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4)화 (24/385)
  • 24화. 향환

    형부 관아.

    관아로 들어가는 루안은 여전히 손을 닦고 있었다. 그는 누가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 싫었다. 타고나길 민감하게 타고난 후각 때문인지, 타인의 냄새가 묻으면 정신이고 마음이고 도무지 편안하질 않았다. 꼭 지금처럼, 아무리 닦아도 어쩐지 손에서 냄새가 가시질 않고 계속 나는 것 같았다.

    사실 냄새는 약재 향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 냄새의 주인은 최근 아마도 많은 탕약을 마셨을 것이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것이지!’

    “대인, 돌아오셨습니까?”

    들리는 음성에 루안이 고개를 들어보니 고 대인이었다.

    그는 문서를 잔뜩 안고 있었는데, 양이 어찌나 많은지 도포 앞자락을 들어 문서를 받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 웃음을 자아냈다.

    루안이 계속 손을 닦고 있자 의아해진 고 대인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실성한 자를 만났네.”

    루안이 손을 닦던 손수건을 사환에게 휙, 하고 건넸다.

    지 소저가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미친 척 헛소리를 했단 것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와 접촉한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었던지라 더는 그녀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그간 지 소저의 행적 상, 도성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쪽 세력’과 상관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일 이야기나 해보세.”

    긴 책상 앞에 앉은 루안이 문서를 들었다.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정리가 된 것인가?”

    “그렇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들은 돌려보내 다시 심리하라 하였고, 여기 있는 것들은 이제 처리를 끝내도 되는 것들입니다.”

    “취태평 사건은 어찌 됐는가?”

    “이미 진술하여 사건 내용을 기록해두었습니다. 그들과는 진짜 상관이 없더군요. 주창은 소령과 동향 사람으로 몰래 소령과 만나던 사이였습니다. 소령이 자신과 함께 취태평에서 떠나는 것을 거부하자 순간 질투에 사로잡혀 죽인 것이었습니다.”

    “음.”

    루안은 이내 공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에 남은 냄새도 서서히 그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 * *

    시간이 흘러 퇴청할 시간이 되었다.

    돌아갈 준비를 하며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던 루안은 돌연 멈칫했다.

    나던 약재 향은 이미 흩어지고 없었지만, 그의 손바닥엔 다른 잔향이 남아있었다.

    너무도 옅어 이젠 거의 나지도 않는, 그러나 너무도 익숙하기 그지없는 향이었다.

    * * *

    시녀들이 짐을 꾸리고 있었다.

    돌아올 땐 얼마 되지 않았던 물건들이, 이제 떠나려니 상자 여러 개를 가득 채웠다. 옷과 각종 도구는 당연히 모두 챙겨가야 했고, 방 안에 있는 책궤 역시 지온이 모두 가져간다 했던 것이다.

    큰아가씨의 성격이 좋아지자 서아도 전처럼 가슴을 졸이며 조심스레 말하지 않아도 되어 보다 편히 말하게 되었다.

    서아가 짐을 꾸리며 물었다.

    “아가씨, 서책이 너무 많아 무거운데 꼭 가져가야 하나요?”

    “당연히 가져가야지.”

    열린 창으로 보이는 방안은, 탁자 위에 있는 작은 화로에서 피어오른 향연(香煙)으로 자욱했다. 꿀을 끓여 정제해 만든 향환(香丸)들을, 한 알 한 알 비단 주머니에 넣으며 지온이 대답했다.

    “이 저택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그 서책들이야.”

    “아, 네.”

    대답한 서아는 고분고분 서책들을 챙기며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때, 화로가 찬합을 가지고 들어오며 말했다.

    “대부인께서 간식거리들을 사셨어요. 가시는 길에 아가씨 드시라고요.”

    그리곤 킁킁거리며 방안 향기를 맡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향이 정말 좋은데요? 새로 사신 거예요?”

    “아가씨께서 직접 만드신 거야.”

    의운이 대답했다.

    “청량하면서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야. 맡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아가씨, 조향도 하시는 거예요?”

    화로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서아가 대답했다.

    “아가씨가 하실 줄 아시는 게 얼마나 많은데! 간밤엔 동전 일곱 개로 내 점까지 봐주셨어! 완전 족집게야.”

    화로가 웃었다.

    “그럼 저잣거리에 자리 깔아도 되시겠네?”

    그리곤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금방 제 입을 찰싹 때리며 사과했다.

    “아가씨를 두고 그런 농을 하면 안 되는데, 제가 실수했어요!”

    “틀린 말도 아니야. 스승님을 따라 떠돌 때, 돈이 없어서 자리 깔고 점도 봐주고 그랬어. 강호에서 지내려면 뭐라도 조금씩은 할 줄 알아야 하거든.”

    온화한 지온의 모습에 시녀들이 다시 웃으며 재잘대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아가씨, 이번에 조방궁에 가시면 크게 이름을 날리실 수도 있겠네?”

    “그러니까! 내가 들었는데, 능양진인(凌陽眞人)이 점 한 번 봐주는데 천 냥이래. 아가씨는 천 냥은 아니어도 백 냥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에 백 냥이면, 열 번이면 천 냥이고, 백 번이면 일만 냥…… 와, 떼부자 되겠네!”

    그 소리에 같이 웃음을 지은 지온이 마지막 향환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옅지만 청량하고 부드러운 향이 풍겨왔다. 도성에 유행하고 있는 조향 향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 개 코가 향을 알아보려나 모르겠네.’

    * * *

    지온이 조방궁으로 수행을 떠난다는 소식에 위씨 부인은 정신이 혼미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게야? 지금 떠나겠다니!”

    집안이 시끄러워진 것도 모두 그 계집이 갑자기 혼약 신물을 돌려주겠다며 시작된 것이었다.

    삼남가에서 말을 하진 않지만, 위씨 부인은 어쩐지 재산 문제로 난 이 사단도 장남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지서의 지참금 생각을 하자마자 삼남가에서 어찌 바로 이 난리를 치며 나왔겠는가?

    이제 대노야의 개인재산은 모두 지온의 손에 넘어갔다.

    지금처럼 중요한 순간에 남아서 자신들과 힘겨루기를 하지는 않을망정, 돌연 떠나겠다니?

    자신은 이미 고 계집을 어찌 상대할지 준비까지 해 놓지 않았던가?

    ‘문서를 백날 손에 쥐어봐라, 네가 어디 일에 손이라도 쓸 수 있겠느냐? 속 터져 죽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겠지!’

    그렇게 밤낮으로 칼을 갈아 날을 벼려놨더니, 상대가 짐을 싸 훌쩍 떠난다니?

    꼭 허공에 주먹질한 것처럼 괜히 준비만 했다가 힘만 빼고 만 격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포씨 유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꾸린 상자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것이, 짐이 적지가 않습니다! 보아하니 길게 떠나있을 것 같습니다.”

    “음모네, 분명 음모가 있어!”

    위씨 부인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지난번엔 내 잠시 방심했다 우리 지서의 혼사를 망쳤지만, 이번엔 절대 그리하지 않을 것이야!’

    그런 다짐을 하며 위씨 부인은 지온이 인사하러 오길 기다렸다.

    ‘이번엔 무슨 듣기 좋은 소리에도 내 절대 넘어가지 않을 테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던 이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시녀만 보내 말을 전한 것이다.

    “이부인, 큰아가씨께서 부인이 바쁘신 것 같아 찾아와 따로 인사를 드리지는 않겠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잠시 떠나있게 되어 마음을 담았으니, 받아 달라며 선물을 주셨습니다.”

    포씨 유모가 비단 주머니를 받아 뒤집자 향환이 나왔다.

    “이게 무슨 뜻이냐? 독이라도 쓰겠다는 게야?”

    “…….”

    위씨 부인이 멍하니 그리 말하자 포씨 유모가 말했다.

    “부인, 무슨 농을 그리 하십니까. 집안 어르신을 해하는 것은 크나큰 죄인데 큰아가씨께서 그러실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 그만 다투시겠다는 의미가 아닐는지요? 어차피 부인께서 돈도 모두 주지 않으셨습니까. 아랫사람이니, 그래도 옳고 그름은 가리는 것이겠지요.”

    흥, 하고 콧방귀를 뀐 위씨 부인이 억지로 대답했다.

    “진정 그렇다면, 당분간은 나도 가만 놔둘 것이야!”

    “네네, 부인. 역시 마음이 넓으십니다…….”

    * * *

    지온은 장씨 부인에게도 향환을 보냈는데, 이번엔 지온의 계모인 정씨가 직접 가서 전달했다.

    정씨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장씨 부인은 매우 놀랐다.

    “참으로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다!”

    대노야의 후처로 들어온 대부인 정씨는 막 집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집안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니 대노야가 세상을 떠난 후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거의 제 거처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정씨가 웃으며 인사했다.

    “자네와 작은 서방님께서 힘을 써주지 않았다면 지온이가 어찌 이리 간단하게 가산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정도 있고 도리도 있으니, 내 직접 와서 고맙다 인사를 해야지.”

    장씨 부인이 겸연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힘을 쓰긴 무엇을요…….”

    사실 처음 그녀가 떠올린 방법은 지온을 부추겨 차남가와 다투게 하고, 자신은 옆에서 어부지리하려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온이 제 수에 넘어오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차남가를 상대할 방법을 떠올려 나서는 바람에 상황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제 부군인 지익이 그 와중에 제대로 정신을 차린 덕에, 부부가 합심하여 똘똘 뭉칠 수 있지 않았던가?

    그 후엔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어찌 되었건, 동서의 마음은 내 꼭 기억할 것이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정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온이는 이미 조방궁으로 수행을 갔네. 올해에는 아마 본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네.”

    장씨 부인은 매우 놀랐다.

    “네? 아니 이리 가버리다니요! 아직 분가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논이고 밭이며, 점포들 모두 둘째 형님네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문서야 지온이 가지고 있다지만, 사람을 바꾸지 않으면 실제 얻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요!”

    그러자 정씨가 웃으며 계약서 한 장을 건넸다.

    “지온이가 말하길, 자신은 아직 규방도 나서지 않은 규수라 아무리 생각해도 집안 어른과 재산을 두고 다투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네. 그리곤 고민 끝에 인품이 단정한 자네라면 맡길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구먼. 자네들이 뭔가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네. 계약서는 그저 만일에 대비하여 남겨두는 것일 뿐이고. 일이 생기면 자네와 작은 서방님께서 처리하는 김에 이 일도 같이 도와달라는 내용이네.”

    계약서의 내용을 본 장씨 부인이 눈을 빛냈다.

    계약서엔, 장남가가 소유한 모든 재산의 관리를 집안의 삼남가의 가장이자, 지씨 가문의 막내 노야인 지익에게 위임한다고 선명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지온과 대부인 정씨의 지장까지 모두 찍힌 계약서였다.

    ‘이 계약서만 있으면 형님댁과 끝까지 싸워볼 수 있겠어!’

    장씨 부인은 탐욕스러운 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에 돈을 가져다준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쑥쑥 커가는 세 명의 자식들도 있지 않은가?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많았다.

    “큰형님, 지온이도 그렇고 어찌 이리 예를 차리십니까.”

    장씨 부인이 제 가슴을 탕탕, 치며 적극적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저희 노야가 착실하고 곧은 사람이 아닙니까? 두 분께서 이리 맡겨주셨으니 지온이 돌아올 때까지 저희가 제대로 관리하고 있겠습니다!”

    대부인이 빙긋 웃었다.

    “그리 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게. 지온이, 제 스승의 효를 다하려면 적어도 1년은 있어야 할 것이고 거기에 시집을 가려면 한, 두 해는 더 지내야 하니 앞으로 두 사람을 귀찮게 할 일이 많을 거라 전해달라더군.”

    * * *

    마차 한 대가 지씨 가문의 측문에 섰다.

    마차 안에 앉은 루안은 밖에서 들이치는 볕을 벗 삼아 문서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밖에서 사환의 음성이 들렸다.

    “대인, 소인이 여쭙고 왔습니다.”

    루안이 문서를 내려놓자 사환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께선 조방궁에 가셨다 합니다. 돌아가신 스승님께 효를 다하기 위해 수행을 가신 것이라 일 년 안에는 돌아오지 않으실 것이랍니다.”

    루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언제 떠났다더냐?”

    “오늘 아침에 갔다 합니다.”

    침묵이 흐르길 잠시, 차륵 하는 소리와 함께 창막이 열렸다.

    “조방궁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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