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5)화 (35/385)
  • 35화. 그녀는 아직 살아있는 거야

    한 편, 지온은 시녀들을 데리고 난택산방을 나섰다.

    하로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는 것을 본 지온이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우물쭈물하던 하로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아가씨, 아까 소인에게 전하라 하셨던 꿈 이야기 있잖아요…… 그런데 왜 대장공주께선 꿈에 관한 이야기는 안 물어보셨을까요?”

    “슬프니까.”

    “슬프다고요?”

    잠시 말이 없던 지온이 대답했다.

    “어떤 일은 더는 돌이킬 희망조차 없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슬퍼지거든.”

    * * *

    지온이 돌아왔을 때, 청옥과 함옥은 이미 옷도 갈아입고 식사까지 마친 뒤였다. 

    지온이 돌아온 소리에, 두 사람은 방에서 나왔다. 방에서 나오자 시녀 세 사람이 지온을 둘러싸고 있었다. 시녀 하나는 옷에 먼지를 털고, 다른 하나는 신을 벗겨주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하나는 물을 떠 오는 모습이 청옥과 함옥의 눈에 들어왔다. 

    세가의 규수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지온은 처음 왔을 때도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때는 그 모습이 정말 이상해 보였는데 이제 마음이 바뀌니 드는 생각마저 달라졌다.

    ‘원래 사저는 명문 세가의 규수가 맞잖아. 시녀 몇이 옆에서 시중을 드는 게 또 어때서? 제후 가문의 소저들이 문밖에 나설 때 어떤 모습인지 우리가 못 본 것도 아니고. 그거에 비하면 시녀 세 명은 적은 거지!’

    사람은 그저 본인이 어떤 처지냐에 따라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두 사람이 지온에 대해 처음부터 싫어하는 마음을 품다 보니, 지온의 보이는 모든 것이 아니꼬웠던 것이다.

    신을 갈아 신은 지온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슨 할 말 있어요?”

    그러자 청옥이 꿈에서 깨어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여기서 잠깐 앉아 기다리고 있어요.”

    서아가 시중을 들기 위해 지온을 따라 들어갔고 하로가 청옥과 함옥에게 다가와 안내했다.

    “선고님들, 이쪽으로 오세요.”

    * * *

    곧이어 서재에 앉은 청옥과 함옥은 하로가 가져다준 차를 홀짝였다.

    이 서재는 두 사람이 정리해둔 곳이었는데, 지온이 오고 난 후 여러 가지가 바뀌고 도구 같은 것들이 더 늘어나 있었다.

    금이나 옥과 같은 것은 없었다. 방이 그다지 화려한 것도 아니건만, 벽에 걸린 글이나 그림들은 깔끔하면서도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없어, 둘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앉았다.

    지온은 금방 나타났다.

    청옥이 황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고, 함옥은 조금 늦게 예를 차리기는 했지만 역시나 공손한 모습이었다.

    지온이 빙긋 웃었다.

    “같은 사문의 사자매(師姊妹)들인데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앉아요.”

    청옥도 함옥도, 같은 사문의 사자매란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심지어 함옥은 눈물까지 떨굴 뻔했다.

    스승님께서 그리 떠나신 바람에 조방궁에 남게 된 두 사람은, 마치 조방궁의 외부인처럼 지내왔다. 모두 같은 동문이었지만, 누가 두 사람을 자매라 생각해 주었던가?

    얼마 전, 바로 어젯밤에도, 그 작은 정실(靜室)에 갇혀있던 두 사람 모두 물 한잔조차 마시지 못했다.

    심지어 조방궁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숨까지 앗아가려고 하지 않았던가!

    고개를 숙여 눈물을 닦은 청옥은 함옥과 함께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일전에 사저에게 편견이 있던 것은 저희 잘못입니다. 사저는 그런 저희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저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써 주셨습니다. 큰절을 올리는 것은 저희의 죄송한 마음을 사저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았어요.”

    지온의 대답에 그제야 청옥은 안심이 되었다.

    ‘받으셨단 건, 우릴 용서한다는 거야. 아니, 어쩌면 사저는 처음부터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다시 자리에 앉은 청옥이 진심으로 말했다.

    “사저. 이 일은 이리 정리가 되었지만, 앞으로 저와 함옥이 조방궁에서 어찌해야 하는지도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지온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다른 일을 하지 않아야 해요. 두 사람은 나와 함께 지내라고 특별히 보내어진 게 아닌가요? 그럼 두 사람의 일은 이 일이잖아요.”

    청옥이 멈칫했다.

    “그건…….”

    찻잔에 손을 댄 지온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조방궁의 규율에 따르면 각 진인이 알아서 자신의 제자를 관리하게 되어있죠?”

    청옥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망설이며 물었다.

    “하지만 사저, 스승님께선 이미 돌아가셨는데…….”

    “내가 있잖아요?”

    지온이 웃었다.

    “내가 스승님의 적전제자니까 그것도 계승할 수 있는 자격이 되죠.”

    청옥은 그저 멍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지온은 계속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서는 조방궁을 떠나시기 전, 이미 진인(眞人)에 봉해지셨어요. 그건 스스로 문호를 세우실 수 있다는 말이고 달리 말하면, 우리 계열은 본래 독립된 계열이란 거예요.”

    “…….”

    흥분한 함옥이 말했다.

    “사저 말은 그러니까 우리가 조방궁에서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지온이 다시 천천히 정리를 해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궁관에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려거든 먼저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 후에 내가 전해야 한다는 거예요. 지주인 능양사숙께서 두 사람을 관속하려거든 본래 날 통해야 해요.

    “하,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레 찾아온 기쁜 소식에 청옥이 말을 더듬었다.

    “사저는 출가하지 않아서 진인의 칭호를 받을 수 없잖아요!”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 진인은 그저 존경의 의미가 담긴 칭호일 뿐이고 조방궁에서 진짜 권리를 가지는 건 각 전(殿)의 전주(殿主) 직분뿐인 걸로 알고 있어요.”

    삼청전(三淸殿), 영관전(靈官殿), 진무전(眞武殿)…….

    진인들은 각 전을 관리하고 다시 주지에게 모두 관리를 받는다.

    “주지가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

    청옥이 중얼거렸다.

    “주지는 전주(殿主) 자리를 사저에게 주지 않을 거예요.”

    “당연히 그러고 싶지 않겠지만, 멍청한 제자를 두고 있는 걸 어쩌겠어요.”

    작게 웃음을 지은 지온이 말했다.

    “마음 편하게 쉬고 있어요. 조만간 저들 스스로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내 손에 넘겨주러 올 테니까요.”

    * * *

    오송원에서 일어났던 신기한 광경은 그날 도성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

    수많은 사람이, 무수한 나비 떼가 구름처럼 날아오르는 기이한 광경을 보려고 조방궁으로 향했다.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인 유모지 역시 이 중 하나였다.

    돌계단을 오르며 그는 연신 뒤를 향해 소리쳤다.

    “큰형, 빨리 와! 늦으면 자리 없어!”

    그의 뒤, 멀지 않은 곳에 푸른색 옷을 입은 공자가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조금도 조급하거나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옆에 있던 시종이 웃으며 말했다.

    “둘째 공자님, 뭐가 그리 걱정입니까? 유씨 가문이라고만 하면 어찌 됐건 자리를 만들어 줄 텐데요.”

    유모지가 콧방귀를 뀌었다.

    “누군 이름을 못 대는 줄 아는구나. 나비 하나 보는 것에도 가문의 이름을 들먹여야 하는 것이냐? 내가 셋째도 아니고 그런 유세를 부릴 것 같아?”

    푸른색 옷을 입은 공자가 유모지의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렴 그렇겠지요! 언제나 겸손하신 둘째 공자께선 절대 가문 이름을 들먹이며 위세를 부리실 분이 아니십니다!”

    처음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유모지가 금방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쳤다.

    “큰형, 칭찬에도 혼을 좀 갈아 넣는 게 어때?”

    푸른 옷의 공자가 하하, 크게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난 제때 도착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으니, 가까이서 보고 싶으면 나 기다리지 말고 너 혼자라도 가거라.”

    그때, 시종이 한 곳을 가리켰다.

    “대공자님, 저쪽을 좀 보십시오! 저분은 형부의 루 대인 아닙니까?”

    유씨 가문의 공자 두 사람이 시종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종의 말 대로 한쪽 구석진 곳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 * *

    고 대인은 자신이 모시는 대인이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루 대인은 벌써 오 일째 매일 조방궁으로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조방궁에 도착해서는 향을 올리자고 하면 나서질 않고, 그렇다고 아무 할 일이 없으면 그만 가자고 해도 가질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넋을 놓았다.

    함께 마차를 타고 온 시종이 고 대인에게 말하길, 루 대인이 지씨 가문에 다녀온 후로 이상해졌다고 말했다.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수행을 위해 조방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대인은 그 뒤를 따라 조방궁까지 왔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놓고 만나려던 사람은 안 만나고, 지금처럼 가만히 넋만 놓다가 돌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이 미친 행각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정말 돌아버리겠네. 지 소저에게 볼일이 있으면 가서 물으면 되는 것을……!’

    설령 잡아다 관아에 처넣어도, 지금 지씨 가문의 상황에 저들이 감히 뭐라 할 수나 있겠는가? 대체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이 무엇이냔 말이다!

    수하 중 하나는 대인께서 혹시 지 소저가 마음에 들어 이러시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했지만, 고 대인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지! 대인의 눈에 돈 말고 보이는 것이 있을 것 같으냐! 여인이 뭐라고? 여인이 돈보다 중해? 중하냐고! 돌덩이 마음은 흔들 수 있을지언정, 우리 대인은 아니야!’

    그러니 문제인 것이었다.

    ‘대인께서는 대체 조방궁에서 뭘 하고 계시는 건가!’

    괴로운 고민을 이어가던 고 대인의 눈에 루안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올라가 물어보기로 하신 건가!’

    고 대인은 흥분에 휩싸였지만, 루안은 단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든 루안은 고 대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 냄새를 맡았는가?”

    흠칫한 고 대인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나비.”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풀숲을 비롯한 조용하고 외진 곳곳에서 나비가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나비들은 강이 서로 만나듯 한 줄로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빛줄기를 만들어내어 궁관을 향해 날아갔다.

    고 대인은 그저 입을 쩍하고 벌렸다.

    ‘대인이 며칠을 내도록 기다린 게 그러니까…… 나비?’

    하늘을 덮은 나비를 보는 루안의 눈에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기색이 어렸다.

    자신이 틀릴 리가 없단 것을, 루안은 알고 있었다.

    같은 향환, 같은 향수.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하늘도 가엽게 여기신 것이겠지. 그녀는 아직 살아있는 거야…….’

    “루 형(兄)이 아니시오!”

    그때, 루안의 뒤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루안이 고개를 돌려보자 유씨 가문의 형제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루안을 본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 유모지는, 새삼스레 그에게 당한 일이 떠올라 수치스러운지 콧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웬일로 루 대인이 시간을 다 내서 여기까지 왔나 모르겠구려? 설마하니 조방궁 시줏돈까지 눈독들이십니까?”

    루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공자가 유모지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헛소리 말아라.”

    그리곤 앞으로 다가와 루안에게 인사를 했다.

    “이리 우연히 루 형을 만나게 되다니, 우리가 인연이 있나보오.”

    루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흔하게 하는 문안조차 하지 않은 그는, 고 대인을 향해 물었다.

    “대리시(大理寺)가 오늘 쉬는 날이던가?”

    유씨 가문의 대공자인 유신지(兪愼之)는 대리시에서 임직 중이었다.

    형부와 대리시는 같은 삼법사(*三法司: 법을 맡아 다스리던 세 관아로 형부, 도찰원, 대리시를 말함) 소속으로, 하는 일이나 책임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보니 조직 간에 서로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루안의 성격상, 대리시의 관료에게 좋은 얼굴을 보일 리가 없었다.

    루안의 질문에 고 대인이 대답하기도 전, 유신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형부가 오늘 쉰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네만?”

    다 같이 몰래 나온 거, 굳이 서로 피 볼 일 없지 않겠냐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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