.”

    놀란 유신지의 눈썹이 하늘로 휘청거렸다.

    “이렇게 그냥 간다고? 안 들어가 볼 것이오?”

    루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미 보지 않았소? 관아에 아직 할 일이 남아 대공자와 더 있지 못할 것 같소.”

    제 말만 마친 루안이 바로 계단을 내려가 그대로 돌아가자 유신지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루안, 저 녀석은 아직도 저러는구먼. 여전히 남 체면은 조금도 생각을 해주질 않아.”

    차가운 비웃음을 지은 유모지가 말했다.

    “큰형, 뭘 저런 인간이랑 말을 섞으려고 해? 루안, 저 인간은 실력은 있을지 몰라도 부정한 인간이니까 너무 엮이지 마, 형. 평판에 흠집이 생겨.”

    그런 유모지를 향해 유신지가 게슴츠레 웃었다.

    “듣자 하니, 네가 취태평에서 창피를 톡톡히 당했다지?”

    유모지가 억울한 듯 소리쳤다.

    “그거랑은 상관없어!”

    유신지가 껄껄 웃었다.

    “그래, 그래. 상관없다면, 상관없는 거겠지! 그리고 그런 걱정일랑은 할 필요도 없다. 내가 말을 섞고 싶어도 날 신경이나 써야 말이지.”

    ‘하긴, 그러네.’

    가만히 생각하던 유모지는 그것도 기분이 나빴다.

    “저 인간은 뭘 믿고 저렇게 교만을 떠는 건데? 똑같이 과거 보고 붙은 주제에! 큰형 석차가 저 작자보다 더 높지 않았어?”

    멀어지는 루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신지가 뼈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우리와 같은 길을 간다 생각하지 않는 거겠지!”

    * * *

    오송원의 나비들은 하루를 꼬박 머물렀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비를 감상하기 위해 친인척과 지인까지 부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그 소식은 황궁까지 전해졌다.

    * * *

    오늘도 영수궁(靈秀宮)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처음 당직을 선 어린 궁녀는 점심이 지나 몰린 춘곤증에 고개를 반쯤 비틀다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옆에 있던 다른 궁녀가 그녀를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 잠이 달아난 어린 궁녀가 얼른 말했다.

    “잘못했어요! 일부러,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피식 웃은 궁인이 말했다.

    “왜 그렇게 무서워해?”

    어린 궁녀가 떨며 대답했다.

    “훈련 고고가 궁은 규율이 삼엄해서 실수하면 안 된다고 하셔서…… 그랬다간 맞아 죽더라도 억울하다는 이야기도 못 한다고 하셨는데…….”

    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야. 그래도 넌 운이 좋아 영수궁으로 오게 됐으니까 그렇게 가슴 졸이지 않아도 괜찮아.”

    어린 궁녀가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네? 왜, 왜요……?”

    “왜냐고? 우리 마마께선 아주 좋은 분이시니까!”

    궁인이 방긋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린 궁녀는 자신이 영수궁으로 오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축하를 해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너 진짜 바보구나?”

    궁인이 어린 궁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지금 얼마나 편하게 지내는 건지도 모르지?”

    어린 궁녀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궁인에게 말했다.

    “헤헤, 언니, 좀 더 알려주시면 안 돼요?”

    그러자 주변을 살핀 궁인이 어린 궁녀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궁에 여러 마마님이 계신 건 알고 있지?”

    어린 궁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皇后)마마, 현비(賢妃)마마, 신비(宸妃)마마 그리고 저희가 모시는 마마님이신 옥비(玉妃)마마님이랑 나머지는…….” 

    “황후마마와 현비마마, 신비마마께서는 모두 폐하께서 태자 전하를 세우실 때 책봉된 분들이셔. 폐하께서 재위하신 뒤로 후궁 마마들까지 모두 순조롭게 세우셨지.

    그러나 마마님들의 집안 세력이 비슷하고, 세분 마마님들이 폐하와 동시에 혼인하셔서 평소 자주 암투가 벌어지는 통에, 궁들이 조용하질 않아…….”

    여기까지 말한 궁인이 다시 주변을 살폈다. 마마님들의 이야기라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영수궁이 가장 좋아. 옥비마마는 성정이 조용하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 낮은 품계의 미인이며, 인재들이 우리 궁으로 문안을 와도 마마는 받지도 다 만나지도 않으신다니까. 그러니까 너도 여기서 열심히 해. 여기가 가장 조용하고 안전하니까.”

    네, 하고 대답한 어린 궁녀가 주뼛대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언니, 마마께서 그렇게 하시면 혹시 마마께서 힘들어지시는 건 아니에요?”

    그 말에 웃음을 지은 궁인이 다시 어린 궁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충직하구나. 옥비마마 생각을 다 하고…….”

    그리곤 궁인이 괜찮다는 듯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폐하와 마마께선 동창으로 오랜 세월 다진 우의가 있어 감정이 깊으시거든. 힘들어지지 않으실 거야.”

    뭔가 이상하단 생각에 어린 궁녀가 물었다.

    “동창끼리 다진 우의면 함께 동문수학했다는 뜻이죠? 그런데 폐하와 마마께서 어떻게 동문수학을 하실 수 있어요? 잘못 이야기하신 거 아니에요?”

    “아니, 제대로 이야기 한 거 맞아.”

    그리곤 궁인이 어린 궁녀를 향해 꾸짖듯 말했다.

    “영수궁으로 오면서 우리 마마님께서 원래 어떤 신분이셨는지도 모르고 왔어?”

    어린 궁녀가 알려달라며 물었다.

    “마마께서 어느 세가의 규수셨어요?”

    “마마님의 성(姓)은 옥(玉). 명성이 자자하신 옥형 선생의 손녀로 우리 대순(大舜)의 최고 재녀라 불리는 분이야. 폐하께서 젊은 시절, 선대 태자 전하와 함께 무애해각에서 수학하실 적에 옥형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셨어. 그러니까 두 분은 동창의 우의를 쌓으신 게 맞지.”

    “아!”

    어린 궁녀는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옥형 선생이라면 들어 본 적 있어요! 그분은 선제의 스승이셨잖아요, 맞죠?!”

    “그래, 그래서 그분이 황제의 스승이라 불리시는 거야.”

    제 주인을 향한 어린 궁녀의 존경심이 가득 커졌다.

    “저희 마마님께서 엄청 대단하신 분이셨네요!”

    “당연하지. 마마께선 금기서화(*琴棋書畵: 악기와 바둑, 글씨와 그림)에 능하시고 성상의복(*星相醫卜: 점성, 관상, 의술, 점술)에도 일가견이 있으셔. 거기에 기마와 활쏘기에도 손색이 없으시지. 사내로 태어나셨다면 장원급제도 따 놓은 당상인데…….”

    이야기하던 궁인이 한숨을 쉬었다.

    “옥형 선생께서 돌아가셔 안타깝게 되셨지. 아니셨으면…… 선제께서 살아계실 때 우리 마마님을 선대 태자 전하와 맺어주려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럼 선대 태자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우리 마마님은 태자비가 되셨을 테고, 지금은…….’

    어린 궁녀 역시 내심 아쉽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전(殿)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와 궁인이 황급히 말을 멈추고 표정을 정돈했다.

    이윽고 안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여봐라.”

    여전히 멍하게 있던 어린 궁녀를 궁인이 잡아당기며 낮게 속삭였다.

    “마마께서 부르시잖아, 어서 들어가서 모셔야지!”

    “아! 네!”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 어린 궁녀가 궁인의 뒤를 따라 침전(寢殿)으로 들어갔다.

    이미 휘장이 걷힌 침상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어린 궁녀가 얼른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창가 앞에 선 화려하고 고귀한 자태의 여인을 발견했다.

    평범한 키에 가느다란 어깨선과 잡힐 듯 얇은 허리를 가진 그녀는 목이 유난히 길었다.

    조용히 창가 앞에 선 여인은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어디론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우리 마마님, 정말 선녀 같아…….’

    어린 궁녀가 동경심이 어린 얼굴로 제 주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미 그런 모습이 익숙한 궁인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마, 제가 소세를 도와드릴까요?”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옥비의 대답이 들려왔다.

    돌아선 궁인은 어린 궁녀가 여전히 넋을 놓고 보고 있자 그녀에게 일을 시켰다.

    “넋 놓고 뭐해? 얼른 가서 뜨거운 물을 가져와야지.”

    다시 정신을 차린 어린 궁녀가 황급히 대답했다.

    “네.”

    빠른 걸음으로 침전을 나가던 어린 궁녀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옥비는 이미 화장대 앞에 앉아있었는데, 자신의 실수에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어린 궁녀가 마음을 놓았다.

    ‘우리 마마님은 정말 좋은 분이야!’

    깨끗하게 씻은 옥비의 얼굴 위로 고운 연분이 발리고, 궁인은 옥비 머리칼을 다시 틀어 올렸다.

    어린 궁녀는 거울에 비친 옥비를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버들잎을 닮은 눈썹과 행인(*杏仁: 아몬드) 같은 눈, 그리고 복숭아 같은 분홍빛 뺨과 앵두처럼 붉고 탐스러운 입술까지…….

    그러나 어린 궁녀는 알 수 없는 실망스러움을 느꼈다. 

    ‘궁인들 이야기 속 옥비마마는 더 선녀 같았는데…….’

    물론 지금도 아주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무언가 빠진 것 같았다.

    무엇이 빠진 것인지 자신도 딱히 짚어낼 순 없었다.

    ‘그냥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거겠지?’

    옥비가 입을 열었다.

    “금벽아.”

    은근하고 부드러운 음성에 궁인이 다가왔다.

    “마마,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먹과 붓이 준비됐느냐?”

    궁인이 웃음을 지었다.

    “준비되었지요. 마마께선 오수를 하시고 늘 글을 쓰지 않으십니까. 노비가 잊을 리가 없지요.”

    옥비를 모시고 궁녀들은 모두 각루로 이동했다.

    * * *

    옥비가 아주 조용한 사람이란 것을 어린 궁녀는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수궁에 있는 궁녀는 이들 둘 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옥비는 늘 많은 이들이 시중을 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곁에 두 사람만을 남겼다.

    옥비가 글을 쓸 땐 궁녀 금벽이 옆에서 물을 넣고 먹을 갈았고 어린 궁녀는 문 앞을 지키며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만 전하면 되었다.

    ‘괴롭히는 큰 궁녀도 없고, 마마님도 저렇게 온화하시다니! 영수궁으로 오게 된 건 정말 삼생(三生)의 복이야!’

    어린 궁녀가 그런 생각을 하던 때에,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금벽아, 네가 보기에 이 두 글자가 어떠하냐?”

    “마마, 아주 예쁘게 잘 쓰셨습니다.”

    “붓에 힘이 조금 부족한 것 같지 않아?”

    “노비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해서겠지요.”

    어린 궁녀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 궁인들이 아래에서 위로 급히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것인지 말소리가 시끄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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