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6)화 (26/385)

26화. 차게 식은 찐빵

청옥과 함옥은 오전 수업을 받으러 간 상태였다.

출가한 이들은 아주 바빴다. 오전엔 오전 수업이 있었고 저녁엔 저녁 수업을 들어야 했다. 거기에 궁관(宮觀)도 청소하고 향을 올리러 오는 향객도 맞아야 했다.

하지만 수업에 참여하라며 지온을 부르러 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녀가 진짜 수행을 하려고 왔을 것이라 믿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 * *

식사를 마친 지온은 창가에 앉아 서책을 읽었다.

서책 겉장에는 ‘청낭경(靑囊經)’이라 적혀 있었는데, 이것은 돌아가신 지 노야의 책궤에서 찾은 것이었다.

하로와 의운이 들어와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응.”

대답은 했지만, 지온은 한쪽을 마저 다 읽은 후에야 서책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어머니께서 준비해주신 선물들을 정리해서 대장공주님과 다른 진인(眞人)분들께 모두 가져다 드려.”

“네, 아가씨.”

대부인, 정씨는 떠나기 전에 풍족할 만큼의 선물을 준비해주었다.

조방궁에 사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대장공주를 제외하고도 선제의 비빈들이 몇 있었고 지난 세대의 진인(眞人)들도 있었다.

이렇게 선물을 준비한 비용만 하더라도 꽤 큰돈이 들었을 테지만, 정씨는 그 비용에 대해서는 지온에게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즉, 이 선물들은 정씨의 돈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지온이 알기로, 집안의 장남인 지온의 아버지가 물려준 개인재산 대부분이 제 손에 있었다. 남은 재산이 있더라도 후처인 정씨에게 남긴 것은 많지 않았을 터인데, 그랬다면 차남가가 이미 예전에 눈이 벌게져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난번 차남가가 지온과 부딪혀 여러 가지로 그녀를 힘들게 했을 때도 정씨는 제 돈을 들여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기까지 했다.

후처로 들어온 계모가 이렇게까지 하니 흠잡을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지온은 정씨가 자신을 급하게 내보낸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가문에 머무르며 일을 벌이는 게 싫었던 걸까? 아니면 지씨 가문이 머물기 좋은 곳이라 생각지 않아서?’

정씨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인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지온이 그녀의 말에 따른 것은 지금은 좋은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눈앞에 있는데 그녀에게 정신을 분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 * *

귀한 손님에게 강경(*講經: 경을 강독함)을 마친 화옥이 전 밖으로 나오자 푸른색 옷을 입은 시녀 두 사람이 무언가를 들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화옥이 당직을 서는 여관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지씨 가문의 시녀 같은데, 어디 가는 거야?”

선고가 그녀에게 인사를 올리곤 대답했다.

“대장공주님과 진인(眞人)들께 선물을 드린다던데요? 들리는 말론, 선물을 무척 공들여 준비했다나 봐요. 대장공주께서 향환까지 내리셨대요.”

화옥의 미간이 좁아졌다.

“대장공주께서 저들을 만나신 건 아니지?”

여관이 웃음을 지었다.

“대장공주께서 직접 만났을 리가 있겠어요? 저희가 가서 한참을 기다려도 뵙지를 못하는데요.”

화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대장공주를 찾아갔단 소리에 이유 없이 심장이 쿵쿵 뛴 것이다.

냉정함을 되찾고 가만히 생각해봐도 자신이 왜 이러는 것인지 화옥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스승님의 큰 제자인 자신은 앞으로 주지 자리를 계승할 사람이 아닌가?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 여자가 대장공주를 뵈면 또 어때서? 그래 봤자 아무런 영향도 없을 텐데.’

그저 그 여자가 싫은 것이 이유가 아니겠는가?

스승님의 사백인 능운진인은 사조(師祖)의 진전을 이은 두 명의 적전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순서로 따지자면, 사실 이 조방궁의 주지 자린 본래 사백이 계승 받아야 옳았다.

그러나 사백 스스로 주지 자리를 마다하는 바람에 제 스승인 능양진인이 주지가 될 수 있었다.

화옥은 대여섯 살 때부터 스승님을 따랐기에 누구보다 어찌 된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스승님께서 말을 하시진 않지만, 스승님의 마음엔 여전히 풀지 못한 사백에 대한 매듭이 있었다.

자신이 스승님의 적전제자고, 지씨 가문의 그 여자가 사백의 적전제자니 서로가 맞수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물론 지금의 지 소저는 내 맞수라는 소리조차 과분하지만!’

* * *

“사저, 빨리 좀 걸어!”

함옥이 달려가며 뒤를 향해 외쳤다.

청옥은 함옥을 따라 속도를 높이며 대답했다.

“천천히 가! 사람들한테 부딪히지 말고!”

“더 천천히 가면 늦는단 말이야!”

함옥의 다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급히 서두른 두 사람이었지만, 재당(*齋堂: 절 안에 있는 식당)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재당(*齋堂: 절 안에 있는 식당)엔 나이든 여도사 두 사람만이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 밥 남았나요?”

함옥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물었지만, 여도사 두 사람은 손을 멈추지도 않고 차게 대꾸했다.

“지금 왔는데, 어찌 밥이 있어? 없다!”

그 소리에 함옥은 마음이 달았다.

“사저님들, 저희가 당직을 서느라 늦은 것이니 사정을 좀 봐주실 수 없을까요?”

그러자 여도사 두 사람이 눈을 까뒤집었다.

“당직은 너희만 서고 다른 이들은 안 선다는 것이냐? 감원(監院)에서 몇 번이나 강조하지 않았어? 모든 일엔 규율과 법도가 있다. 식사와 학습, 청소 모두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너희들이 지키지 않아놓고 누굴 원망하는 것이냐!”

“하지만…….”

청옥이 그녀를 말리며 두 여도사에게 얼른 인사를 했다.

“사저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가 시간을 놓친 것이지요. 그저 밤을 보내기가 어려워 그러니 식은 만두라도 두 개 있으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배만 채우면 됩니다.”

청옥의 말에 여도사 중 하나가 그제야 손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소쿠리를 하나 들고 나왔다.

“남은 건 이것뿐이다.”

함옥이 얼른 보자 소쿠리 안에 남은 것이라곤 찐빵뿐이었는데, 그것도 다들 누가 반쯤 먹고 남긴 것들이었다.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함옥이 뭐가 입을 열기도 전에 청옥이 선수를 쳤다.

“감사합니다, 사저!”

그리곤 소쿠리 안에서 그나마 괜찮은 찐빵을 골라냈다. 그리곤 연신 감사하다 전하며 함옥을 끌고 재당을 나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두운 밤을 걸어 조용히 거처로 향했다.

말없이 걷기만 하던 함옥은 서러움이 복받쳤는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사저, 우리가 뭘 잘못했어? 뭘 잘못했다고 늘 이 모양 이 꼴이야? 우리가 일부러 시간을 안 지킨 것도 아니잖아. 일이 너무 많아서 다 끝내고 나면 이 시간인데, 우리가 무슨 수가 있다고 이러냐고!”

청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가 스승님의 제자인 걸 어쩌겠어.”

차라리 말이나 말지, 청옥의 말에 함옥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스승님이 떠나실 때 우리가 겨우 몇 살이었는데! 좋은 건 하나도 없고 나쁜 것밖에 없잖아! 스승님이 우릴 안 데려가시는 바람에 우린 적전도 아니게 됐는데, 대체 왜 그러셨냐고!”

청옥 역시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왜 그러셨을까? 근데 지금에야 그런 걸 생각해봐야 그건 또 무슨 소용이지?’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이미 익숙해진 그녀였다.

* * *

어렵사리 함옥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쯤, 소원(小院)의 등불 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향긋한 음식 냄새와 함께 즐거운 듯 재잘거리는 시녀들의 음성이 뒤따랐다.

“아가씨,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 맛이 어떠세요?”

“그래도 제가 만든 게 더 맛있죠! 아가씨, 이걸로 드세요!”

그리곤 지온의 웃음이 밴 음성이 들려왔다.

“싸우지 마, 다 맛있어.”

차게 식은 속 없는 찐빵을 안고 있던 청옥과 함옥은 남은 입맛마저 사라졌다.

서아가 고개를 들자, 장원 문 앞에 선 청옥과 함옥이 눈에 들어왔다.

“선고(*仙姑: 여도사를 부르는 호칭)님들, 오셨어요?”

그녀가 나가 울타리 문을 열며 물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함께 드시겠어요?”

함옥이 입술을 꾸물거렸지만,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청옥이 말했다.

“아니에요, 우린 먹었어요.”

그리곤 먼저 회랑 아래로 들어가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서 지온에게 인사를 했다.

“사저.”

젓가락을 내려놓은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매들도 모두 고생했어요.”

청옥은 감히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세가에서는 요리에 매우 정성을 쏟는다더니, 맛있는 냄새가 막을 새도 없이 콧구멍 사이로 밀려 들어왔다.

반나절을 굶은 터라 곧 침이라도 주륵하고 흘러내릴 것만 같았던 청옥은, 추태를 부릴까 싶어 얼른 다시 인사를 했다.

“달리 시키실 일이 없으시면 저흰 먼저 들어가 볼게요, 사저.”

그리곤 함옥을 이끌고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서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왜 그러시지? 꼭 우릴 일부러 피하시는 것 같잖아?”

의운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알 게 뭐야. 어차피 우리가 두 사람에게 부탁해서 밥 먹는 처지도 아니고.”

하로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두 사람이 모두 방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나랑 의운이 선물을 전하러 갔잖아. 그런데 좀 이상하더라? 조방궁에 있는 여관들이 아무래도 우릴 적대하는 것 같더라고.”

그러자 서아가 얼른 되물었다.

“뭐? 우리 아가씨가 뭘 어쨌다고?”

지씨 가문에 그 난리가 난 것은 그저 서로의 이익이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혼사를 두고 그랬고 그 후엔 재산을 두고 그랬다.

그러나 조방궁에서는 그런 일 따윈 없지 않았던가?

“모르겠어, 아무튼 우리가 대장공주께 찾아갔을 때 몇 사람이나 그걸 지켜보고 있더라니까?”

하로 역시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순 없었지만, 환영하는 곳 하나 없이 모두에게 배척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우리가 외부인이라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의운은 하로만큼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는지라 그저 상식선에서 추론할 뿐이었다.

“아가씨께서 진인의 제자이긴 하시지만, 하루도 조방궁에 머무르셨던 적이 없잖아. 그러니 외부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

하로가 지온에게 물어보려 그녀를 보았는데, 지온은 문 근처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지온이 손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저게 뭐지?”

서아가 다가가 주워든 것은 찐빵이었다. 이미 차게 식어 딱딱해져 버린, 속 없는 찐빵.

“이게 어디서 온 걸까요? 오늘 저희 찐빵은 안 먹었는데?”

지온의 시선이 곁채로 향했다.

자신들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청옥과 함옥의 것일 터. 그제야 서아는 상황을 깨달았다.

“선고(*仙姑: 여도사를 지칭함)들께서 남겼다가, 저녁에 드시려고 가져오신 건가? 그런데 이렇게 딱딱한 걸 어떻게 드시려고 그랬지?”

가만히 생각한 지온이 입을 열었다.

“오늘 만들었던 훈둔(*馄饨: 각종 재료를 넣고 빚은 작은 만두를 넣고 끓인 탕) 아직 다 안 먹었지? 이대로 밤새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서아, 넌 두 분께 찐빵을 가져다주며, 훈둔을 먹는 걸 도와주실 수 있겠냐고 전하고 와.”

“네.”

서아가 대답했다.

“아가씬 참 마음도 고우세요.”

빙긋 웃은 지온은 식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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