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9)화 (29/385)
  • 29화. 너희가 아니면 또 누가 있어!

    날이 어슴푸레 밝아 왔다.

    이미 일어나 소세(*梳洗: 머리를 빗고 낯을 씻는 일)를 마친 청옥과 함옥은 뜰 청소까지 마치고 오전 수업을 받으러 갔다.

    기분이 좋았던 함옥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청옥에게 말했다.

    “서아 낭자 정말 좋은 사람 같지? 분명 우릴 도와주려는 거면서 꼭 자기가 도움을 받는 것처럼 이야기하잖아.”

    청옥도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지. 하지만 주인의 말이 없이는 서아 낭자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야.”

    함옥이 청옥을 향해 얼굴을 찡그렸다.

    “은근히 돌려 말하지 않아도 돼. 나도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하는지 정도는 안단 말이야.”

    그리고 다시 두 사람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가 있지 않은가? 꼭 먹구름이 잔뜩 낀, 절망스러운 날만 있다가 한 줄기 서광을 만난 듯했다. 

    청옥은 생각했다. 

    ‘그래, 아직 세상이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었어.’

    청옥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편견을 가지지 말라고 전부터 네게 이야기했었잖아. 스승님께서 지 사저를 데려가신 건 사저와 관계없는 일이야. 그리고 스승님께서도 그렇게 가시고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실지 어떻게 아셨겠어?”

    능운진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함옥의 어깨가 금방 축 늘어졌다.

    “난 아직도 스승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우리에게 얼마나 잘 해주셨는지 다 기억하는데. 그리고 가시면서 주변 분들에게 우릴 잘 살펴달라고 당부도 하셨잖아.”

    그러나 이미 떠난 사람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그 후로 능양진인이 권력을 잡았고, 화옥이 세력을 거머쥐며 사람들은 천천히 능운진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함옥의 기운 빠진 모습에 청옥이 화제를 돌렸다.

    “아, 서아 낭자가 준 벌레퇴치용 환약은 챙겼어?”

    “챙겼어.”

    함옥이 허리에 걸어두었던 주머니를 끌러서 청옥에게 보였다.

    “여기!”

    그리고 함옥은 가만히 고민하더니 청옥에게 물었다.

    “사저, 서아 낭자가 우리보고 가면 안 되는 곳은 피하라고 했잖아? 그게 무슨 뜻일까?”

    청옥이 대답했다.

    “우리가 당하는 괴롭힘이 보였으면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도 예상했을 거야. 세가엔 이런 일이 많다고 하잖아. 아마 우리에게 위험한 일을 피해가라는 거겠지.”

    “아!”

    함옥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화옥 사저가 그 죄를 다 우리에게 덤터기 씌우겠네.”

    “그렇지…….”

    대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입을 꾹 닫은 채 들어가 열심히 오전 수업을 들었다.

    “저 둘이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지?”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제자도 역시 이상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제 돌아갈 때만 해도 울상이었는데…… 그 뒤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화옥이 곧장 지시를 내렸다.

    “가서 알아봐.”

    * * *

    오전 수업이 끝나고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오송원을 청소했다.

    그렇게 날이 까맣게 저물도록 청소를 하고서야 두 사람은 청소도구들을 정리하고 소원(小院)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아는 역시 그들을 위해 음식들을 남겨두었는데, 향긋한 것이 재당(*齋堂: 절 안에 있는 식당)의 요리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이틀을 그렇게 지내자 서로에게 익숙해진 함옥은 서아와 좀 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고 두 사람이 제 방으로 들어가기 전이면, 서아는 두 사람에게 벌레퇴치 환약을 꼭 챙겨 다니고 함부로 아무 곳이나 다니지 말라고 늘 당부했다.

    * * *

    지온이 머무른 지 셋째 날, 정오.

    다리 어귀에 무성했던 잡초 정리를 끝낸 함옥이 허리를 펴며 이마에 송골거리는 땀을 훔쳤다.

    “이제 거의 끝나간다. 남은 건 간단한 것들이니까 우리 먼저 가서 식사부터 하고 올까?”

    청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함옥뿐 아니라 청옥도 기대가 생겨 기분이 좋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건은 늘 그 후에 찾아왔다.

    두 사람이 재당에서 식사하고 있을 때였다.

    복식을 갖춰 입고 엄한 얼굴을 한 여도사 몇이 갑자기 재당에 들어와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청옥과 함옥이 어디 있느냐!”

    재당에 있던 수많은 여관들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젓가락을 든 청옥과 함옥 역시 놀라 얼떨떨한 얼굴로 여도사를 바라보자 가장 앞서 있던 여도사가 차갑게 일갈했다.

    “감히 선대 태자 전하의 위패를 쓰러뜨리고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있다니! 끌고 가라!”

    매우 놀란 청옥이 황급히 대답했다.

    “총관 사숙,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게 아닌지요? 저희는 태자 전하의 위패를 쓰러뜨린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총관선고는 냉소만을 흘렸다.

    “어디서 변명이야! 하려거든 주지께 가서 해라!”

    함옥이 펄쩍 뛰었다.

    “저희는 정말 안 그랬어요! 영령당(英靈堂)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위패를 쓰러뜨려요!”

    그러다 문득 서아가 연신 당부하던 말이 떠오른 함옥이 소리쳤다.

    “모함이죠?!”

    그러자 총관선고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시시비비는 주지께서 가리실 것이다. 너희들이 몇 마디 지껄인다고 의심을 벗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정말 너희가 하지 않았거든 그도 주지께 가서 이야기하거라!”

    “아니 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이미 다가온 여관들은 그녀들을 끌고 정전(正展)으로 향했다.

    * * *

    정전에 도착한 청옥과 함옥은 능양진인 앞에 꿇어 앉혀진 채 총관선고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주지, 저 둘이 오송원의 청소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능양진인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함옥은 소리부터 질렀다.

    “주지, 저희는 억울합니다! 저희가 오송원의 청소를 담당한 것은 맞지만 영령당엔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전하의 위패는 건드린 적도 없단 말입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냐?”

    총관선고가 함옥을 향해 호통을 쳤다.

    “오늘 오송원엔 너희 두 사람뿐이었는데, 너희가 아니면 또 누가 있어! 우리가 조금 전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들어가지 않았다면 너희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그때 어린 여관 하나가 물통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물통을 본 청옥은 매우 놀라고 말았다. 그 물통은 두 사람이 지난번 걸레를 빨기 위해 사용했던 물통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물통 안에는 더러운 물속에 금칠이 된 위패가 빠져있었고 위패엔 선대 태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위패를 건져낸 총관선고가 깨끗이 닦은 후 다시 보고를 올렸다.

    “주지, 저희가 도착했을 때 본 것이 바로 이 모습이었습니다.”

    청옥과 함옥을 향해 시선을 돌린 능양진인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느냐?”

    청옥이 소리쳤다.

    “저희는 정말로 하지 않았습니다! 실수로 위패를 넘어뜨렸다 하더라도 아무도 보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별일 없었다는 듯이 깨끗하게 씻어 다시 세워놓으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 아닙니까? 저희가 대체 무슨 이유로 증거를 그대로 두고 발견되게 만든단 말입니까?”

    “당연히 이유가 있지!”

    총관선고가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원망을 품고 있었던 게야. 그래서 일부러 이런 방법으로 분노를 푼 것이지. 네 말이 맞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 일도 아무 문제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너희는 식사를 하고 돌아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위패를 세웠겠지. 그러니 더욱 악독하단 것이다! 황가의 공양을 받으면서 선대 태자 전하의 위패로 이런 일을 벌이다니, 그 속내가 어찌 음흉하지 않다고 하겠느냐!”

    청옥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미 충분히 비참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진짜 괴롭힘은 바로 이런 거였어.’

    너무도 분명한 모함이었다.

    그것도 자신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모함!

    물통 속에 빠져있던 것은 선대 태자의 위패였고 조방궁엔 대장공주가 머물고 있었다. 만약 이 일이 대장공주에게까지 알려지고, 자신들이 고의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이 되면 어찌 되겠는가?

    ‘하찮은 목숨, 이어갈 수나 있을까?’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함이었지만, 잔인하고 악독했다. 상대는 자신들에게 심혈을 기울일 생각조차 없는 것이다. 애초에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이었으니까!

    ‘과연 우리가 우리의 결백을 밝힐 수는 있을까?’

    저쪽 편에 선 궁관의 모든 이들이, 자신들을 향해 너희가 한 짓이라 소리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화옥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화옥을 본 함옥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는지 소리쳤다.

    “너지! 분명 너야! 왜 우릴 못살게 구는데? 이미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괴롭고 비참한지 알아? 넌……! 악!”

    함옥의 말이 끝나기도 전, 이미 앞으로 나온 화옥이 그녀의 뺨을 잔인하게 올려붙였다.

    함옥의 볼이 금세 부풀었다.

    “사매!”

    매우 놀란 청옥이 황급히 함옥의 앞을 막아서자 화옥이 차가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저를 모함하다니. 죄를 더 추가하고 싶어?”

    그동안 괴롭힘을 당하며 힘들게 지내오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손찌검을 당한 일은 없었던지라, 함옥은 무어라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화옥을 쳐다보았다.

    풀썩, 무릎을 꿇은 청옥이 능양진인에게 매달렸다.

    “주지, 함옥이 철이 없어 그런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 일은 정말 저희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발,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다른 관리선고가 노기를 발하며 끼어들었다.

    “증거가 이리 눈앞에 있는데, 아직 이실직고를 안 해!”

    “이게 어찌 증거가 됩니까, 이게 어떻게요. 어떻게 증거가…….”

    청옥은 넋이 나간 듯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뭐라 제대로 된 근거를 대며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그렇게 혼란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 덩그렁 하고 경쇠가 울렸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고개를 든 능양진인이 눈을 빛내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장공주께서 선대 태자 전하의 위패를 이곳에 모신 것은 조방궁을 신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이런 일이 생겼으니 본좌가 대장공주를 뵐 면목이 없게 되었다. 총관은 너희들이 했다 하고, 너희들은 아니라 하며 서로 의견을 달리하니 엄밀히 조사하는 수밖에! 혐의를 벗기 전까지, 너희 두 사람은 정실(靜室)에 들어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거라!”

    * * *

    밤이 되었지만 와야 할 이들이 보이질 않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 서아는 자꾸 소원의 대문 밖을 오갔다.

    두 사람을 위해 남긴 음식도 모두 식어 버리고 시간은 다시 자야 할 때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청옥과 함옥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서아가 들어가 보고를 올리자 지온이 미간을 좁혔다.

    “벌써?”

    서아가 멈칫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그에 대답은 없이 지온이 다른 지시를 내렸다.

    “내일 가서 사매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봐. 하로가 세심하니, 하로와 함께 가는 게 좋겠다.”

    “네, 아가씨.”

    * * *

    정실(靜室)은 사실 조방궁에서 사람을 가둬두고 처벌을 할 때 사용되는 곳이었다.

    정실은 부들방석과 용변을 해결하는 간이 변기통 외엔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곳이었다.

    벽에 기대어 앉은 함옥은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에 손바닥 자국이 선명했지만, 바를 약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청옥이 조심스레 물었다.

    “함옥아, 많이 아프지?”

    깜박인 함옥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두 사람은 고생도, 괴롭힘도 같이 겪으며, 서로를 목숨처럼 아끼며 의지해왔다.

    함옥의 그런 모습에 청옥은 가슴이 아팠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입으로 건네는 위로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한 일이 아니니까 별일 없을 거야.”

    “사저!”

    함옥이 흐느꼈다.

    “위로할 필요 없어. 이번 일은 과거랑은 다르단 거 나도 안 단말이야. 악의로 태자 전하의 위패를 더럽힌 게 얼마나 큰 죄인데. 우리가 진짜 그랬다고 결정이 나면, 우린 죽을 거야.”

    “함옥아…….”

    “우리가 잘 지내는 게 왜 그렇게 싫은 걸까?”

    함옥이 훌쩍거렸다.

    “겨우 이틀 잘 지내나 싶었더니 화옥이 바로 우릴 모함했어. 그냥 괴롭히고 마는 것도 아니고, 이번엔 우릴 죽일 생각으로 이러는 거잖아. 아무리 싫어도 동문인데, 어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할 수 있는 걸까?”

    함옥의 질문에 청옥이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할 수 있었으면 그녀도 화옥과 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이란 소리가 아닌가?

    청옥은 함옥을 끌어안고 나약한 위로를 건넬 뿐이었다.

    그렇게 청옥의 품에서 울던 함옥이 물었다.

    “사저, 우리 진짜 죽게 된 거지?”

    한참을 말이 없던 청옥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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