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7)화 (17/385)
  • 17화. 돈이 왜 필요해?

    루안이 팔꿈치 아래를 괴곤 천천히 말했다.

    “솔직히 말해주겠네. 그 기녀는 기밀 사건과 연루되어, 우리 태평사에서 이미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던 인물이었네. 그런데 어제 자네들이 그 난리를 쳐댄 덕분에 범인이 놀랐어. 그래서 결국 기녀도 죽인 것이고. 그 때문에 이젠 우리가 조사하던 기밀사건의 단서도 모두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버렸네. 더는 조사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단 것이야. 자, 그럼 이제 말 해보게.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나?”

    두 노야 모두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형이 말했다.

    “그, 그건 저희와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까! 저희가 죽인 것도 아닌데…….”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고, 누가 죽음과 상관이 없다 했는가?”

    고찬이 음험하게 말했다.

    “자네들이 그렇게 난입하여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범인이 기녀를 죽여 입막음을 했겠나? 태평사의 수많은 인원이 지난 보름간 고생했던 것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상부에선 돈도 주지 않겠지. 이젠 점소이에게 던져 줄 푼돈인, 다수전(*茶水錢: 시중드는 이에게 주는 봉사료, 지금의 팁)도 부족할 지경이야!”

    지익은 여전히 설득해 보려 했다.

    “그러나 대인. 저희 역시 아무런 상관도 없이 엮인 것인데…….”

    조금 전 큰돈을 잃어 상심이 크던 지형은 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듣자 돌연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떠보듯 입을 열었다.

    “아니면 그 다수전(茶水錢)을 저희가 내어드리면…….”

    그 소리에 고찬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범인 잡는 야차 같던 얼굴이 갑자기 온화해진 것이다.

    “그래도 되나 모르겠구먼.”

    싫단 소린 안 하는 고찬이었다.

    그 모습에 지형은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자신은 제 아우처럼 고지식한 인간이 아니지 않던가? 그리고 전에 다른 동료와 술 한 잔 걸치며 태평사에 관한 이야기도 들은 일이 있었다.

    왕후공자씩이나 되는 루안이, 제가 쥔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들을 겁박하고 금전을 갈취한다며 북양왕의 명성에 먹칠한다고 욕을 해댔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이 난리를 친 것이 다 돈을 뜯어내려 한 것이란 말이지?’

    하기야, 자신들이 취태평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소령이 멀쩡하게 살아있었던 것을 본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무리 그녀가 죽었다 해도 아래 벼슬아치나 두어 사람 보내어 이것저것 물어보면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굳이 이리 많은 인원을 끌고 와 죄를 물을 이유가 없었다.

    지형은 내심 마음이 놓였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진짜 태평사와 엮이면 그게 더 골치 아파!’

    “당연합니다. 대인께서 조정의 일을 보시는 중이시지 않습니까! 다수전 정도야 저희가 내어드리는 것이 별일이겠습니까? 저희도 작지만 조정을 위해 일하고 있는데, 이것도 폐하의 심려를 덜어드리는 것이겠지요!”

    지익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 덧붙였다.

    “그럼요, 당연합니다. 모두 폐하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이 아닙니까.”

    그렇게 지형이 지시를 내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총관이 함을 하나 들고 들어와 고찬 앞에 대령했다.

    슬쩍 바라본 고찬이 옆에 있는 루안에게 귀엣말을 몇 마디 전했다. 그러자 루안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치며 입을 열었다.

    “본관이 막 떠오른 것이 있는데, 듣자니 그대가 질녀의 혼례비용을 가로채고 돌려주지 않았다지? 그런 일이 있는가?”

    지형이 황급히 말했다.

    “그런 일 없습지요! 그저 대리로 맡아 두었을 뿐입니다! 대인께서도 아시겠지만, 저희 큰형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규방을 나서지도 않은 여아에게 어찌 직접 관리를 하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집안의 대부인이 계시지 않은가?”

    루안이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친이 있는데, 왜 숙부가 그것을 관리하지?”

    “그것이…….”

    옆에 있던 위씨 부인이 그를 슬쩍 꼬집으며 눈치를 주고는 귀엣말을 했다.

    “…노야, 대인이 돈이 부족하니 일부러 다른 소릴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자 지형이 독하게 마음을 먹고는 다시 총관을 불렀고 금방 다른 함이 들어왔다. 이번엔 들어온 함 안에는 여러 장의 은표가 들어있었다.

    슥 상자 안을 훑은 고찬이 루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씨 집안의 노야와 부인들의 숨죽인 시선 속에서도 루 낭중은 느긋하게 찻잔을 비웠고 그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태평사에 공무가 잡다하네. 이 사건과 자네들이 관련이 없다니, 그만 먼저 돌아가겠네. 다들 고생이 많았군.”

    한숨 돌린 두 노야가 얼른 대답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살펴 가십시오!”

    루안은 말없이 그대로 몸을 돌려 대청을 나갔다.

    * * *

    겨우 진시(辰時)가 다 지날 무렵인지라 마침 이제 막 떠오른 해가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돌아가는 그에게 부드러운 빛살이 비치자, 푸른 소나무 같은 그의 자태가 더욱 영준(英俊)하게 빛났다. 눈이 다 부실 지경이었다.

    그 모습에 지형은 속으로 침을 카악 뱉었다.

    ‘허우대만 멀쩡하지, 음험하기 짝이 없는 소인배 같은 놈! 옥형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덕에 황제의 스승이라 불리는 분의 마지막 제자라는, 관문제자 소릴 듣는 놈이 저래서야 되겠어! 옥형 선생이 저승에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뚜껑이 발칵 열려 무덤에서 훌떡 일어서고 말 것이다!’

    지익은 제 형보다 그나마 고상한 사람이라 그저 속으로 몇 마디 탄식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본래 가인(佳人)이라 불이던 이가, 어찌 이런 짓까지 하게 되었는가…….’

    * * *

    루안의 신형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지염과 지장이 상황을 묻기 위해 뛰어 들어갔다.

    멀어지는 루안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마지못해 시선을 돌린 지서는 지온 역시 저와 같은 모습으로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서의 가슴에 그동안 쌓여있던 악감정에 새로운 감정까지 더해지자 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지서가 비아냥댔다.

    “왜, 잘 생긴 공자를 보니까 춘심(春心)이라도 흔들려?”

    지서를 바라본 지온이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어? 설마 너도…….”

    “흥! 뭐라는 거야!”

    지서가 노기에 차 소리쳤다.

    “난 부모님이 걱정되어 그런 거고! 다 본인 같은 줄 아나 봐?”

    지온이 온화하게 대답했다.

    “그래. 부모님께서 안 계셔서 걱정할 게 없는 난, 내 혼사만 고민하면 되니까.”

    지서가 흠칫했다.

    “뭐야……. 지금 인정한 거야?”

    지온이 반달눈을 하고 웃었다.

    “강호의 여인들은 좋고 싫은 게 분명하거든.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는 것을, 그게 무엇이라고. 북양왕부의 문턱이 높다지만 루 낭중께선 이미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하니, 혼사 역시 스스로 결정을 하시겠지. 나와 꽤 잘 맞는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 큰숙모께서 날 위해 이 혼사를 도와주실지 모르겠네?”

    입을 헤, 벌리고 한참을 멍하니 있던 지서가 치미는 화에 발을 동동 굴렀다.

    “얼굴도 두껍지!”

    그렇게 한차례 지서가 화를 낸 뒤, 두 사람 역시 다른 이들이 있는 대청으로 들었다.

    * * *

    지형 부부와 지익 부부는 태평사에 돈을 건넨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두고 또다시 다투고 있었다.

    다투며 오가는 이야기를 멍하니 듣고 있던 지서는 황망하게 서 있다가 제 오라버니, 지염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그러니까 지금 루 낭중이 우리 집에 온 이유가 돈…… 돈을 뜯어내려고 왔다는 거야?”

    지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고갯짓에 이제 막 수줍게 돋아나려던 지서의 소녀다운 감성은 와장창, 박살이 났다.

    그때, 한쪽에 있던 지온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숙부님들, 그만하시지요. 그 다수전은 제가 내겠습니다.”

    * * *

    “아가씨, 아직 안 주무세요?”

    서아가 지온에게 다가와 물었다.

    지온은 탁자에 종이를 한 장 펼쳐두고 앉아 있었다.

    “낮에 잠을 많이 잤더니 잠이 안 와서. 먼저 가서 쉬어, 나도 곧 잘 거야.”

    서아가 대답했다.

    “제가 밖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시면 부르세요.”

    “응.”

    서아는 나가며 지온을 다시 돌아보았다.

    시선을 종이에 드리운 채 곧은 자세로 붓을 든 지온의 모습은, 대갓집 규수 같았다.

    ‘큰아가씨께서 전이랑은 너무 달라지셨어. 그럼 전에는…… 일부러 그렇게 행동하셨던 걸까?’

    * * *

    등불이 비치는 탁자 앞에서는 지온의 침음성이 길게 이어졌다.

    종이의 첫 번째 줄에 단어가 적혀 있었다.

    무애해각.

    무애해각은 대순에서 가장 이름난 서원으로, 지온의 할아버지인 옥형 선생이 세운 곳이었다.

    지온의 할아버지는 명성이 널리 알려진 분이셨다. 선제께서 아직 태자이던 시절, 선제는 지온의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크게 공경했다. 이에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황제의 스승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옥씨 가문의 나날은 평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지온의 부모가 뜻밖의 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리자, 지온의 할아버지는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말았다. 지온의 할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데리고 고향인 상해(桑海)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본래 그는 그곳에서 그저 시간이나 보낼 요량으로 몇 명의 학생을 받아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옥형 선생의 명성이 워낙 뛰어났던지라, 지온의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청하려는 이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전국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여기에 선제까지 지온의 할아버지를 크게 돕자, 무애해각은 단 몇 년 만에 나라에서 세운 대형 수학(修學)기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큰 서원으로 성장했다.

    심지어 선제는 태자의 나이가 어느 정도 차자, 태자를 무애해각으로 보내어 수학하게 하였고, 그 때문에 귀족 집안의 후예들과 왕족들 역시 속속 무애해각에 발을 들였다.

    의안왕과 루안 역시, 그때 무애해각에 발을 들였던 이들이었다.

    의안왕은 강왕(康王)의 여섯째 아들로, 자손이 귀했던 선제가 형제가 없는 태자를 위해 어린 나이에 입궁시킨 인물이었다. 의안왕은 태자와 늘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 그리고 후에, 군왕에까지 봉해지게 되었다.

    태자가 수학하기 위해 무애해각에 왔을 때 의안왕 역시 함께 따라왔다.

    사실 훈귀(勋贵)집안의 자제들이 무애해각에 온 것은 선제에 대한 충심을 나타내려는 목적에서였다. 이 때문에 이들은 태자와 동창이 되어 어울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중 루안만이 이들과 달랐다.

    열다섯에 무애해각에 온 루안은 진심으로 학문을 탐구하여, 옥형 선생의 마음을 움직였고, 옥형 선생은 그를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였다.

    지온의 기억 속 루안은 무척 조용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와 학문을 연구하는 것 외에 그가 가진 단 하나의 취미는 바다낚시였다.

    열댓 살 먹은 소년이 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은, 야단법석을 떨어대는 다른 귀족 집안의 자제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엇이 그를 지금처럼 변하게 한 걸까?’

    지금의 그는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하여 주변인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본인의 이득을 취하는, 세상 물정 빤한 노회하고도 가혹한 관리의 모습이 아닌가!

    ‘대체 그에게 부가 왜 필요해서?’

    다시 고개를 숙인 지온은 무애해각의 아랫줄에 글씨를 썼다.

    북양왕부(北襄王府).

    무애해각은 3년 전 해구들의 침략에 모두 불타 사라졌다. 아주 우연히도 전대 북양왕이 서거한 시기 역시 3년 전이였다.

    하나는 남쪽, 다른 하나는 북쪽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연관도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진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걸까?’

    북양 왕족들이 왕위를 두고 서로 다툼을 벌였다는 얘기는,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허무맹랑하게 느껴져 지온에게 현실감 있게 와닿지 않았다.

    저들이 말하는 루안은 자신이 알고 있는 루안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자신이 아는 루안의 성정과는 너무도 달랐다.

    ‘형제와 반목하고, 새로운 황제에게 투신했으며, 주변인들을 겁박하여 돈까지 갈취하다니…….’

    한 사람의 변화가 이렇게까지 극심하다면 의심이 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본성이 드러난 걸까? 아니면 일부러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가? 전자라면, 무애해각이 불탄 일이 루안과 관련이 있을까? 후자라면, 그는 왜 도성에서 그런 모습으로 숨어있는 거지? 무엇을 위해서?’

    생각이 점점 많아지며 지온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길 한참, 지온은 숨을 깊게 내쉬며 글자가 쓰인 종이를 불태웠다.

    지온은 할아버지가 사람을 잘못 봤을 리 없다 믿었다.

    ‘사실이 무엇이든, 그를 직접 만나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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