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30)화 (30/385)
  • 30화. 더는 방법이 없잖아

    능양진인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청옥은 조금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지난 9년의 세월. 사숙이었던 능양진인은 자신들에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조방궁의 주지로서 신분에 맞지 않게 직접 자신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 제자인 화옥을 말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조용한 가운데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울렸다. 점심을 먹다 잡혀 이곳에 갇힌 후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함옥은 지난 이틀간 먹었던 맛있는 저녁을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지온을 떠올린 그녀의 눈에 작은 희망의 빛이 돌았다. 함옥은 청옥에게 속삭였다.

    “사저, 우리가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지 사저도 우리에게 일이 생긴 걸 알고 있겠지?”

    함옥의 생각을 짐작한 청옥이 되물었다.

    “사저가 와서 우릴 도와주길 바라는 거야?”

    고개를 떨군 함옥이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그렇게 우리에게 당부했던 것도, 화옥이 이렇게 우릴 모함할 걸 예상했던 거잖아, 그치?”

    “그렇지…….”

    “화옥이 이렇게 나올 걸 어떻게 안 걸까?”

    함옥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묻자 청옥이 조용히 대답했다.

    “내 생각엔, 그냥 만일을 생각했던 거 아닐까? 그날 서아 낭자가 우리보고 왜 이렇게 일을 많이 하냐고 물었었잖아. 세가 안에서는 별별 음흉한 일이 많이 벌어지니까 아마 그때 예상을 했던 거겠지.”

    “그럼 지 사저가 우리가 이렇게 된 거 알았으니까, 우리를 혹시…….”

    잠시 침묵하던 청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큰 희망은 품지 말자. 작은 일이 아니잖아. 아무리 관가의 소저라는 신분이 있어도 함부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더구나 지 사저가 뭘 믿고 우릴 구하러 올 수 있겠어. 그리고 지주가 사저 말을 듣기는 할까?”

    함옥도 입을 닫았다.

    ‘맞아. 사저도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시고 의지할 곳 하나 없는데 우릴 어떻게 구해줘…….’

    능양진인 사숙 앞에선 자신들이나 지 사저나, 대장공주의 얼굴도 볼 수 없는 모두 똑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방법이 없잖아…….’

    생각할수록 절망만 차오르는 두 사람이었다.

    청옥이 함옥을 끌어안고 조용히 읊조렸다.

    “자자, 우리 며칠이나 고생했잖아. 이 기회에 푹 쉬자. 어쩌면 주지도 우리 목숨까지 취하려는 건 아닐 수도 있어. 내일이면 나아질 거야.”

    사실 함옥이나 청옥이나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생각이라도 이리 하는 것 외엔 자신들을 위로할 방법이 없었다.

    * * *

    화옥이 내실로 들었다.

    “스승님.”

    눈을 뜬 능양진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능양진인의 시선에 불편해진 화옥이 고개를 돌리자 능양진인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이 네게 무슨 짓을 했기에 죽음까지 몰아가는 것이냐?”

    “스승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제자는 모르겠습니다.”

    화옥이 부인했지만, 마치 듣지 못했다는 듯 능양진인이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앞으로 이런 일은 되도록 하지 말아라.”

    “스승님…….”

    “차도살인(*借刀殺人: 칼을 빌려 사람을 죽임, 남을 이용하여 사람을 해하는 음험한 수단을 이르는 말)도 빌려 쓰려는 칼이 어떤 칼인지 보고 움직여야지.”

    그리곤 순식간에 어조를 달리한 능양진인이 엄히 일갈했다.

    “감히 대장공주님을 들어 차도살인의 칼로 쓰다니, 네가 정녕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야!”

    화옥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자신이 더욱 작고 불쌍하게 보이도록 머리를 바닥에 깊숙이 숙인 화옥은 애원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자, 다시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 * *

    맑은 아침볕이 조방궁을 가득 채웠다.

    화려한 궁전과 짙푸른 초목들 모두 볕 아래서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장궁을 벌려 당긴 지온이 과녁의 중심을 노렸다.

    쌔액!

    화살이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지온의 옆에는 잔뜩 인상을 쓴 의운이 궁을 당기려 애쓰며 어깨 힘을 기르고 있었다.

    의운은 서아와 하로가 다른 일로 가고 없으니, 아가씨 시중을 든단 핑계로 훈련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온이 시중은 필요 없고 우선 궁을 당겨 여는 연습부터 하라는 것이 아닌가!

    ‘전쟁에 나갈 것도 아니요, 과거를 볼 것도 아닌, 한낱 시녀일 뿐인 내가 왜 이곳에서 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지?’

    깊은 고민에 빠진 의운이 미처 답을 찾기도 전에 서아와 하로가 돌아왔다.

    “아가씨!”

    두 사람을 본 서아가 치마까지 틀어쥐고 급히 달려왔다.

    “선고님들께 큰일이 생겼어요, 아가씨!”

    지온이 활쏘기를 멈추자, 금세 궁을 내려놓은 의운이 손수건을 건네며 시중을 들었다. 이번에는 지온도 말없이 손수건을 받아들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천천히 이야기해봐.”

    서아가 대답했다.

    “간밤에 선고님들이 돌아오시지 않은 것이, 알고 보니 잡혀가서 그러신 거였어요. 저들이 하는 말이…….”

    미간을 좁힌 채 이야기를 들은 지온이 다시 하로를 보자 하로가 보충하듯 입을 열었다.

    “선고님들이 선대 태자 전하의 위패에 불경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두 분을 제외하고 의심을 받는 다른 이들은 없었어요. 제가 보기엔 두 분의 상황이 그리 낙관적이지 않은 듯싶어요.”

    의운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선대 태자 전하의 위패를 모독하는 것은 목이 달아날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가씨, 절대 끼어드시면 안 돼요!”

    하로 역시 동의했다.

    “아가씨께서도 능양진인께 말씀이 통하질 않으시니, 대장공주께서 모습을 보이시지 않는 이상 어려우실 거예요. 하지만 대장공주께선 쉽게 외부인을 만나주질 않으시니…….”

    그 와중에도 서아는 말이 없었다.

    아가씨가 자신을 시켜 청옥과 함옥에게 전하라는 말들이나, 이렇게 저렇게 보였던 모습들만 보아도, 아가씨는 오늘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을 이미 예상하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궁을 던지듯 내려놓은 지온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자!”

    그에 시녀 셋이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아가씨, 선고님들을 구하실 생각이세요?”

    서아가 따라가며 얼른 물었다.

    “응.”

    대답한 지온이 입을 열었다.

    “어서 가야 해. 안 그럼 늦을 수도 있어.”

    의운이 의아하여 물었다.

    “왜 늦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지온은 빠르게 걸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청옥이나 함옥이나 둘 다 그럴 담이 없는 아이들이야. 그러니 분명 모함을 받은 거지. 선대 태자 전하의 위패로 거짓을 꾸며냈으니 사실이 밝혀지면 모함을 한 사람은 그 죄가 더 커질 거야. 그러니 저들은 분명 사건을 먼저 해결하고 다시 대장공주께 말씀을 드리려고 하겠지…….”

    입구에 도착하자 지온이 걸음을 멈추었다.

    “하로.”

    “네, 아가씨.”

    “가서 공주님을 뵙고자 한다고 하고, 이렇게 해…….”

    하로에게 귀엣말로 무언가를 속삭인 지온이 하로를 응시하며 말했다.

    “…할 수 있겠어?”

    잠시 고민하던 하로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저는 큰아가씨를 믿어요!”

    빙긋 웃은 지온이 다시 의운을 불렀다.

    “며칠 전에 우리가 만들었던 향수를 어디 뒀는지 기억해? 지금 바로 가지고 사방전(司芳殿)으로 우릴 찾아와.”

    “네, 아가씨.”

    의운이 대답을 하고, 시녀 두 사람은 날듯이 움직였다.

    끝으로 지온이 서아에게 말했다.

    “우린 사방전으로 가자.”

    * * *

    결국, 날이 밝았다.

    잠에서 깬 함옥은 작게 난 창을 우두커니 보고 있는 청옥을 발견했다. 그녀의 눈은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것인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사저, 안 잔 거야?”

    함옥이 물었지만, 청옥은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함옥아, 너 스승님 기억나니?”

    청옥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함옥이 되물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왜 그래?”

    “스승님은 참 좋은 분이셨어.”

    벽에 기대어 앉은 청옥의 음성은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스승님을 모시기 전에, 난 원래 주방에서 일을 했어. 그때 주방장이셨던 도주(都廚)가 아주 엄한 분이셔서 자주 욕을 먹었는데 한 번은 내가 벌을 받는 걸 스승님께서 보게 되셨어. 그리고 날 데려와 당신 곁에 두는 도동(*道童: 어린이 도사)으로 삼으셨던 거지.”

    청옥이 함옥을 바라보았다.

    “함옥아, 넌 네가 타고난 재능으로 스승님의 눈에 들었지만 난 그렇지 않았어. 너도 지난 9년간 내가 도법에 있어 얼마나 우둔한지 충분히 봤을 거라고 생각해…….”

    “사저!”

    함옥이 얼른 소리쳤다.

    “하지만 사저는 일을 잘하잖아, 난 그런 건 사저에 비할 수도 없단 말이야!”

    청옥이 빙긋 웃었다.

    “그건 내가 도법에 우둔한 걸 알고 있으니까 평소에 사람들과의 관계에 좀 더 신경을 썼던 것뿐이지. 너도 신경만 쓰면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어.”

    함옥이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청옥은 그녀의 말을 끊고 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스승님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셨어. 그래서 난 그동안 스승님께서 제 곁에 가까이 두고 키우신 제자가 마음이나 성정이 차갑고 박한 사람이란 것을 믿을 수가 없었거든. 그런데, 지난 며칠간 지 사저의 모습을 보니 이젠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너도 앞으론 뭐든 네 멋대로 하려고 하지 말고 지 사저 말을 잘 듣도록 해. 어려운 일이 있거들랑 가서 여쭤보고, 나에게 하듯 지 사저께 잘 해드려…….”

    “사저!”

    마치 유언을 남기는 듯한 말에 함옥이 당황하는 사이, 제 할 말을 다 한 청옥이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곤 문가로 걸어가 강하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주지를 뵙겠습니다! 자백하겠습니다!”

    “사저!”

    * * *

    능양진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청옥이 얼음장 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제가 했습니다. 스승님께서 궁관을 떠나 여행을 가신 후로 저는 관에서 늘 괴롭힘을 당해왔습니다. 그리 큰 오송원을 저와 함옥 두 사람이 청소하느라 매일 늦은 밤이 되어야만 거처로 돌아갈 수 있었고 심지어 식사조차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령당을 정리할 때 선대 태자 전하의 위패를 물통 속에 넣어 제 속에 있는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청옥의 말에 함옥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사저! 사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린 영령당엔 애초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 일을 어떻게 사저가 했다는 거야! 안 한 건 안 한 거지, 왜 하지도 않을 일을 인정해!”

    그리고 함옥은 그녀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청옥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청옥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백에 방해가 되니, 저 아이를 붙잡아 주세요.”

    그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총관선고가 손을 흔들자 명을 받은 둘이 달려 나와 함옥을 내리눌렀고, 청옥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튼, 이 일은 제가 했습니다. 함옥은 당시 영령당에 없어 사정을 몰랐습니다. 저는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겠으나 상관이 없는 이는 풀어줄 것을 지주께 간청 드립니다.”

    청옥이 몸을 엎드려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청옥이 홀로 죄를 뒤집어쓰고 자신을 풀어주려는 것을 알게 된 함옥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니에요!”

    가슴이 찢어질 듯한 함옥이 소리쳤다.

    “사저가 한 게 아니에요. 제가 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했는데, 사저가 저 대신 죄를 뒤집어쓰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 지주! 제발 제대로 살피셔서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지 않게 해주세요!”

    함옥의 말에 청옥이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쳤다.

    “함옥! 함부로 나서지 말고 있어! 내가 했으니, 내가 했다고 한 거지, 너처럼 바보 같은 아이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여? 너는 속에 불만이 있었으면 벌써 욕부터 했겠지!”

    “하지만 진짜 내가 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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