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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27)화 (27/385)

27화. 미워하지도 못하게

등받이 없는 기다란 의자에 앉은 함옥은 씩씩거리며 화를 참고 있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돌아오니 사저의 앞에는 음식이 한 상 거나하게 차려져 있었지 않은가!

군침이 도는 향기에 배는 더욱 고파왔지만, 제 손에 들린 차게 식은 찐빵뿐이었다. 찐빵을 보니 보기만 해도 식욕이 싹 가셨다.

문가에 있는 주전자에 물이 바글바글 끓자 청옥이 그릇 두 개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잠시 생각을 한 청옥이 통 안에서 보리차 한 움큼을 꺼내 그릇에 넣었다.

“먹자.”

청옥이 보리차를 밀며 말했다.

“이러면 배는 찰 거야.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식사 시간에 늦지 않으면 돼.”

입을 꾹 닫은 함옥이 찐빵을 작게 조각내어 보리차에 담가 부드럽게 만들더니 억지로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차가웠던 찐빵이 보리차에 풀어지자 밀향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축축하게 젖어 흐물흐물해진 역한 식감뿐이었다. 먹기가 더 힘들어졌다.

참고 있던 함옥이 더는 못 견디겠다 싶어 입을 열려던 찰나,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고님들,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함옥이 조용히 신경질을 부렸다.

“짜증나게 왜 찾아오고 난리람!”

찻그릇을 내려놓은 청옥이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푸른 옷을 입은 시녀가 서 있었는데, 청옥의 기억에, 서아라는 시녀였다.

“폐를 끼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시녀는 주방에서 사용하는 작은 채반을 들고 있었는데 위에는 깨끗한 무명천이 덮여 있었다.

서아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자 성정이 온화한 청옥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사저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에요.”

서아가 채반을 안으로 슬쩍 밀어 문을 조금 열었다.

“다른 것은 아니고요, 저희가 훈둔을 만들었는데 너무 많이 만들어 다 먹지를 못해서요. 날이 더워 아무래도 내일까지 놔두면 안 될 것 같은데, 혹시 선고님들께서 저희를 도와 드셔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청옥이 멈칫했다.

젖은 천이 깔린 작은 채반 위로 훈둔에 들어가는 작고 귀여운 뽀얀 만두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청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서아는 더 묻지도 않고 그녀의 손에 채반을 밀어주곤 빙긋 웃음을 지었다.

“주방에 기름과 소금이 있으니 선고님들 편하게 가져다 드세요.”

그리곤 곧장 몸을 돌려 가버렸다.

* * *

서아가 제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청옥은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사저가 자신들을 위해 이 작은 훈둔 만두들을 전해준 것이다.

함옥이 다가왔다.

“뭔데?”

채반을 함옥에게 건넨 청옥이 질항아리를 꺼내어 대충 헹구곤 작은 화로 위에 올려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훈둔은 만두가 작아 금방 익어. 조금만 있으면 먹을 수 있을 거야.”

함옥도 이미 음식을 본 뒤였다.

채반을 든 함옥은 입을 벙긋거리며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온갖 감정들이 올라와 차마 말을 꺼내질 못했다.

금방 끓은 물에 훈둔 만두가 조르르 들어갔다.

이윽고 뜨거운 물과 함께 만두들이 오르내리며 함께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기쁨도 넘쳤다.

소금은 주방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녀들의 서랍 속에도 있었다.

밥을 굶은 것이 처음이 아닌지라, 가끔 궁을 나설 때 몰래 말린 국수를 사와 숨겨두곤 했던 것이다. 그저 궁을 나설 기회가 많지 않고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았던지라, 그렇게 숨겨 둔 비상식량들은 금방 사라졌을 뿐이었다.

훈둔 두 그릇이 금방 탁자 위에 차려졌다.

넣은 것은 소금뿐이지만, 만두에 들어간 속 재료들이 워낙 신선하고 좋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에도 코가 즐거웠다.

“먹어.”

청옥이 젓가락을 건네자 조용히 건네받은 함옥이 만두를 들어 입으로 쏙 넣었다. 신선한 고기와 냉이의 향긋함이 혀끝부터 밀려들었다. 그릇을 들어 뜨끈한 국물을 한 모금 마시자 뱃속이 다 편안해졌다.

두 수저를 뜬 청옥은 문득 함옥이 움직이질 않자 고개를 들었다.

함옥은 울고 있었다.

눈에서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그릇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왜 그래?” 

얼른 손수건을 꺼낸 청옥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먹을 게 생겼는데 왜 울어? 뭐가 슬프다고.”

그녀의 말에 함옥의 눈물은 더욱 거세게 흐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함옥은 젓가락까지 내려놓고 탁자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청옥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래그래, 괜찮아.”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숨을 고른 함옥이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왜 저러는 건데? 우리가 너무 불쌍해 보이니까 시주라도 하는 거야, 뭐야? 우리가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멀쩡하게 스승님과 잘 지내고 있었는데 저 여자가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잖아! 그래서 스승님이 우릴 두고 가신 건데, 안 그랬으면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이겠냐고!”

청옥이 한숨을 내쉬었다.

“함옥아, 우리에게 일을 많이 넘기고 밥도 제때 못 먹게 한 사람은 사저가 아니야.”

함옥은 씩씩거렸다.

“겨우 훈둔 한 그릇에 마음이라도 넘어갔어? 저 여자가 우리 자릴 차지하는 바람에 우리가 이렇게 비참해진 거잖아!”

청옥은 더 반박하지 않고 그녀가 그대로 감정을 풀어내게 두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스스로 감정을 추스른 함옥이 조용히 뇌까렸다.

“정말 싫어! 미워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도 다 싫어!”

* * *

아침.

문을 연 서아는 매우 놀랐다. 문 앞에 신선한 채소와 과일, 고기와 물고기가 든 광주리가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먼저 가져다 놨지?”

서아보다 일찍 일어난 의운이 뜨거운 물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선고님들이 새벽같이 가져다 놓으신 거야. 그리고 뜰도 두 분이 모두 청소하셨어.”

“어라?”

서아가 달려나가서 확인하니 역시나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아가씨, 진짜예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던 지온이 그들의 말에 빙긋 웃음을 지었다.

“보은을 아는 것이지.”

서아가 다가와 그녀의 단장을 도왔다.

“조방궁도 식사는 별거 없나 봐요, 아가씨. 그렇게 딱딱한 찐빵을 어떻게 먹으라고. 그런데 조방궁에 돈이 많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가씨?”

황가의 궁관이니 황가에서 내린 밭도 있을 것이고, 향을 올리러 오는 향객들의 시주도 적지 않을 터였다.

어떤 궁관의 전각들도 조방궁처럼 화려하게 관리되지는 않았다.

지온이 대답했다.

“조방궁이 돈이 많은 것이지, 두 사람이 돈이 많은 것은 아니잖아. 향객이 주는 시주는 평범한 여관들의 주머니까지 오지는 않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식사까지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 텐데 말이에요.”

“그렇지.”

지온이 동의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 너무한 거야.”

의운이 끼어들었다.

“전에 집에 있을 때, 하녀 하나가 주방을 관리하는 이모님께 밉보이는 바람에 일부러 굶긴 일이 있었거든요. 조방궁처럼 선기가 철철 흐르는 곳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네요.”

지온이 웃었다.

“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다를 것도 없는 것이지.”

* * *

식사를 마친 시녀들이 재잘거리며 어제 받은 선물들을 꺼내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게 대장공주께서 내리신 주머니야? 수놓은 것 좀 봐, 정말 예쁘다.”

“그러니까! 내가 보니까 못해도 기법이 대여섯 가지는 쓴 것 같아. 여기, 여기 좀 봐…….”

“안에 든 건 향환인가?”

“응, 어제 그분이 그렇게 말했어.”

“음? 이건 우리 향환 아냐? 의운, 네가 몰래 바꾼 거 아냐?”

“아냐!”

의운이 억울한 듯 말했다.

“갔다 와서 그대로 놔두고 건드리지도 않았어. 그리고 대장공주께서 내리신 건데, 내가 그렇게 사리분별을 못하려고?”

“하지만, 이건 진짜 우리 건데…….”

지온이 손에 들었던 서책을 내려놓고 시선을 돌렸다.

“좀 보게, 가져와 봐.”

하로가 얼른 주머니를 건네자 지온이 향환을 손으로 비벼 으깨곤 향을 맡았다.

“내가 만든 게 아냐. 한 가지가 달라.”

시녀들이 얼른 다가와 다시 향을 맡아보자, 역시 약간 차이가 느껴졌다.

지온이 만든 것이 좀 더 연하고 초목(草木)향에 가까웠다면 대장공주가 내린 향환은 좀 더 향이 진했고 꽃 향에 가까웠다.

“이건 제조법이 같은 거죠?”

하로가 말했다.

“아가씨, 우리가 대장공주님과 똑같은 향을 사용하고 있던 거였어요!”

그러나 지온의 얼굴엔 조금도 즐거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 제조법은 자신이 직접 고대의 제조법을 개량해서 만든 것이었다. 더구나 누구에게도 알려준 일이 없었는데, 대장공주께서 어떻게 같은 향환을 사용하고 있단 말인가?

외부로 발설이 되었다면, 3년 전 그때 그리되었을 터였다.

‘누가 무애해각에서 이 제조법을 얻어 대장공주님께 바친 건가? 그런데 무애해각은 다 타버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이 제조법을 찾아냈단 거지…….’

“아가씨, 왜 그러세요?”

서아는 떨리는 마음으로 지온을 살폈다.

‘아가씨 표정이 너무 무서워.’

지온이 침착하게 향환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너희들 시간 있을 때, 이 향환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봐.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향환이 대장공주께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해선 안 돼. 알겠지? 그건 좋지 않아.”

저들끼리 서로 시선을 마주친 시녀들이 조용히 대답했다.

“네…….”

주머니를 내려놓은 지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나가서 몸을 좀 써야겠어.”

* * *

오전 수업을 마친 청옥과 함옥은 미처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사무를 맡아보는 총관선고였다.

“곧 청명이 되면 궁관에 향과 제를 지내러 오는 향객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가서 오송원(五松園)을 정리하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거라.”

함옥이 되물었다.

“저희 둘 만요?”

“아니면?”

“오송원이 그렇게 큰데 어떻게…….”

그러자 상대가 기분이 상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당장 정리를 끝내란 것도 아니고, 청명까지 아직 며칠이나 남지 않았느냐! 관중에 다른 이들은 모두 일이 있어 손이 없는 것을 어찌해!”

함옥이 다시 무어라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청옥이 그녀를 뒤로 당기곤 먼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총관 사숙.”

그제야 총관선고가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제대로 하거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네, 사숙.”

* * *

두 사람은 빗자루와 물통을 들고 오송원으로 향했다.

의기소침한 함옥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자 청옥이 작은 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아직 며칠이 남은 건 사실이잖아. 우리가 조금만 열심히 하면 될 거야. 너도 싸워봐야 아무 소용없는 거 알잖아…….”

“알아…….”

함옥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한두 번도 아닌데.”

청옥은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판에 박힌 위로는 수도 없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말없이 길을 가던 중, 함옥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사저, 요즘 또 시작된 것 같지 않아?”

“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청옥이 되물었다.

“화옥 사저가 우릴 싫어하는 게 하루 이틀 된 일은 아니잖아. 스승님께서 떠나셨을 때 온갖 핑계로 우릴 괴롭혔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본인도 재미가 없어졌는지 나중엔 우리한테 별로 신경 안 썼잖아.”

가만히 생각하던 청옥이 대답했다.

“그랬지.”

초반엔 서로의 신분이 엇비슷했다.

화옥은 능양진인의 제자였고, 자신들은 능운진인의 제자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능운진인이 큰제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화옥보다 더 체면이 섰었다.

그러나 그들을 받쳐주던 스승님이 사라지고, 화옥이 순조롭게 주지의 큰제자가 되며 서로의 지위는 점점 더 벌어졌다. 그런 상황이 되자 화옥도 눈이 높아져 그들을 괴롭히는 것에 흥미를 잃었던 것이다.

요즘은 힘들어 봤자, 궁관에 있는 기회주의자들에게 조금씩 괴롭힘을 당하는 것뿐이었다.

“근데 다시 괴롭히기 시작한 것 같아. 어제는 밥도 못 먹게 하더니, 오늘은 또…….”

곤란한 상황이 이리 자주 찾아왔던 것은, 이미 꽤 오래전 일이었다.

청옥이 고개를 돌려 함옥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함옥이 입술을 비틀었다.

“내 생각에, 지…… 지 사저를 보고 오래전에 잊었던 원한을 다시 떠올린 것 같아.”

그 말에 청옥이 황급히 대꾸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저완 관계없는 일이니까, 괜히 사저에게 화내지 마.”

오송원에 도착한 함옥은 수통을 내려두고 조용히 비질을 시작했다. 그러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저에게 괜히 화 안 내. 어제는 너무 슬퍼서 그랬던 거야.”

그리고 잠시 머뭇거렸던 그녀가 다시 말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앞으로 화옥 사저가 주지가 되겠지? 그럼 우린 평생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 걸까?”

청옥은 그저 위로밖에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우리가 좀 더 크면 여행을 신청해서 떠나면 돼. 그럼 괴롭히지 못하겠지.”

함옥은 여전히 슬픔에 겨웠다.

“매일 이런 잡무에 시달리는데 언제 경서들을 연구해? 스승님께서 계실 적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권법을 수련하고 밤엔 독경을 했잖아. 지금은 권법은 고사하고, 독경할 시간도 없는걸. 두 가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나가지도 못하는데…….”

‘게다가 집에 가면 깜깜한 밤이고 등유도 정해진 양이 있는데 그럴 상황이 되겠어?’

생각을 멈춘 청옥이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빽빽하게 두른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맑은 하늘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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