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2)화 (32/385)

32화. 직접 물으실까요?

화옥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귓가에 심장이 고동치는 화옥에게 지온의 음성이 들려왔다.

“능양사숙, 두 아이가 아직 제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킬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지요. 제게 저들의 죄를 입증할 방법이 있으니, 사숙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두 사람에게 증거를 확실히 보여주어 다시는 변명을 할 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지온이 등장한 후로 능양진인은 그녀에 대한 경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정의를 부르짖으며 청옥과 함옥을 엄하게 벌해야 한다, 소리치면 소리칠수록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 역시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금 전 지온의 말에 능양진인은 깨달았다.

‘증거를 손에 쥐고 있는 게로구나.’

앞서 서론을 그리 길게 이어간 것도 그 증거를 들이밀어 청옥과 함옥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이런 일에 두려운 것이 어디, 적의 잔인한 손속이던가! 진정 두려운 것은 적이 무슨 수를 부릴지 알 수 없다는 것이거늘…….

능양진인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증거를 내밀고 싶었던 것 같다만, 그 증거를 내밀 기회조차 본좌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냐?’

향환에 독이 있을지 모른다는 한 마디에 이미 체면은 차고 넘치게 차려주었다.

‘시답잖은 사실을 하나 알고 있다고, 진짜 대장공주님을 뒷배로 삼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다니……. 순진도 하지!’

능양진인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질, 그리 번거로이 처리할 필요가 없네. 증거가 확실하니 두 사람이 발뺌하는 것을 그저 넘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나. 기왕 사질 역시 저 아이들이 지은 죄에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 한다 생각한다 하니, 그럼 본좌가 직속 사질의 뜻을 이루어 사문을 깨끗하게 정리해주도록 하겠네! 여봐라!”

능양진인의 무거운 부름에 총관선고가 곧장 화답했다.

“네!”

지주가 직접 내리는 명은, 화옥이 어림짐작으로 내린 명령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곧 사나운 기세를 풍기는 여관들이 앞으로 달려 나와 청옥과 함옥을 붙들어 잡았다.

지온이 등장한 이후로 청옥과 함옥의 심장은 내도록 세차게 가슴을 쳐댔다.

처음엔 살길이 열렸다고 생각하여 기쁨과 희망에 들떠 쳐댔고, 다음엔 지온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가슴을 쳐댔다. 그리고 조금 전, 능양진인의 말에 기어코 자신들의 목숨이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금 찾아온 절망에 심장이 툭 떨어졌다.

‘결국, 이번 화를 면할 수 없게 되었구나. 하지만…… 음?’

그때였다.

청옥과 함옥,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린 지온이 재빨리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는 이상한 입 모양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저게 무슨 뜻……?’

청옥이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함옥이 내지르는 소리가 청옥의 귀에 들려왔다.

“억울합니다! 우린 정말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요! 우리는 모함을 당한 거예요!”

그 순간, 곧장 지온이 무슨 뜻으로 눈치를 주는 것인지 깨달은 청옥 역시 함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저흰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겨우 더러운 물 한 동이가 어떻게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저희를 처분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신 분은 오직 대장공주님뿐이시니, 저희는 대장공주님을 뵈어야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지온이 크게 노한 듯 고함을 쳤다.

“대장공주님을 뵙다니! 곧 죽을 것 같으니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내가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대장공주님을 뵙고자 청했다. 하지만 아직 소식이 없다는 것은 대장공주께서도 이미 너희들 따윈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뜻이지. 그러니 그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다!”

그 소리에 멈칫한 능양진인의 눈에 지온이 다시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숙께서 증거가 필요치 않다고 하셨으니, 그럼 증거는 이만 되었습니다. 저들 외에 또 다른 의심스러운 이들일랑 있을 리가 없겠지요. 대장공주께서 혹여나 여쭈시어도 별일은 아닐 것입니다. 조방궁의 지주이신 사숙께서 어린 제자 두 명도 처분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능양진인은 생각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장공주, 대장공주 노래를 부르는 것이, 설마하니 진짜 대장공주님을……?’

그때, 문득 능양진인은 지온의 한 손이 허허실실하게 허리춤에 걸린 것을 보았다. 곧 발검이라도 할 듯한 동작을 취한 지온의 시선은 곧장 화옥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입가엔 차가운 냉소와 함께 살기를 품고 있었다.

화옥?

‘설마, 애초에 청옥과 함옥, 두 아이의 목숨 따윈 관심 없이 죽이고자 하는 것이 화옥이었던 게야?!’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청옥과 함옥이 죽은 후, 다시 대장공주께서 이 일에 끼어들게 될지 몰랐다.

‘그리되면 화옥은…….’

미간을 잔뜩 좁힌 능양진인은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청옥과 함옥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저 아이의 뜻을 이루어 주는 일이었다. 그 후 진짜 사실이 밝혀지면, 사람의 목숨이 연루되었기 때문에 화옥의 죄는 더욱 가중될 것이고, 설령 지주인 자신이 나서더라도 덮어 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대로 청옥과 함옥을 풀어준다면, 자신이 사질인 본인을 두려워한다 생각하여 이 일을 꼬투리 잡아 앞으로 계속 협박을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능양진인이 고민에 빠진 사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온 중년의 여관이 그녀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작게 표정이 변한 능양진인의 시선이 다시 지온에게 꽂혔다.

이윽고, 능양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좌가 좀 더 생각을 해보니 사질의 말이 옳다 여겨지네. 저들에게 죄를 묻기 위해선 두 사람 모두 완전히 인정해야겠지. 사질, 사질이 무슨 방법이 있는지 이야기를 해보게.”

순간 당황한 화옥이 저도 모르게 왈칵 소리를 질렀다.

“스승님!”

그러나 능양진인은 그런 화옥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지온 역시 무척이나 놀란 것처럼 능양진인에게 되물었다.

“사숙께서 그리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된다지 않으셨습니까? 확실히 번거롭긴 합니다.”

능양진인의 이마에 불쑥, 새파란 핏줄이 돋았지만, 이를 악물고 감정을 조절한 능양진인이 대답했다.

“목숨이 달린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니, 사질이 수고를 해주어야겠군!”

그제야 지온이 방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숙께선 너무 예를 차리십니다. 사숙께서 원하시는데 제가 어찌해드리지 않을 수가 있으려고요? 그럼 우선 오송원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 * *

지온이 사방전(司芳殿)을 나오자 의운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가씨!”

서로 눈빛을 주고받곤 지온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네, 아가씨.”

의운이 향수가 든 병을 다시 한번 꼭 쥐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단한 위세를 뽐내며 오송원을 향했다.

능양진인 곁에서 따라가던 화옥이 그녀에게 낮고 빠른 음성으로 물었다.

“스승님, 갑자기 왜 허락하신 것입니까? 진짜 증거라도 들고 있으면 두 사람이 죄를 벗을 텐데, 그럼 앞으로 후환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능양진인이 차게 웃었다.

“내가 허락만 하지 않으면 될 것 같으냐? 저 아이는 사방전에 오기 전에 이미 대장공주께 사람을 보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梅)고고(姑姑)를 움직여 지금 매고고께서 이미 오송원에 와계신다. 만약 매고고께 먼저 증거를 보이게 되면…….”

화옥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저들이 매고고를 움직였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대장공주께서 스승님을 얼마나 신임하시는데, 이런 사소한 일까지 직접 물으실까요?”

화옥이 이런 악독한 수까지 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니던가? 선대 태자 전하의 위패를 모독하는 것은 비록 혀를 찰 악한 일이었지만, 사건 자체만 보자면 아주 큰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름 높은 조방궁의 주지인 능양진인이 직접 사건을 확인하고 처분을 하는 것만 해도 이미 사건을 충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대장공주 역시 능양진인을 위해 직접 하문하지 않는 체면 정도는 차려줄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변고가 나다니?’

화옥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움직였을 리가 있고 없고가 지금 중요하느냐? 이미 일이 이리되었는데 그럴 리 없단 생각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

“하지만 스승님, 그 증거라는 것이…….”

능양진인이 화옥의 말을 끊었다.

“확실히 본 사람은 없는 것이냐?”

능양진인의 질문은 언뜻 듣기엔 청옥과 함옥에게 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화옥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네가 모함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는 증인이 있느냐? 너까지 연루될 가능성은 있어?’

화옥이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겨우 이깟 사소한 일에 자신이 직접 나섰겠는가? 겉으로 보기엔 그녀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일 터였다.

그러자 능양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용히 하고 있거라.”

* * *

오송원.

하로는 여도사 차림의 중년 여인과 함께 소나무 아래 서 있었다. 지온 일행을 본 하로가 먼저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그리곤 다시 옆에 있던 중년의 여인에게 소개했다.

“매고고, 저희 아가씨이십니다.”

지온이 몸을 낮춰 예를 갖췄다.

“지온이 매고고를 뵙습니다.”

자애로운 표정의 매고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고고를 본 능양진인 역시 다가와 예를 갖췄다.

“매고고, 겨우 이런 일로 번거롭게 해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매고고가 손을 저었다.

“선대 태자 전하의 일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저는 그저 대장공주님 곁에 있는 작은 노비일 뿐이니 감히 번거롭다 할 수도 없지요.”

매고고가 선대 태자 전하를 언급하자 능양진인은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저 설익은 것이 진짜 대장공주님을 움직였어!’

* * *

이 각 전(*二刻 前: 약 30분).

하로는 난택산방(蘭澤山房)의 돌계단 근처에서 콩닥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긴장한 마음을 편하게 먹기 위해 그녀는 조용히 지온이 알려준 말을 되뇌고 있었다.

이윽고 궁인이 나타나 그녀에게 인사를 하곤 물었다.

“여기에 머물고 계시던데,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하로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능운진인의 대제자, 지 소저를 모시는 시녀 하로입니다. 며칠 전에 뵈러 왔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궁인이 가만히 하로를 살피다 기억이 난 듯 표정이 바뀌었다.

“아, 그때 오셨던 분이시네요!”

“네. 다시 이렇게 실례를 하게 되었네요.”

“아니에요.”

말을 멎은 하로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공주님께서는 계속 수행을 하고 계시니 외부인을 만나지 않으시지요?”

그 말에 궁인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대장공주님을 뵈러 온 것이 아니던가?’

지씨 가문의 소저와 대장공주께서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시니, 시녀 혼자 덜렁 와서는 당연히 공주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말투는 꼭 뵙지 못하길 바라는 것 같잖아?’

“무슨 일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생각을 멈춘 궁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마마께서는 온 마음으로 수행에 임하고 계셔서 외부의 객을 만나지 않으세요. 중요한 일이 있으셔도 사람을 보내어 처리하시고요.”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한참을 망설이던 하로가 입을 열었다.

“실은 저희 아가씨께서 꿈을 하나 꾸셨는데, 꿈이 다소 맥락이 없긴 하나 귀하신 분과 관련이 되어 저를 보내어 말씀을 전하고 오라 하셨어요. 혹시 대장공주님께 전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어려우시면, 대장공주님을 곁에서 모시는 고고님께 전해주셔도 되고요. 곤란하게 해드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저희 아가씨께서 아무래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하셔서…….”

쭈뼛거리며 말을 전하는 모양새가 꼭 자신도 이런 일은 그다지 믿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꿈 때문에 대장공주님께 실례를 끼치다니, 황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주인이 시키는 일이니 시녀로서 자신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모습이었다.

궁인 역시 꿈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로의 그런 모습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기에 혹시 그 안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으니 일단 이야기해보세요. 가서 고고께 전해드릴게요. 다만, 고고께서 어떻게 나오실지는 저도 확답을 드릴 수가 없겠네요.”

그에 하로가 크게 기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로가 곧이어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 아가씨가 간밤에 꾸신 꿈속에서 누군가 아가씨께 말씀하시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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