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1)화 (31/385)
  • 31화.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두 사람이 서로 죄를 뒤집어쓰려는 모습에,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화옥이 드디어 시린 냉소와 함께 목소리를 냈다.

    “어디서 우애 깊은 자매 연기를 하고 있어? 너희들이 그런다고 지주께서 마음이 약해지실 것 같아? 둘 다 스스로 했다고 하니, 그럼 둘 다 풀어주지 않으면 되겠구나! 여봐라!”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선 화옥이 두 사람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청옥과 함옥 두 사람은 도문의 제자가 되어 덕행을 쌓지는 못할망정, 황가의 공양을 받은 몸으로 선대 태자 전하를 모욕하였다! 끌어내어 장(杖), 오십 대를 쳐라!”

    그 말에 총관선고가 망설이며 능양진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능양진인이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반대의 뜻을 비추지 않자,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해라.”

    여관들이 두 사람을 끌어내려 할 때, 밖에서 종종걸음으로 들어온 도동이 말을 전해 올렸다.

    “지주, 지 사저가 뵙기를 청하십니다.”

    그 말에 흠칫 놀란 청옥과 함옥은 억울하다 소리치려던 것도 잊어버렸고, 화옥은 미간에 큰 내를 만들며 도동을 질책했다.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소릴 해! 중요한 일이 있으니 뵙고 싶으면 기다리라 전해라!”

    그러자 도동이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지 사저께서, 지금 지주께서 만나주시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대장공주를 찾아뵙고 향환이 일으킬 수 있는 중독에 대해 의논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능양진인이 눈을 번쩍 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도동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이 드디어 열리며 첫마디를 뱉었다.

    “그 아이가 뭐라 했다고?”

    도동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

    “지 사저께서…….”

    그러나 도동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능양진인이 총관선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린 여아는 늘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자네가 가서 그 아이를 데려오게. 말과 행동은 신중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게나. 어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책임을 져야 하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 총관선고가 나가고, 사방전(司芳殿)엔 침묵이 가득찼다.

    청옥과 함옥은 서로의 눈빛 속에서 걱정과 기쁨을 읽었다.

    기쁨은 지 사저가 진짜 자신들을 위해 나서주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기대하면서도 감히 생각할 수 없던 일이 아닌가!

    걱정은 지 사저가 저리 함부로 말을 뱉었다, 대장공주의 귀에 들어가 죄라도 묻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화옥이 작게 속삭였다.

    “스승님, 지 소저가 함부로 말을 하는 것도, 애초에 스승님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지요? 스승님은…….”

    능양진인이 차가운 눈빛을 던지자 화옥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지온은 이미 총관선고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자, 지주를 뵙습니다.”

    그녀가 공손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다른 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도법에 맞는 예를 올렸다.

    능양진인의 시선이 그녀에게 떨어졌다.

    몸을 일으킨 지온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능양진인이 그녀를 마음껏 살피게 두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능양진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눈앞의 저 사질(師侄)은, 그녀가 도성에 돌아왔을 때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아이였다. 당시 자신이 얼마나 실망을 했던가. 그 훌륭했던 사저가 길러낸 제자가 그토록 재능 없이 평범한 모습일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 했건만…….

    ‘그런데 지금, 오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조용하지만 당당하게 서 있는 저 아이가 그때 그 아이란 말인가? 그리고 아까 그 말은 또 무슨 의미인지…….’

    속에서 휘몰아치는 오만가지 생각을 뒤로하고 능양진인이 입을 열었다.

    “청옥과 함옥을 위해 부탁을 하러 온 것이냐? 그래도 네가 정(情)이 깊고 의기가 있구나. 사저였던 능운진인을 생각하여 본좌가 벌을 좀 더 가볍게 하여 주겠다. 청옥과 함옥, 둘 다 장(杖), 스무 대로 벌을 낮춰주마. 그리고 본좌가 직접 대장공주께 벌을 받으러 가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을 테니, 너는 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청옥과 함옥은 기쁨과 함께 희망을 느꼈다.

    조금 전 화옥이 정한 오십 대는 장을 치는 이가 손속에 사정(*私情: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으면 맞다 죽을 수도 있는 숫자였지만, 바뀐 스무 대는 맞고 난 후에 한동안 상처로 요양은 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목숨은 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능양진인의 말에 화옥이 입술을 삐죽였다.

    ‘스승님이 너무 마음을 좋게 쓰신 거 아냐? 부탁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왜 미리부터 들어주신다고 그러시는 거야, 정말! 장이 스무 대면 간에 기별도 안가잖아…….’

    하지만 어제 제 스승으로부터 이미 경고를 받은 터라 감히 나서서 끼어들 수가 없었다.

    ‘아, 몰라! 그냥 다음 기회를 보는 수밖에.’

    사람만 궁관에 있다면 어찌 되었건 기회가 오지 않겠는가?

    청옥과 함옥은 물론이고 화옥까지 다들 이 일은 이대로 정리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빙긋 웃음을 지은 지온이 능양진인의 말에 덜컥 반대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능양사숙께서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저는 두 분을 위해 부탁을 드리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어리둥절해졌다.

    함옥이 이게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청옥을 바라보았으나,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은 청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능양진인만은 차갑고 담담한 시선으로 지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능양진인이 물었다.

    “그럼 자네는 무슨 일로 왔는가?”

    그러자 더욱 가슴을 당당하게 세운 지온이 기세 넘치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온 것이지요!”

    “뭐?”

    화옥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청옥과 함옥을 위해 정의를 세우겠다는 거야, 지금?’

    미간에 주름을 잡은 능양진인이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

    “그렇습니다.”

    그리곤 지온이 호쾌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생전에 스승님께선 도문(道門)의 제자라면 자고로 마음을 수양하여 단정케 하는 것이 입신(立身)의 기본이라 하셨습니다. 청옥과 함옥, 두 사매 역시 어린 날, 그런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런 일을 자행하다니, 무슨 낯으로 스승님을 뵐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스승님께선 이미 고인이 되시었고 적전제자로 저 하나를 남기셨습니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해 훈계를 할 책임도 제게 있습니다. 두 사매가 저지른 일은 사문(師門)의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 사숙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벌을 가볍게 내리셔도, 저는 그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

    기이한 침묵이 전을 휘돌았다.

    화옥은 제 귀를 의심했고 능양진인은 말이 없었다.

    넋을 놓은 듯한 청옥과 닭똥 같은 눈물을 단 함옥은 그저 지온을 바라만 보았다.

    오직 서아만이, 지씨 가문의 이풍당(頤風堂)을 찾아가 위씨 부인에게 제 속내를 전하던 아가씨와 지온을 겹쳐보며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능양진인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너무 늦은 걸까?’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한참이 지나 정신을 차린 화옥이 반문했다.

    “당연히 중벌을 내려야지요!”

    지온이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맡은 일에 사적인 원한을 섞어 위패를 더럽혔으니 도문의 규율을 어겼습니다. 더구나 위패는 선대 태자 전하의 것이었으니, 지엄한 국법에 비추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 두 사람에게 장 스무 대가 어찌 족하겠습니까? 장이 백 대라 해도 죄를 다 갚지 못할 것입니다!”

    “…….”

    화옥이 떠보듯 물었다.

    “그럼 몇 대나 생각하고 있는데?”

    차갑게 웃음을 지은 지온이 멍청한 얼굴을 한 청옥과 함옥을 슬쩍 흘겨보았다.

    “국법이 도문의 규율보다 강하니 당연히 관아에 넘겨야지요. 형(刑)이야 어찌 떨어지든 그대로 받을 것입니다. 설사 목이 날아간다 해도 자업자득이지요!”

    “안 돼!”

    화옥이 금방 반대를 하고 나서자 지온이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옥 사저, 마음이 약해지신 건가요?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조방궁까지 연루될지 모르는걸요. 두 사람 때문에 사문까지 연루가 되면 대장공주님은 무슨 낯으로 뵌단 말인가요?”

    그녀의 말에 화옥은 입만 벙긋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지온의 질문이 날카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이 반대하면 안 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청옥과 함옥을 죽음으로 몰고 가면 지온은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왜 지온이 저들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안달을 내고, 자신이 오히려 반대해야 한단 말인가!

    이 사태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능양진인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 조방궁의 명성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럼 누가 선대의 위패를 우리 도관에 모시겠느냐?”

    그 말에 그제야 깨달은 듯, 지온이 감탄에 마지않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사숙께선 참으로 빈틈이 없으신 분이시어요. 그럼 이 일은 외부에 크게 알리기 어려운 일이겠습니다.”

    “그래.”

    “그럼 아무래도 처리가 쉽지 않겠습니다.”

    지온이 난감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희가 사사로이 형을 집행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궁관에 대장공주께서 머무르고 계시는데 사사로이 형을 집행했다가 말이라도 퍼지면 공주님의 명성에 흠이 될 것입니다.”

    능양진인이 인내를 발휘하며 대꾸했다.

    “과한 생각이다. 선대 태자 전하의 위패를 모욕한 것도 이미 대역죄일뿐더러 조방궁은 황가의 궁관이라, 조방궁의 제자들 역시 평범한 백성과는 다르니 대장공주께는 처분을 내리실 권리가 있다.”

    “그런 것인지요!”

    금방 알았다는 듯, 지온이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그럼 관아를 통하지 않아도 되니, 대장공주께서만 동의를 해주시면 처벌이 가능합니까?”

    생각 끝에 능양진인은 그리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되었습니다! 사숙께서도 그리 말씀을 해주시니, 저도 마음이 놓입니다.”

    ‘음? 무엇이 안심된다는 것이야?’

    지온이 금방 말을 이어 능양진인의 궁금증을 풀었다.

    “어찌 되었건, 사람의 목숨을 건드리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청옥과 함옥, 두 사람 모두 제 직속 사매인데, 제가 사숙께 어찌 그런 짐까지 짊어지시게 할 수 있겠는지요? 그러니 이 일은 제가 먼저 처리를 하겠습니다. 사숙께선 그 후에 대장공주님께 보고만 올려 주시지요!”

    그리곤 바로 뒤를 돈 지온이 청옥과 함옥을 향해 엄한 어조로 물었다.

    “너희 두 사람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지 않았으며, 사사로운 원한을 갚기 위해 황족을 능멸한 죄가 명백하다. 이제 내가 스승님을 대신하여 너희 두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사문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죽기 전에 할 말이 있느냐?”

    순식간에 달라진 상황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한 청옥은 그저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나마 대가 센 함옥만이, 저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니에요! 우리가 한 게 아니라고요! 억울합니다!”

    “아직도 인정을 안 하시겠다?”

    차게 웃은 지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럼 너희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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