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조방궁
잠시 머뭇거린 지장이 대답했다.
“어떻게 나눌지는 정했어. 그런데 어떤 것을 나눌지를 두고 의견이 갈리시는 거야.”
어디 밭이 더 기름지고, 어디 점포가 더 돈을 잘 버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내용을 보아야 누가 더 이득인지, 손해인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들에 비하면 지온이 가져간 것들은 문서에 정확하게 적힌 내용인지라 이견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숙부와 숙모께서 다들 바쁘시니 저는 따로 들어가서 인사를 드리지는 않을게요. 오라버니들, 그럼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 애들아, 나 먼저 갈게.”
멀어지는 지온의 뒷모습을 보던 지서가 한 마디를 뱉었다.
“어우, 요사스러워!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본인만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구는 것 좀 봐!”
그 소리에 지언이 기분이 나빠져 따졌다.
“언니, 왜 말을 그렇게 해? 언니네 집안에서 나쁜 짓을 해 놓고 그걸 왜 큰언니에게 뒤집어씌워?”
오냐오냐, 버릇없이 커온 지서는 지언이 제 말을 반박하자 금방 화를 냈다.
“나쁜 짓이라니, 무슨 나쁜 짓! 전에는 잘만 지냈는데, 뭐! 저 여자 없을 땐 멀쩡하던 집안이, 오고 나선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잖아!”
지언은 말주변이 없었다. 지서가 억지를 부리며 생떼를 쓰고 있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어찌나 거칠게 소리를 치는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지언의 눈이 금방 붉게 달아올랐다.
“언니네, 언니네…….”
말을 하려던 지언은 참았다. 그래도 어린 소저가, 백부가 밖에서 기녀를 애인으로 뒀다는 소릴 입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제 여동생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본 지장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지서야,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은 규수가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다.”
지장이 입을 열자, 지염의 얼굴이 곧장 변했다.
“지장. 큰 오라비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네가 뭐라고 성급하게 훈계냐?”
지장은 기분이 상했다. 그는 제 아버지처럼 착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형이 무슨 말을 하든 따르지는 않았다.
지장이 당장 빈정거리고 나섰다.
“훈계가 필요한 걸 아니 다행이네. 지서가 하루 이틀 저런 것도 아니고, 어느 집 규수가 입만 열면 제 큰언니 욕을 해? 유씨 가문과의 혼사가 안 이루어져서 다행이지.”
지염이 짜증스레 말했다.
“그럼 지금 네 모습은 좋은 오라비의 모습이냐? 동생의 혼사가 어그러진 걸 가지고 비웃기나 하는 모습은 좋은 모습이야?”
지장이 비웃음을 흘렸다.
“큰형, 내가 언제 혼사가 어그러진 걸 두고 비웃었다고 그래? 먼저 혼사를 무른 쪽은 우리 동생이야! 그게 다른 사람이랑 무슨 상관인데?”
지장은 ‘우리 동생’을 강조하며 지염에게 본래 이 혼약이 지서의 것이 아닌, 지온의 것이었음을 알렸다.
‘다른 이의 것을 빼앗는 행동이 습관이 되면 되겠어? 지서는 애초에, 혼약을 무를 자격조차 없었어.’
지장의 생각을 읽은 듯이 지염이 벌컥 화를 냈다.
“너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이냐?”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사촌 형제들은 결국 다투기 시작했다.
지서와 지언도 제 오라버니 옆에서 맞장구를 치며 돕고 나서자, 집 안팎에서 난리가 벌어졌다. 그 바람에 말리러 온 하인들도 싸움 말리랴, 제 주인 지키랴, 야단이 벌어져 집안이 온통 바글바글 끓는 솥처럼 시끄러워졌다.
* * *
이 모든 일을 촉발한 지온은 이미 희화원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하로와 의운이 나와 그녀를 맞았다.
지온은 두 사람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고 얼굴과 손을 씻었다.
“어머나, 아가씨 손이 왜 이러세요?”
하로의 말에 제 손을 본 지온은 그제야 손목이 붉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루안이 비틀어서 이런 거지? 손속도 과하게 쓰네.’
“괜찮아, 길에서 부딪혔어.”
“어떻게 부딪혔기에 이렇게 되셨어요, 안 아프세요?”
대부인 정씨가 그 소리를 듣고는 지온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
“괜찮아 보이는군. 가서 기름약을 가져와 아가씨께 발라드리거라. 내일이면 흐려질 것이야.”
지온의 눈을 바라보며 정씨는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했다.
* * *
지온의 손목에 시녀들이 기름약을 바른 뒤, 정씨는 시녀들을 가서 일하라며 내보냈다. 이내 방에는 두 사람이 남았다.
“앞으로 어찌할 생각인가?”
지온은 평온하게 차를 마시곤 말했다.
“어느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정씨가 말했다.
“스승님께 효를 다하기 위해 복상을 한다 하였으니, 혼사는 적어도 1년은 미뤄질 것이네. 지금 집안이 매우 시끄럽네. 분가하는 일을 두고 차남가와 삼남가가 아마 한동안 시끄럽게 다툴 테니, 집안이 조용하지 않을 것이야. 차라리, 당분간 다른 곳으로 피해있는 것이 어떻겠나?”
고개를 든 지온이 그녀를 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는 친척 어르신도 없는데, 제가 피할 곳이 어디 있겠는지요?”
“있지.”
정씨가 말했다.
“조방궁(朝芳宮)은 자네의 사문이 아닌가? 그러니 돌아가 잠시 머문다 해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네.”
* * *
지 소저의 육신에 남은 기억은 아주 흐릿했다.
능운진인이 그녀를 데리고 도성을 떠났고, 9년간 돌아오지 않았던 것만 기억이 남아있던 것이다.
능운진인은 자신의 몸이 좋지 않자, 그제야 자신의 제자를 데리고 급히 도성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올랐다. 하지만, 결국 도성까지 버티지 못하고 오는 길에 병이 발작하여 세상을 뜨고 만다.
만약 능운진인이 건강한 모습으로 그녀와 함께 돌아왔다면, 상황은 지 소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조방궁에서 수련한, 정심(精深)한 고인(高人)의 큰제자였으니,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지 소저의 할아버지도 극진히 대접하던 능운진인이었는데, 차남가 따위가 능운진인 앞에서 헛짓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안타까운 것은 능운진인은 돌아오지 못했고, 지 소저 역시 변변찮은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지 소저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성질은 급하고 드셌다.
차남가는 그런 지 소저를 계속 자극하며 부추겼고, 그녀는 그것에 일일이 넘어가며 수치와 분노가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결국, 그녀는 그들을 위협할 생각에 기둥으로 달려들어 머리를 찧었다가 예상치 못하게 진짜 죽게 되었고 지금의 지온으로 다시 깨어나게 되었다.
조방궁은 지 소저도 능운진인의 유골을 돌려 드리기 위해 딱 한 번 들린 것이 전부였다.
당시 지 소저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던지라, 인사만 드리고 곧장 조방궁을 떠났고 그 후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대부인인 정씨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재산을 분리하고 분가하는 일에 너무 큰 희망을 두지 말게. 자네의 둘째 숙부와 숙모가 집안을 운영했으니, 지금 있는 장궤들이며 회계들 모두 그들의 심복이야. 자네에게 당장 그들을 교체할 인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아무리 손에 문서를 들었다 해도 단기간에 그것을 가져오기는 어려울 것이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 해봐야, 그저 장부에 적힌 돈들뿐이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전에 정씨는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었다.
‘나름의 시험을 통과했다고 봐도 되는 건가?’
정씨가 계속 말을 이었다.
“혼약을 무른 일은 아주 잘한 것이네. 지씨 가문은 이미 많이 쇠락했고, 유씨 가문은 한낮의 태양처럼 높이 뜬 가문이라 집안이 맞질 않았어. 이대로 혼약을 유지하고 있어 봐야 지온이 자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을 것이야. 오히려 이번에 혼사를 물리며 유씨 가문에 빚을 지워둔 셈이니 나중엔 그것을 이용할 날이 있겠지.”
지온은 그저 웃음을 지었지만,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진짜 큰아가씨’가 아니었으니 그 혼약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혼사를 무른 것도 흘러가는 추세를 보고 했던 행동일 뿐, 유씨 가문에 빚을 지우기 위해 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유(兪)씨 가문이라…….’
차남가보다 체면이야 차렸지만, 그들 역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군자의 도(道)를 지켰다 할 수는 없었다.
‘이 몸의 주인인 지 소저가 사람 대할 줄 모르던 이는 맞지만, 그렇다고 본성이 악한 이는 아니었잖아.’
만약 유씨 가문 사람들에게 좋은 마음이 있었다면, 차남가의 말에 넘어갈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제대로 된 길로 선도하고 가르쳤어야 옳았다.
‘차남가의 말대로, 상대를 바꾸면 지 소저가 어떤 상황에 놓이는지 유씨 가문에서 몰랐을 리도 없고.’
“유씨 가문에서 자네가 효심이 깊다고 말해주어 나빠졌던 명성도 많이 좋아졌으니 앞으로 1년 정도 지나 다시 혼처를 알아보면 될 것이야. 다만 그러기엔 지씨 가문의 상황이 좋지 않네. 거기다 자네의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신 터라 좋은 혼처를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야. 그러니 이제 기댈 곳은 조방궁뿐이네.”
정씨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조방궁이 그저 평범한 궁관이라 생각하지 말게. 황가로 귀속되어 여양대장공주(驪陽大長公主)께선 아직도 그곳에서 수양하고 계시고 자넨 능운진인의 제자이지 않은가. 그 신분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자네를 절대 가벼이 보지 않을 것이네.”
지온은 정씨가 좋은 취지로 하는 말이란 것은 알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어머님, 그런데 제가 왜 지씨 가문을 떠나야 하는지요?”
지온이 정씨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정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정씨가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사정이 있겠나? 다만 조방궁에 있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지만, 아무도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머님.”
정씨가 몸을 일으켰다.
“가져갈 것을 천천히 챙기면 될 것이네. 조방궁엔 내가 먼저 연락을 해 놓겠네.”
“네.”
지온은 예를 올리곤, 정씨가 방에서 나가는 것을 눈으로 배웅했다.
정씨의 의도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나쁜 뜻을 품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대화에서 그녀가 했던 이야기는 모두 맞는 말들이었다.
지씨 집안의 큰아가씨가 된 자신이 이대로 계속 가문에 머물러서는 좋은 혼처 자린 찾을 수 없을 터였다. 오히려 조방궁으로 가면 다른 길이 열릴지도 몰랐다.
* * *
종소리가 길게 울리자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방궁 대전에 있던 여관(女冠)들이 읽던 경(經)을 멈추곤 고개를 들었다.
상석엔 마흔쯤 되었을까 싶은 중년의 여도사가 앉아 있었다.
분홍빛 반질거리는 얼굴의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저녁 수업을 끝내겠다. 가서 다들 식사하거라.”
기쁜 표정의 제자들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는 줄줄이 대전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때, 젊은 여관 하나가 대전을 나가는 제자들 사이를 비집고 반대로 오며 대전 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스승님!”
그녀의 부름에 여도사가 변함없는 자세로 가만히 미간을 좁히자, 젊은 여관은 얼른 걸음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정돈하더니 다시 여도사에게로 다가왔다.
“스승님, 지씨 가문에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여도사가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젊은 여관이 대답했다.
“사백(*師伯: 스승의 사형 혹은 사저)께서 들이셨던 제자의 집안입니다.”
여도사가 자신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무어라 하더냐?”
“그녀가 돌아가신 사백께 효를 다하기 위해 궁으로 수행을 온다 합니다.”
여도사의 미간이 슬그머니 위로 올랐다.
“효를 다해? 수행?”
“스승님도 이상하단 생각이 드시지요?”
여도사가 제 생각에 동의했다고 생각한 여관이 말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저희를 얼마나 무시했었습니까? 소저 노릇이 하고 싶어서 얼른 본가에 돌아가려 안달을 하던 것이 눈에 훤히 보였는데, 갑자기 돌아와 수행하겠다니요?”
여도사는 생각에 잠긴 채 말이 없었다.
여관은 누가 옆에서 독려라도 한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자가 알아보니 그 여자가 유씨 가문과의 혼약을 물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안은 분가로 난리가 났다던데, 설마 이제 와 저희에게 기대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대장공주(大長公主)님의 이름값이라도 보려고 말입니다. 아니면 거절할까요, 스승님? 그 여자, 조방궁에서 하루도 묵은 적이 없지 않습니까? 이젠 사백도 안 계신데, 그 여자가 무슨 근거로 이곳엘 오겠습니까?”
여도사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무슨 근거로 거절을 할 것이냐? 그녀는 정식으로 사문에 들어온 아이다. 제자 명부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는 아이란 말이다.”
여관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가 쭈뼛대며 물었다.
“그럼 오라고 할까요? 하지만, 저희 건물 안에 외부인이 늘어나면 아주 불편한걸요.”
여도사가 담담히 말했다.
“오겠다니 오라 해야지. 출가하지 않았으니 장원하나 내어주고 지내라 하면 될 것이다.”
조방궁이 작은 규모도 아니고, 받지 못할 것도 없었다.
여도사는 생각했다.
‘대장공주님의 덕이라…… 보고 싶다고 아무나 볼 수 있는 덕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