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8)화 (28/385)
  • 28화. 세가의 소저는 그런 거 안 해

    연무장.

    사매들을 이끌고 권법을 수련하던 화옥이 고함을 질렀다.

    “정신 차려! 밥 안 먹었어?”

    어린 제자가 부족한 잠에 하품을 하며 불평을 쏟았다.

    “사저, 권법 수련은 왜 하는 거예요? 매일 경서나 읽고, 싸울 것도 아닌데.”

    불진(*佛塵: 중이나 도사가 번뇌 따위를 물리치는 표지로 쓰는 총채)으로 사매의 머리를 콩, 하고 때린 화옥이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밖에 나가면 왜 했는지 알게 될 거야. 스승님도 아침마다 일어나시면 먼저 권법 수련부터 하시는데 네가 뭐가 그리 억울하다고 그래? 누구는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제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야, 왜들 그래? 게으름 피우지 마라!”

    그때 제자 하나가 소리쳤다.

    “사저, 저기 좀 봐요!”

    화옥이 고개를 돌리자 단출하게 차려입은 소녀가 시녀 둘을 대동한 채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대사백의 그 사저 아냐? 보기엔 진짜 그냥 세가의 소저 같다!”

    “그러게. 사백을 따라다닐 때도 저랬을까?”

    “설마 그랬을까? 사백과 같이 다닐 땐 놀이도 아니고 고생스러운 여정이었겠지. 옆에서 시중드는 시녀도 없고.”

    “지난번에 너희들은 못 봤지? 막 돌아왔을 땐 저런 모습이 아니었어. 그냥 보기엔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니까?”

    “그럼 지금 왜 저러는 거래? 일부러 우리 앞에서 위세 부리는 건가? 그건 좀…….”

    사매들이 저들끼리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던 화옥의 눈썹이 역 팔자로 뒤집혔다.

    그들을 발견한 지온이 시녀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화옥 사저, 다들 이곳에 계셨군요.”

    화옥이 마주 인사를 했다.

    “사매도 권법 수련을 하려고?”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몸이나 풀어보려고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화옥이 눈 끝으로 그녀를 살폈다.

    걸음이 무척 안정된 것이 기본은 있는 듯했지만, 자세나 드러나는 움직임이 고수 같지는 않았다.

    순간 번득하고 머릿속에 생각이 스친 화옥이 입을 열었다.

    “마침 잘 왔어, 사매. 조방궁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난 분이 능운사백이셨으니 사매의 실력도 상당할 것 같은데. 한 수 보여주고 제자들의 눈도 넓혀 주는 게 어떤가?”

    지온이 슥, 둘러보곤 물었다.

    “화옥 사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권법인가요?”

    “당연하지.”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권법을 못 해서요.”

    화옥이 멈칫했다.

    제 스승이 가졌던 영광을 위해서라도 지온이 억지로 임할 것이라 생각했던 화옥은 지온이 이리 간단하게 거절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지온이 나긋나긋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 그런 걸 배우는 세가의 소저가 어디 있냐고, 무공을 하는 시녀를 찾으면 된다고 하셨거든요.”

    “…….”

    ‘그러니까, 지금 우린 시녀들이나 마찬가지라 이거지?’

    ‘말로 사람 치네?’

    화옥이 뭐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지온은 이미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럼 사저, 저는 이만.”

    그리곤 시녀를 이끌고 돌아서는 지온이었다.

    * * *

    지온이 떠나자 이곳은 폭탄이라도 터진 듯했다.

    “뭐라는지 들었지? 우릴 지금 시녀에 비교한 거잖아!”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다니!”

    “웃기지도 않아, 본인이 지금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니까! 관가에서도 우릴 보면 얼마나 예를 갖추는데!”

    “큰사저! 본때를 보여줘야 해요!”

    사매들의 흥분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옥이 차갑게 말했다.

    “다들 심심해? 말할 기운이 있는 걸 보니 오늘 수련이 부족한가 보네. 어서 가서 수련이나 해!”

    연무장에 아우성이 빗발쳤다.

    “사저!”

    그러나 화옥은 멀리 보이는 지온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가엔 차가운 냉소가 비쳤다.

    * * *

    한참을 망설이던 서아가 물었다.

    “아가씨, 화옥 선고를 싫어하세요?”

    활을 쏘는 궁장(弓場)에 온 지온이 근처에 놓인 궁을 들어 무게를 가늠했다.

    ‘역시, 힘이 좋은 신체야.’

    과거의 그녀는 궁을 이리 쉽게 들지 못했다.

    “날 먼저 싫어했거든.”

    서아가 흠칫 놀랐다.

    “그랬었어요?”

    지온이 시위를 당겨 탄력을 보곤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하로가 금방 눈치 좋게 화살을 찾아 그녀의 손에 얹어 주었다.

    “청옥과 함옥을 나와 함께 지내라고 보내 놓고 두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잖아. 그게 누구 보라고 하는 것 같아?”

    “하지만 아가씨, 화옥 선고가 시킨 것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주지가 직접 내린 명이야. 주변 사람들이 전혀 눈치를 안 볼 수가 있겠어? 배분이 높은 진인이 배분이 어린 두 사람을 괴롭히는 건 체면이 안 서. 배분이 어린 사람 중에선 주지의 대제자인 화옥만이 유일하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담력이 되는 것이고.”

    그녀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놓자 화살이 쌩, 하고 쏘아졌다.

    “텅!”

    화살은 정중앙에 있는 홍심(紅心)에 가서 박혔다.

    딸랑이를 잘 흔드는 의운이 당장에 환호성을 질렀다.

    “아가씨, 정말 대단하세요!”

    그저 웃음을 지은 지온은, 다시 손을 내밀어 화살을 받았다.

    군자라면 해야 하는 육예가 있으니, 이는 곧 예악사어서수라.(*君子六藝, 禮樂射御書數: 군자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여섯 가지 기예. 예학(예의범절), 악학(음악), 궁시(활쏘기), 마술(말타기 또는 마차몰기), 서예(붓글씨), 산학(수학))

    과거의 그녀도 활을 제법 쏘았다.

    ‘지 소저가 무예는 별로지만, 힘은 그래도 제법 수련을 한 것 같아.’

    화살을 쏘는 것이 본래의 몸보다 더욱 수월했다.

    한편, 하로는 지온에게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럼 아가씨 조금 전엔 일부러 화옥 선고를 화나게 한 거예요?”

    “그러게 누가 먼저 건드리라고 했나?”

    그 말을 끝으로 지온은 조용히 활쏘기에 집중했다.

    열 발을 모두 쏜 지온이 그제야 손을 내렸다. 서아가 건네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은 지온이 말했다.

    “앞으로 매일 아침 너희들도 나와 같이 수련해야 해.”

    시녀 셋의 얼굴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저희도 수련을요?”

    “전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걸요?”

    “그러니까 배우는 거지!”

    지온이 그들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내가 그리 말해 놨는데, 너희들이 나서서 내 체면을 떨어뜨리려고?”

    시녀들은 서로 끔벅이며 눈만 마주쳤고, 지온은 궁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연무장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가 높이 떠 뜨거워질 때가 되어서야 지온은 다시 시녀들을 이끌고 위세 넘치게 거처로 돌아갔다.

    * * *

    청옥과 함옥은 또다시 저녁을 굶었다. 두 사람은 어두운 밤하늘을 머리에 이고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청옥이 입을 열었다.

    “먼저 가서 먹으라니까, 말을 안 듣고는……. 이젠 먹을 찐빵도 없잖아.”

    함옥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사저 혼자 어떻게 두고 가.”

    청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라도 가면 그래도 한 사람은 배불리 먹을 수 있잖아. 그리고 몰래 찐빵 두 개만 남겨오면 나도 배 안 곪아도 되고.”

    그 말에 저도 조금 후회가 되는지 함옥이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내일은 가서 먹을게.”

    “그래.”

    두 사람이 소원에 돌아왔을 때, 시녀들은 안채를 정리하고 있었다.

    슬쩍 둘러본 청옥은 지온이 보이질 않자, 내심 안심했다.

    ‘다행이야, 사저에게 이런 초라한 모습을 안 보이게 돼서…….’

    그런데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서아가 웃으며 두 사람을 끌고 갔다.

    “드디어 오셨네요, 선고님들! 저희가 요리를 너무 많이 해서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몰라요. 도와주실 거죠?”

    그리곤 두 사람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채반에 있는 음식들 대부분을 모두 찬합으로 옮기더니 그들에게 밀었다.

    맛있는 냄새에 반지르르한 음식들을 보자 청옥은 저도 모르게 군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런데도 이걸 받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 뒤에 있던 함옥이 슬쩍 그녀를 찔러왔다.

    “사저…….”

    마음이 약해진 청옥이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서아가 환하게 웃었다.

    “오늘 선고님들께서 장원을 깨끗하게 정리해주셨잖아요. 사실 화초들은 저희 셋 모두 가꿀 줄을 몰라서, 혹시 선고님들께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그냥 부탁드리는 건 너무 죄송하니까, 앞으로 저희가 한 끼 식사를 해드리면 어떨까 하는데요. 저녁이면 좋을 것 같은데, 남은 재료를 모두 사용하면 상해 버리는 일도 없을 테고요.”

    청옥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함옥이 벌써 기쁜 얼굴로 물었다.

    “진짜요?”

    서아가 되물었다.

    “화초들은 가꿀 줄 아시는 것이지요?”

    함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조방궁에도 화초가 많고 오송원에도 별별 화초가 다 있어서, 우리도 자주 화초를 정리하고 가꿔요.”

    “그럼 정말 잘됐네요! 그럼 앞으로 화초들은 선고님들께 맡길게요!”

    * * *

    안으로 들어온 서아가 보고를 올렸다.

    “아가씨, 두 분께 모두 전했어요.”

    지온이 서책 한 장을 넘겼다.

    “응.”

    그런 지온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느낀 서아가 물었다.

    “아가씨, 두 분 선고님을 도우시는 건 무슨 계획에서인 건가요?”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다른 이들을 도운 이가 다른 이였다면 서아는 분명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아는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가 꼭 좋은 마음으로만 그리 한 것 같지가 않았다.

    서아의 물음에 서책에서 시선을 뗀 지온의 표정이 오묘했다.

    “자매의 우애가 깊어야, 더 참을 수 없게 되는 거니까.”

    지온이 다시 물었다.

    “왜 이렇게 늦게 돌아오는 거래?”

    서아가 대답했다.

    “청옥 선고께서, 요즘 두 분께서 하시는 일이 많아 모두 끝내고 나야 시간이 난다고 하셨어요.”

    “무슨 일인데?”

    “오송원을 청소하고 계신대요.”

    지온이 생각에 잠겼다.

    오송원에서는 제사를 지낸다. 그래서 조방궁의 진인들은 때마다 오송원에서 제를 올렸고 많은 향객들이 시주와 함께 오송원에 위패를 세웠다.

    “지금 오송원에 위패를 세우고 모시는 가문들이 어디지?”

    잠시 생각을 하던 서아가 입을 열었다.

    “꽤 많을 거예요. 도성에서 웬만큼 체면을 차린다 하는 집안은 모두 위패를 모셨으니까요. 몇 년 전엔 돌아가신 어르신께서도 이곳에서 제를 드렸었는데, 나중에 이노야께서 마음이 가장 중요한 거라고 취소하셨어요.”

    “오송원에 모신 분들 중에 가장 신분이 높은 분은 누구야?”

    이번엔 서아가 곧장 대답했다.

    “아마 선대 태자 전하이실 거예요. 대장공주께서 태자 전하께서 그리 비명에 가신 것을 안타까워하셔서 특별히 이곳에 위패를 모셨어요.”

    지온의 눈에 허전함이 스쳤다.

    “그분이시구나…….”

    서아는 아가씨의 말투가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그럼 선대 태자 전하의 위패는 따로 모시고 있겠네?”

    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러시지 않을까요? 저희가 오송원에 올 때마다 한 번도 못 봤으니까요.”

    “그곳도 사매들이 청소하는 장소 중 하나인가?”

    서아가 머뭇거렸다.

    “그것까진 저도 자세하게 물어보지 않아서요, 아가씨.”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서아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물어보고, 사매들에게 선대 태자의 위패가 모셔진 곳엔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전해. 혹시라도 그곳을 청소해야 한다면, 웬만하면 다른 이들을 보내서 하게 하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