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3)화 (33/385)

33화. 선대 태자

대장공주와 함께 조방궁에서 살게 된 후로, 매고고의 걸음이 이렇게 빨랐던 적은 없었다.

긴 복도를 달리듯 간 매고고가 돌계단을 뛰어올라 단걸음에 장사각(長思閣)으로 들어갔다.

“마마!”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던 여양대장공주(驪陽大長公主)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나이도 지긋한 사람이 어찌 그리 급히 뛰어. 다치면 어쩌려고.”

여양대장공주.

그녀는 현재 황제의 당고모이자, 선제의 동복동생이었다.

도복을 걸친 그녀는 마흔 초반의 나이로 보였는데, 길게 뻗은 눈썹과 눈이 아름다웠다. 흐릿한 미소를 띤 얼굴이 따뜻했다.

매고고는 숨을 고르며 대장공주 옆에 있던 이들에게 모두 물러나 있으라 눈짓을 보냈다.

그런 매고고의 모습에 대장공주의 기색이 다소 엄해졌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그녀의 시선이 남쪽을 향했다. 그곳은 황성이 있는 방향이었다.

매고고가 작게 고개를 흔들고는 낮게 속삭였다.

“공주마마, 지 소저를 기억하시는지요? 능운진인의 제자로 며칠 전 찾아와 안부를 물었던 소저입니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덤덤한 모습이 마치 ‘난 또 무슨 큰일이라고’ 라고 하는 듯했다.

매고고가 말을 이었다.

“지 소저가 사람을 보내어 뵙기를 청하며 전한 말이 있사온데…….”

“그녀의 사매를 위해 부탁을 하던가?”

대장공주가 미간을 좁혔다.

“그 일은 저들에게 알아서 잘 처리하라 하지 않았는가?”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 날, 대장공주는 곧장 소식을 접했다.

선대 태자 전하의 위패를 모욕한 사건은 혀를 찰 만큼 추악했지만, 본인이 직접 나서서 추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에 상응하는 처분이 내려지면 되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매고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마. 지 소저는 그 일로 찾은 것이 아닙니다.”

대장공주의 길게 뻗은 눈썹이 흔들렸다.

“오? 나와 그 아이가 그것 말고 다른 연이 있던가?”

매고고가 대답했다.

“정확하게는 선대 태자 전하의 일입니다.”

그리고 매고고가 단번에 내용을 설명했다.

“지 소저가 전해오길, 태자 전하께서 그녀의 꿈을 빌어 말씀을 전해오셨다 합니다. 자신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황천을 걷기가 참으로 외로울 뻔했으나, 공주마마께서 자신의 위패를 조방궁에 세워두고 때마다 제를 지내주어 참으로 다행이라 하셨다 합니다. 비록 구천에 있지만, 자신을 아껴주시는 그 마음에 크게 감동하여, 과거 공주마마께 약속만 해 놓고 생전에 지키지 못했던 일을 지 소저를 통해서 해드리겠다 하셨다 합니다…….”

이미 대장공주의 얼굴은 몹시 어두워져 있었다.

“황당무계한 꿈 이야기를 어찌 자네도 믿어? 거기에 이리 바삐 달려와 내게 고하기까지 하다니.”

“공주마마!”

매고고가 조금은 억울한 듯 대답했다.

“노비가 몇 마디 말에 그저 속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이가 전해온 말에,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어라 하기에 그러는 것이야?”

대장공주가 차게 말했다.

“세 치 혀를 어찌 놀려 자네까지 흔들었는지, 내 한번 들어봐야겠네.”

매고고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전하기를, 한 번은 공주마마께서 생신을 맞으셨는데, 마마께서 태자 전하께 무슨 선물을 할 것인지 물으시며 농을 하신 일이 있으셨다 하였습니다. 그때 태자 전하께서 대답하시길, 고모님의 아명(兒名)이 봉접(*鳳蝶: 호랑나비)이셨으니 자신은 세상의 모든 나비를 고모님께 선물하고 싶다, 그리 대답을 하셨다고…….”

대장공주는 멈칫했다.

매고고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마, 그 일은 이미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아마 알고 있는 이들 중에 아직 마마의 곁에 남아있는 이는 저뿐이지요? 그런데 그 소저가 어찌…….”

이윽고 대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어디선가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애가 닳은 매고고는 발마저 굴렀다.

“마마, 정말 불러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으실 것입니까?”

대장공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떠나고 없는 사람이야. 그런 이야길랑 더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돌아가라 이르게. 뭐 하나 쥐여 주면 될 것이야.”

“공주마마…….”

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매고고는 실망을 품은 채 그대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대장공주는 창밖으로 매고고가 시녀를 따라 밖으로 나서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 그리 말해도 자네가 그저 보내지 못할 줄을 내가 알고 있었음이야…….”

찾아온 적막이 흐르길 잠시, 낮은 음성이 다시 울렸다.

“그 아이가 어찌 알았을꼬……. 진정 꿈을 빌어 말을 전한 것인가? 그런데 왜 이 고모에겐 삼 년이 가도록 꿈에도 나와 주지 않는 것이야…….”

* * *

오송원.

능양진인이 말을 하려던 찰나, 지온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고고께서 바쁘실 터이니 더는 시간을 끌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바로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매고고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온이 곧장 지시를 내렸다.

“서아는 가서 물통에 물을 채워 오거라.”

대답한 서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송원을 지나는 작은 시내에서 물을 길어왔다.

지온은 의운에게 향수가 든 병을 받아들고 한 병 전부를 물통 안으로 쏟아부었다. 그리고 다시 시녀 세 사람에게, 꽃에 물을 주는 용도로 사용하는 물뿌리개에 향수를 탄 물을 나누어 넣고 사방에 뿌리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모두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시녀 세 사람이 선대 태자의 위패가 모셔진 영령당과 영령당 근처 바닥 전체에 전부 물을 뿌렸다.

지온이 다시 청옥과 함옥을 불러 물통에 남은 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들 스스로가 그리 결백하다면, 이 물을 너희의 몸에 뿌려 보아라.”

청옥과 함옥은 당황했지만, 지온은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보고만 있었다.

결국에 이를 악문 청옥이 물통을 들어 자신의 몸에 뿌리고 다시 함옥의 몸에도 끼얹었다.

아직 그리 더운 날씨가 아닌지라, 물을 뒤집어쓴 두 사람은 바람이 불어오자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무슨 괴상한 짓이야?”

눈을 홉뜬 화옥이 불퉁한 소리를 냈지만, 능양진인은 굳은 얼굴로 말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제자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저길 보세요, 나비예요!”

모두의 고개가 돌아간 그곳에, 구름 같은 나비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춤추는 선녀님의 고운 옷자락이 나부끼듯, 나비들이 훨훨 날아들고 있었다.

* * *

장사각(長思閣).

여양대장공주는 잠시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탕약을 드시란 궁인의 말에 생각에서 깨어난 그녀가 문득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내가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야? 아이의 장난 같은 말을 어찌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 설령 진짜 소저의 꿈을 빌어 나왔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일을 지 소저가 어찌 이루어줄 수 있겠는가. 그저…….’

“공주마마!”

궁인이 갑자기 그녀를 부르더니 흥분하여 한쪽을 가리켰다.

“저곳을 좀 보시지요!”

대장공주의 시선이 돌아간 하늘에는 아름다운 무지갯빛 향연이 물결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것은…….’

“나비! 나비입니다, 공주마마!”

“나비가 정말 많습니다! 아름다워라…….”

“그런데 갑자기 나비가 어디서 이렇게 많이 나온 거지?”

“그러게? 진짜 신기하다.”

대장공주는 멍한 모습으로 무지갯빛 나비들을 바라보았다. 나비의 날갯짓에 빛이 오색찬란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흘러가 버린 옛 추억을 떠올렸다. 공주는 그 아이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고모님께서 나비를 좋아하시니 제가 세상 모든 나비를 고모님께 선물해 드릴게요! 어떠세요, 고모님?”

“아주 좋구나! 그런데 그 선물을 어찌 해주려고?”

공주가 질문했던 그때 그 아이는 한참을 고민하곤 이렇게 답했었다.

“아바마마께서 저는 진룡 태자(眞龍太子)이니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꼭 어른이 되어야 할 수 있다고 하셔서…… 고모님, 제가 더 자랄 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기다릴 테니 대신 빨리빨리 자라야 한다!”

무지갯빛 나비를 보는 대장공주의 눈가에 눈물이 반짝였다.

그 아이는 어른이 되었지만, 결국 그 아이가 천하를 호령하는 날은 오지 않았다.

* * *

오송원.

멀리서 보이는 나비들은 얼핏 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나비 떼와 가까이 있는 이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날아든 나비들이 곧장 바닥을 향해 날아드는 통에 모두가 나비 떼를 피하느라 바빴다.

“서아야.”

“네, 아가씨.”

아가씨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금방 눈치를 챈 서아가 주머니 속에서 환약을 꺼냈다.

이 환약을 지온과 시녀 셋, 그리고 매고고가 한 알씩 나누어 가지자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다가오던 나비들이 역한 냄새를 맡고는 곧장 다른 곳으로 날아간 것이다.

다섯 사람은 그렇게 환약을 지닌 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나비가 만들어내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하늘을 덮은 나비들이 오송원을 날아다녔다. 아름다운 빛깔의 날개가 빛을 반사하며 환상과 같은 세상을 만들어냈다.

마음에 격동이 인 매고고는 물기가 밴 눈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역시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었어요……. 가여우신 태자 전하…….”

시녀들은 매고고 같은 깊은 슬픔은 당연히 느끼지 못했다. 그저 황홀한 순간을 목격한 데서 온 즐거움만이 시녀들의 얼굴에 가득했다.

“아가씨, 저길 좀 보세요! 정말 아름다워요!”

“와, 이 나비는 무슨 나비일까? 날개가 정말 아름다워.”

“저기도 봐봐! 날개 위에 눈이 잔뜩 돋은 것 같지 않아?”

“저 나비도! 정말 새파랗다! 거기에 빛까지 반사해!”

그녀들이 나비의 아름다운 모습에 재잘대고 있을 때, 능양진인 쪽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화옥이 죽어라 불진을 휘두르며 몸으로 달려드는 나비들을 털어냈지만, 그렇게 털어내기엔 나비들이 너무 많았다. 금방 손발이 엉망으로 엉킨 화옥은, 머리에 쓴 관모(冠帽)마저 삐뚤어져 몰골이 엉망이 되었다.

지온과 다른 이들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본 화옥은 울컥 화가 치밀어 소리를 꽥하고 질렀다.

“무슨 사술을 쓴 거냐! 빨리 이것들 내쫓지 못해!?”

슬쩍 시선을 돌린 지온이 평온하게 대꾸했다.

“화옥 사저, 사술이라뇨? 말을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다 같은 도문의 제자인데 도술 조금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사저가 못한다고 다른 이들도 못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죠.”

분기탱천한 화옥이 눈을 치켜뜨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야! 증거를 보이겠다더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이따위 나비나 불러들여서 그냥 슬쩍 넘어가 보려고?”

지온이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기분이 상한 듯한 매고고의 음성이 먼저 흘러나왔다.

“나비가 뭐가 나쁘단 말인가? 함부로 말하지 말게!”

화옥이 흠칫 놀랐다.

그녀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매고고가 지온을 향해 따뜻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 소저. 나비들이 아름답긴 하네만, 이대로는 확실히 대화하기 어려울 걸세. 환약이 더 남았는가? 있으면 저들에게도 나누어주는 것이 어떤가?”

서아가 대답했다.

“아가씨, 이제 두 알 남았어요.”

“능양 사숙과 화옥 사저께 드려라. 벌레퇴치환약은 냄새가 퍼질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니 다른 분들도 근처로 서시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서아가 금방 환약을 나누어 주었다.

안 그래도 나비가 심하게 들러붙어 곧 고인의 풍모를 잃을 위기에 처해있던 능양진인이 얼른 환약을 받았고 다른 이들도 지온의 말에 따라 가까이 다가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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