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2)화 (22/385)
  • 22화. 무공

    형부의 사람들이 떠나자 서아가 물었다.

    “아가씨, 저희도 그만 갈까요?”

    “어렵게 나왔잖아. 물건을 좀 사서 돌아가야겠어.”

    그리곤 소매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어 건넸다.

    “마차 타고 가. 다 사면 다시 만나자.”

    서아는 그래도 취태평이니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다녀올게요.”

    서아가 떠나자 지온이 일꾼을 불러 계산을 하곤 말했다.

    “내 시녀가 물건을 사러 갔다 돌아와 나를 찾을 것이네. 그럼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라 전해주시게.”

    그리곤 은자 하나를 건넸다.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일꾼이 얼른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장궤에게 전해 놓을 테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너울을 쓰곤 주루를 나갔다.

    형부의 관아는 이곳에서 멀지 않아 조금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오시(午時)가 다 된 지라, 지온이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식사하러 나오는 아전들이 줄줄이 보였다.

    ‘루안은…… 나와서 식사를 하지 않나 보다.’

    지온이 그리 생각을 했을 때, 마침 익숙한 신형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멈칫했던 지온은 그가 좀 더 멀어지길 기다렸다 뒤를 쫓았다.

    루안은 이미 평상복으로 환복을 하였는데, 무슨 일을 하려고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를 따라 골목 두 곳을 지난 지온은, 그가 다관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잠시 고민을 한 끝에 따라 들어갔다.

    * * *

    다관은 크지 않았다.

    아래층은 대당(*大堂: 넓은 홀)이었고 위층은 작은 방들로 이루어진 별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일꾼이 지온을 맞자 지온은 마주 대답하며 자연스레 위층으로 올라갔다. 지온은 복도를 지나며 별실 한 칸을 가리켰다.

    “이곳에 사람이 있는가?”

    일꾼이 없다고 대답하자, 지온이 그 방으로 들어갔다.

    옆방은 조용했다. 가끔 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이윽고 옆방의 문이 열렸고 누군가 나갔는데, 나간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럼 루안이 만난 사람이 아직 방에 있는 건가?’

    지온은 문을 열고 나가 모퉁이에 섰다. 풍경을 감상하듯 보던 지온은 이윽고 다시 돌아오며 원래 제가 있던 별실을 지나치곤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 그녀의 얼굴엔 이미 놀란 척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지온은 사과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자리뿐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어떻게 아무도 없을 수가 있지?’

    조금 전에 분명 두 사람이 안에 있는 소리를 들었고 나간 것은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남은 한 사람은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창으로 뛰어내렸다고?’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지온은 곧장 창가로 달려가 아래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거리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바로 그때, 뒤에서 불쑥 손이 다가왔다.

    놀란 지온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며 밀어냈다.

    ‘다행이야. 이 몸이 그래도 무공을 배웠으니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

    뒷말을 채 떠올리기도 전, 상대는 이미 반격에 나섰다. 지온의 팔을 막아 붙든 상대는 곧이어 강하게 그녀를 밀어붙였다.

    중심을 잃은 지온은 그대로 벽까지 밀려 부딪혔다.

    ‘아파…….’

    “…….”

    이제야 이 몸의 원래 주인에게서 왜 고수의 분위기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는지를 깨달은 지온이었다.

    ‘무공은 무슨, 너무 하찮아! 대체 어떻게 배웠기에 이 모양이란 말인가?’

    다시 불쑥 다가온 손이 지온의 너울에 달린 면사를 열어젖혔다.

    루안의 그 차갑고 딱딱한 얼굴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지온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금방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지 소저? 왜 날 따라온 것이오?”

    눈을 깜빡거린 지온이 입을 열었다.

    “공자께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그저 방을 잘못 찾았을 뿐입니다.”

    루안이 차갑게 웃었다.

    “방을 잘못 찾은 이가 이리 방안을 확인한단 것이오? 그리고 취태평에서도 당신은 을석(乙席) 아홉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소. 계속 부인하시겠소?”

    변명 거릴 찾으려던 생각을 지온은 금세 내려놓았다.

    ‘참, 루안은 본 것을 잊은 적이 없지.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그의 눈에 걸린 이상 부인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머리를 굴린 그녀가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루 낭중께서 뛰어난 기재라 하시더니, 소녀 탄복하였습니다.”

    루안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지온은 그에게 잡혀있는 자신의 팔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녀가 유별하니 대인, 우선, 제 팔목부터 놔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차가운 눈으로 지그시 그녀를 보던 루안이 손을 풀었다.

    허리를 세운 그가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천천히 손을 닦았다.

    ‘지금 날 만진 게 싫어서 저러는 거지? 이제야 조금씩 과거의 모습이 나오네.’

    그는 청결을 몹시 중시했는데, 누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날 왜 따라다녔는지 이야기를 해보시오. 말을 하면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소. 그러나, 말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이 형부 관아로 소저를 모실 수밖에 없소.”

    “…….”

    지온이 입을 열었다.

    “소녀,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데 어찌합니까?”

    루안이 차게 대답했다.

    “관아로 가고 싶은가 보군.”

    “아…….”

    빠르게 그의 얼굴을 살핀 지온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진짜……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말 하시오!”

    지온이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혹시…… 대인께선 혼인을 하셨습니까?”

    그 말에 루안이 흠칫 놀랐다. 하지만 지온은 이제 나오는 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날 대인을 처음 뵙고 소녀, 대인을 동경하고 그리워하게 되어 자나 깨나 대인의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녀가 유별하여 얼굴 한 번을 뵙기가 어려워 이런 좋지 않은 방법을 떠올리게…….”

    그녀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루안의 냉소가 울렸다.

    “그런 헛소리를 내가 믿을 것 같소?”

    지온이 황급히 대답했다.

    “사실이다 증명이라도 하면 되겠습니까? 대인께서 동의만 하신다면, 소녀 집으로 돌아가 어르신들께 말씀을 드려 매파에게 인사를 하라 연통을 넣겠습니다. 대인께서 돈을 좋아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녀, 혼례를 위해 준비한 돈이 대충 계산해도 십오만 냥은 됩니다. 혹시 이것으로도 부족하시면 더 벌 수도 있고…….”

    길어지는 지온의 장황한 이야기에 루안의 이마에 새파란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엉망진창! 무슨 헛소린가!’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에 대해 그도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시정(市井)에 떠도는 소문을 모아 수집한 것도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예비 차원에서 그리한 것뿐이었다.

    ‘실제로 만나 보니, 역시 성격이 거칠긴 하군. 대체 어떤 집안의 소저가 이리 사내를 뒤쫓고 거기에 혼인하자 달려든다던가?’

    “그만하시오!”

    더 듣고 싶지도 않았던 루안이 말했다.

    “이번엔 그만 됐소. 하지만 다음에 다시 잡히면 형부에 소저를 위한 방이 준비될 줄 아시오!”

    루안은 금방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고개를 내밀어 그가 확실히 떠났다는 것을 확인한 지온이 그제야 가슴을 통통, 치며 혼잣말을 했다.

    “뭐가 이렇게 비밀스러워? 대체 누굴 만난 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점소이가 올라왔다.

    “가실 생각입니까? 계산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답한 지온이 훌쩍 계산서를 받아 들었다 흠칫 놀랐다.

    “왜 두 사람분인가?”

    점소이가 반달눈을 하며 말했다.

    “아까 가셨던 공자께서, 아가씨께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함께 계산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

    ‘돈 귀신 같은 놈아!’

    * * *

    취태평으로 돌아오자 서아가 곧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여기저기 놀러 다녔어.”

    “놀러 가실 것이었으면 절 기다렸다가 함께 가시지 그러셨어요! 길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일이라도 났으면 어쩌려고요!”

    지온이 웃었다.

    “무슨 일이 생기겠어? 난 무공도 하는 사람인데!”

    그리 말하는 지온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무공은, 무슨. 앞으론 못한다 생각하자.’

    지온이 말을 돌렸다.

    “물건은 모두 샀어?”

    “모두 샀어요.”

    서아가 대답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자.”

    * * *

    지부에 들어서자마자 지온은 지씨 가문의 어린아이들 몇이 방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안에선 다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총관의 보고 소리도 함께 들렸다.

    역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지장이 그녀를 보곤 멈칫했다.

    “나갔다 왔어?”

    ‘그럼 내가 본 사람이…….’

    “네, 나가서 물건을 좀 사 왔어요.”

    그리곤 지온이 고개를 돌려 서아에게 말했다.

    “서아야, 가서 물건을 가져다 둬.”

    대답한 서아가 하인 몇을 불러 마차에서 크고 작은 봉투들을 내렸다.

    보고 있던 지서가 구시렁거렸다.

    “돈이 생기더니 손도 크지, 잘도 사네!”

    지언은 많이 부러운 얼굴로 물었다.

    “큰언니, 뭐 산 거야?”

    “붓이랑 먹, 서적이랑 약재들.”

    맛있는 간식이나 재미있는 장난감을 생각했던 지언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단박에 흥미를 잃었다.

    지장이 또 무어라 말을 걸려던 찰나, 갑작스레 방안에서 비명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위씨의 음성이었다.

    “분명 우리가 번 것인데, 왜 자네들에게 줘야 하는가!”

    그리곤 지장의 모친인 장씨 부인의 음성이 이어졌다.

    “어떻게 그게 형님이 번 것이 됩니까? 이건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가산입니다. 그동안 집안 가산을 운영하며 이미 수년간 돈을 가져가 놓고, 더 뭘 어쩌시려고요!”

    “집안 건사가 노고 없이 되는 줄 아는가! 가산을 운영하는 것이 그냥 앉아 돈만 받으면 되는 것인 줄 알아? 번 돈은 모두 집안을 꾸리는 것에 쓰지 않았나? 자네는 그동안 먹지도, 입지도 않았어?”

    “형님, 참으로 염치도 없으십니다! 아버님께서 남기신 것이 얼마인데, 저희는 아직 형님네 댁에서 얼마나 썼는지는 계산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버님께서 밖에서 기녀를 끼고 쓰신 돈만 해도 달에 칠, 팔백 냥은 되겠지요? 지난 2년간 적어도 만 냥, 은자는 쓰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님도 똑같습니다! 점강각 연지를 사놓고 저희가 알까 겁나 통만 바꿔서 쓰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돈들 모두 아버님께서 남기신 가산이 아니냔 말씀입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 연지값은 내가 혼인하며 가져온 돈에서 산 것이네!”

    “그런 소리를 하는 형님을, 형님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형님이 혼수로 얼마나 해왔는지 집안에 모르는 이들이 있답니까?”

    “집안에 들어올 땐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이리 오래 지났는데, 자연히 규모가 커진 것이지!”

    “무엇으로 규모를 키우셨습니까? 이리저리 해봐야, 결국은 아버님의 돈이 아닙니까! 아버님의 가산을 분리해 형님 사고에 넣어두셨잖아요! 저희가 자질구레한 것까진 계산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젠 그 남은 부스러기마저 주기 싫어 이러십니까!”

    안에선 하늘을 불사를 듯 시끄럽게 싸우고 있었고, 밖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엔 온통 우울함이 가득했다.

    집안에 이 난리가 났으니, 자녀들도 자연스레 갈라졌다.

    원래 등원과 하원을 함께 하던 지염과 지장도 이젠 각자 서원을 다니고 있었고 서로 크게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여자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매일 집에 있는 아이들이니 어른들 간의 불화로 인한 영향이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아직도 재산을 나누지 못하셨지?”

    지온이 물으며 생각했다.

    ‘간밤에 모두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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