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5)화 (25/385)
  • 25화. 대갓집 규수 나셨네

    조방궁이 생긴 것은 백 년 전이였다.

    서융(西戎)의 왕자가 먼 길을 달려 대순까지 찾아와 강양공주에게 청혼을 하였다.

    예뻐하던 강양공주(江陽公主)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태종(太宗)은 조방궁(朝芳宮)을 만들어 선포하고 그녀를 출가시켰다.

    황제로부터 크게 총애를 받았던 강양공주는 그 성격이 오만하고 횡포했다. 본래 시늉만 하려던 출가였지만, 그 안에서 진짜 도를 깨달은 그녀는 그대로 진짜 출가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백여 년이 흐르는 동안 후궁의 비빈들과 황궁의 공주들은 조방궁에서 자주 도를 닦았다. 그렇게 조방궁은 지금까지 세가 기울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조방궁에는 황실의 사람이 하나 있었다.

    여양대장공주.

    그녀는 선제의 하나뿐인 누이였다. 선제가 살아있을 땐 그녀를 무척 아끼고 귀하게 여겨, 조정의 일에도 그녀와 의견을 나눌 정도였다.

    그러나 3년 전에 부마와 혈육인 황제가 모두 죽음을 맞이하여 큰 충격을 받은 대장공주는, 조방궁으로 출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장공주는 조방궁에서 수행하며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경외했다.

    * * *

    지씨 가문의 마차가 조방궁 패방(*牌坊: 명패가 붙은 장식용 건물) 아래 멈춰 섰다.

    두 명의 여관이 석재 계단 앞에 서 있었다.

    앞서 있는 이는 스물두, 세 살쯤 되어 보였는데, 순한 외모로 다소곳하게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뒤에 있는 이는 열일곱이나 여덟쯤 되어 보였는데, 몰래 마차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호기심과 옅은 질투가 느껴졌다.

    마차에서 사람이 내리길 기다린 두 사람이 동시에 예를 갖췄다.

    “사저를 뵙습니다.”

    지온이 마주 예를 갖췄다.

    “이리 나와 맞아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지온은 잠시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사매는 도호가 어찌 되나요?”

    지 소저가 능운진인의 유골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지 소저는 저들을 본 적이 있었다. 다만 당시 지 소저는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던지라 기억이 흐릿하게 남은 것이다.

    어린 여관이 그 소리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다른 여관이 공손하게 대답해주었다.

    “저는 청옥이고 저 아이는 함옥입니다. 스승님께서 궁에 계실 적엔 저희가 스승님을 수발했습니다.”

    “아…….”

    지온의 머리에 기억이 떠올랐다.

    저 둘은 능운진인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데리고 다니던 도동(*道童: 어린이 도사)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스승과 아주 가깝지는 않았던지라 일부러 정식제자인 지온을 사저라 부르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 두 사람이 지온을 데리고 위로 오르며 말하기 시작했다.

    “주지께서 사저가 돌아오신다는 소식에, 스승님께서 지내시던 거처를 새로 정리하라고 직접 말씀하셨어요. 이제 정리가 모두 끝났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저희 둘도 같이 넘어와 사저와 함께 지낼 거예요.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하세요. 궁은 아무래도 저희가 더 익숙하니까요.”

    “아, 사저는 피하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음식이나, 사용하는 것 중에 있으면 이야기해주세요.”

    청옥은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왔는데, 익숙해 보이는 것이 손님을 맞아 본 일이 있는 듯했다.

    지온이 대답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머물 곳만 있으면 충분하고, 나머지는 내 시녀들이 있으니 번거롭게 해주지 않아도 돼요. 아, 능양 사숙께서는 어디 계신가요? 먼저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은데…….”

    * * *

    청옥은 다시 지온을 데리고 뒤쪽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능양진인은 지온을 만나지 않고 여관만 따로 보내어 말만 전했다.

    “스승님께서 대장공주님과 도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계셔서 뵐 틈이 없을 것 같다고, 사매께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궁관에서 지내라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진짜 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은 명확하게 지온에게 전해졌다.

    “더 귀찮게 하면 안 되겠네요. 이건 제 마음이니, 사저께서 대신 받아 전해주세요.”

    지온의 말에 시녀들이 미리 준비해둔 선물을 가지고 나왔다.

    어찌나 많은지, 다른 여종까지 불러야 겨우 다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화옥이라 불리는 여관이 웃음을 지었다.

    “사매가 이리 신경을 써주었는데 받지 않는 것도 실례겠네.”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나눈 지온은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갔다.

    도우러 왔던 다른 여관이 입을 열었다.

    “사저가 꽤 예의를 잘 지키지 않아요? 전보다 엄청나게 나아졌네요. 어른들에게 지적받고 많이 깨달았나? 여긴 다 뭐가 들었어요? 스승님께 보내는 거예요?”

    화옥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불진(*佛塵: 중이나 도사가 번뇌 따위를 물리치는 표지로 쓰는 총채)으로 옷감을 한 조각 들어 올렸다.

    색이 산뜻하면서 가볍고 얇은 것이 여름용 도포로 만들기에 아주 적합했는데, 화옥은 무시하는 얼굴이 확연했다.

    “우리가 이따위 것들이 부족할 거라 생각한 건가? 스승님께 보일 필요도 없으니 너희들이나 가져가라.”

    다른 여관들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고맙습니다, 사저!”

    물건은 적지 않았다. 옷감부터, 약재, 찻잎까지…….

    다른 여관들은 주지의 제자인 화옥과 비교할 정도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비록 평소 생활하는 것에 부족한 것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물건들을 가질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던 것이다.

    * * *

    지온은 능운진인이 풍족하고 여유롭게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지 소저의 기억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능운진인의 거처는 역시나 규모가 작은 소원(小院)이었지만, 그래도 수리가 잘 되어 사람이 머무르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아가씨, 먼저 앉아 계세요.”

    집 앞에는 개울이 흘렀고, 나무 그늘엔 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도 있어 맑고 상쾌한 분위기가 흘렀다.

    시녀들은 집으로 들어가 물건들을 정리했는데, 먼저 간식과 차부터 준비해 올린 서아가 지온에게 잠시 앉아 기다리라 말했다. 그리고 청옥과 함옥도 불렀다.

    “선고(*仙姑: 여도사를 부르는 호칭)님들, 저희 아가씨와 함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러자 화들짝 놀란 청옥이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저희도 도울게요. 그럼 더 빨리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서아가 그녀를 붙들며 웃었다.

    “선고께선 저희 아가씨의 사매시잖아요. 어떻게 누를 끼치겠어요? 별것도 아니라 저희끼리 해도 금방 끝나니 잠시만 앉아 계세요.”

    “사저.”

    함옥이 청옥의 소매를 슬쩍 당기며 그녀를 부르자 그제야 청옥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럼 부탁해요.”

    청옥과 함옥 두 사람은 자신들이 배치한 물건들의 위치를 시녀들이 이리저리 바꾸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정리가 끝나자 서아가 다가와 물었다.

    “선고, 저희 식사는 어디서 하나요?”

    청옥이 대답했다.

    “궁에 식당이 있어서 저희는 평소에 그곳에서 먹어요. 사저가 혹시 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 저희에게 이야기해줘요. 그럼 우리가 가서 세 끼를 받아 오면 돼요.”

    서아가 지온을 바라보자 지온이 물었다.

    “여기 작은 아궁이가 있나요?”

    “찻물을 끓이는 곳이 있어요.”

    서아가 가서 보고는 돌아와 말했다.

    “아가씨, 아궁이 두 개가 있으니 조리할 수 있을 거예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직접 해 먹자.”

    그리고 다시 청옥과 함옥에게 물었다.

    “사매들도 같이 식사할래요?”

    그러자 청옥이 황급히 대답했다.

    “낮엔 저희도 할 일이 있어, 오가기가 쉽지 않아서요.”

    지온도 더 권하지 않고 조금 대화를 나누다 먼저 쉬겠다며 들어갔다.

    * * *

    방으로 돌아온 함옥이 작게 불평했다.

    “대갓집 규수 나셨네. 직접 식사를 만들어 먹겠다질 않나, 우리가 정리해놓은 물건들은 다 필요 없고 자기가 가져온 것만 쓰겠다잖아!”

    청옥이 한마디 했다.

    “진짜 대갓집 규수 맞아. 우리랑은 다르지.”

    “전에 스승님과 계속 떠돌아다녔잖아! 그럼 다 본인이 직접 했을 거면서 이제 와서 무슨 규수 흉내야?”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함옥이 씩씩거렸다.

    “대갓집 규수로 살고 싶었으면 그때 왜 우리 스승님을 따라나서냐고! 아니었으면 스승님이 우릴 데려갔을 텐데!”

    그 생각이 떠오르니 청옥도 한숨이 나왔다.

    “우리에게 그만한 운이 없었던 거지, 남을 탓할 게 아니야.”

    * * *

    소원(小院)에서 있었던 일을 건너들은 화옥은 스승님과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세가의 소저가 여행이라도 온 것 같습니다. 청옥과 함옥이 준비한 물건을 모두 치웠다고 하더라고요.”

    능양진인이 웃음을 지으며 잘 빻은 향료를 명주 주머니에 넣어 탕관(*湯罐: 약이나 차를 끓이는 작은 그릇)에 걸었다. 그리고 도동(道童)을 불러 부채로 불에 바람을 넣게 했다.

    “놀고 싶으면 놀게 놔두어라. 조방궁에 사람 하나 먹고 마시는 게 부족하겠느냐.”

    가만히 생각하던 화옥이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지는지, 입을 열었다.

    “스승님, 사백께서 그때 왜 저 아일 데려가셨답니까? 제자가 보기에 지 소저는 딱히 능력을 타고난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멈칫한 능양진인의 머릿속에, 능운진인에게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저 아이의 명이 참으로 이상하구나. 천명(天命)을 받은 것 같은데, 또 살파랑(*殺破狼: 자미두수의 칠살, 파군, 탐랑 세 가지가 합쳐진 것으로 천살고성과 더불어 절명하는 명)의 상을 가진 것이 확실히 여인의 명이 아니다. 하여, 내가 아이를 데리고 세상을 돌아보려 한다. 그렇게라도 하여 저 아이의 명에 든 살의 기운이, 더는 문제를 만들지 않고 흩어지길 바라야지.”

    ‘그래서 아이를 저리 키우신 것입니까?’

    상념에서 빠져나온 능양진인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제자에게 말했다.

    “그 아이는 신경 쓰지 말아라. 물이 다 마르거든 향환을 챙겨 대장공주님께 가져다드리거라.”

    “네, 스승님.”

    화옥이 웃음을 지었다.

    “대장공주께선 스승님께서 만드신 향을 가장 좋아하시잖아요. 꼭 이 향환을 태우셔야 편히 주무시고요.”

    * * *

    푹 자고 일어난 지온이 눈을 뜨자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있었다.

    새들이 맑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고, 방안을 감도는 익숙한 향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이 모든 것은 지온으로 하여금 마치 무애해각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이들에겐 이미 3년 전 일이겠지만, 그녀에게는 겨우 한 달 전 일이 아니던가.

    그때, 조용히 문이 열렸다.

    가만히 침상에 내려진 휘장을 걷고 확인만 하려던 서아는, 지온이 이미 잠에서 깨어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엇?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그리곤 웃음을 지은 서아가 제 가슴을 두드리며 물었다.

    “제가 씻고 단장하는 것을 도와드릴까요?”

    지온이 천천히 일어나 앉으며 대답했다.

    “응”

    무애해각 생각 때문인지, 서아의 눈에 지온은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듯 보였다. 서아가 드시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묻자 지온이 대답했다.

    “냉이를 좀 캐서 네가 가장 잘하는 훈둔(*馄饨: 각종 재료를 넣고 빚은 작은 만두를 넣고 끓인 탕)을 해서 먹자.”

    그 말에 서아가 멈칫하며 대꾸했다.

    “아가씨, 저는 훈둔을 만들어 본 일이 없어요. 요리는 하로가 잘하는데, 가서 물어볼까요?”

    그 말에 같이 멈칫했던 지온이 대답했다.

    “아, 응……. 그래.”

    지온은 서글퍼졌다.

    저 아이는 과거 자신의 시녀, 금벽이가 아니었다.

    ‘금벽이도 아마 그 혼란 통에 목숨을 잃었겠지? 우선은 조금 더 기다리자. 지금 무애해각의 일을 알아보는 건 너무 눈에 띌 거야. 일단 사람을 모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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