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6)화 (16/385)
  • 16화. 북양왕의 동생, 루안

    지서는 규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제 오라버니에게 의견을 물었다.

    “큰오라버니,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어찌 되실지 모르잖아. 나도 여기서 기다리면 어때?”

    지염이 대답했다.

    “기다리려거든 돌아가 쉬면서 기다리고 있어. 무슨 소식이라도 들리면 바로 알려줄게.”

    지서가 우겼다.

    “이런 상황에 내가 어떻게 편하게 쉬어? 차라리 여기서 기다리며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지켜보는 게 낫지.”

    가만히 고민하던 지염은 지서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그렇게 해.”

    그리곤 유모에게 말하여 지련만 데리고 돌아가게 했다.

    막 제 오라버니를 설득한 지서의 귀로 지온이 제 계모에게 하는 이야기가 귀에 들려왔다.

    “어머니, 저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조금 더 기다리겠습니다.”

    그러자 지씨 가문의 대부인, 정씨 부인이 대답했다.

    “간밤에 잠 한숨 못 자지 않았어? 아직 몸도 완전하지 않지 않은데,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기다리지 못할 것 같으면 그때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자 그녀도 더 반대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말고 일찍 돌아와 아침을 드시게.”

    “알겠습니다.”

    옆에 있던 지언은 두 언니가 모두 떠나지 않자 역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씨 가문의 다섯 소년 소녀들은 그대로 복도에 서서 관원들이 오가는 방을 바라보았다.

    * * *

    형부의 관원은 이미 조사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노야와 부인들 네 사람, 그리고 간밤에 말을 전한 하인까지 하나씩 들어가 진술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은 아전(衙前)의 지시대로 한쪽에 따로 모여 있었다.

    지서는 지온이 진짜 남아있자 눈을 희번덕이며 구시렁거렸다.

    “속이 시커멓기는!”

    ‘나야 부모님이 걱정되어 남았다지만, 저 벌거숭이 계집은 대체 왜 남은 거지? 유씨 가문과의 혼약이 없어졌으니 다른 사내를 유혹하려는 건가? 얼굴만 반반해서는!’

    지서가 질투심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온은 지서가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여기서 그를 보게 된 거지? 그것도 저런 몰골로? 지금 대체 무슨 신분인 거야? 지난 몇 년간 무슨 일을 겪은 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서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오라버니, 저 대인은 누구셔? 왜 다들 이렇게 무서워하는 건데?”

    지염이 대답했다.

    “형부 태평사의 낭중(*郎中: 관직명), 루안(樓晏)이야.”

    지서가 멈칫했다.

    “이름이 익숙한데…….”

    “응.”

    지염이 말했다.

    “너도 들어봤을 거야. 북양(北襄)의 왕족으로 3년 전 도성에 들어올 때 워낙 큰 소란이 있었으니까.”

    지서가 탄성을 지르며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북양왕 사공자!”

    “맞아, 그자가 저자야.”

    듣고 있던 지언은 어리둥절하여 제 오라비에게 물었다.

    “지장 오라버니, 전대 북양왕의 넷째 공자가 왜 이곳에……?”

    지장은 무척 긴장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터라 동생에게 대답해주며 긴장을 풀어보기로 했다.

    “북양왕이 누군지는 알지? 우리 대순(大舜)이 세워지고 세 명의 다른 성 씨를 가진 이들이 왕에 봉해졌어. 그중 정해왕(靖海王)은 일찍이 대가 끊겨 내렸던 봉호가 거두어졌고, 남은 북양왕과 서영왕(西寧王)은 하나는 동북에, 하나는 서남에 자리를 잡았지.”

    “아! 그거 알아!”

    지언이 손뼉을 치며 말을 받았다.

    “북양왕, 루정(樓廷)은 수라왕(修羅王)이 강림한 듯했다! 그 이야기 나도 들었었어!”

    지장이 웃음을 지었다.

    “그건 글쟁이들이 허구로 엮은 거니까 그냥 듣기만 하고 진짜라고 생각하지는 마.”

    그리고 말을 이었다.

    “지금의 북양왕족은 바로 그 루정의 후손들이야. 저 루 낭중은 서열 네 번째 사람이고 전대(前代) 북양왕의 어린 적자지.”

    “그런데 왜 갑자기 도성에 온 거야?”

    “넌 그 이야기도 못 들었니?”

    지서는 제가 아는 것을 뽐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전대 북양왕이 죽었기 때문이잖아! 북양왕이 살아생전에 가장 아끼던 사람이 루씨 집안의 넷째 공자라, 세자와 저 공자 사이에 불화가 깊었거든. 세자와 넷째 공자가 작위를 놓고 반목한 거지.”

    지온이 놀라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지서가 그런 지온을 흘끔 보더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리가 없긴 뭐가 없담? 작위가 있는 집안에서 작위 계승을 놓고 서로 피 터지게 싸웠던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정말 소양도 없네!”

    지온은 그에 반박하지 않고 그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는 눈앞이 캄캄했다.

    아마도 조금 전 본 루안의 외모가 너무나 인상 깊었는지, 지서가 루안을 옹호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외부인들이 어떻게 알겠어. 북양왕이 어쩌면 진짜로 세자 자리를 넷째 공자에게 넘겨주려 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그래서 공자는 천 리 길을 도망쳐 어렵사리 북양왕의 영지를 벗어나 도성에 도움을 청하러 온 거야. 그때가 새로운 황제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을걸? 그렇지, 오라버니?”

    “맞아.”

    지염이 말했다.

    “폐하께선 그대로 도성에 머물게 해주셨는데 작위를 그에게 계승하게도 하지 않으셨고 그렇다고 벌을 내리지도 않으셨지. 그리고 이듬해 나라에 경사가 있어 연 과거에서 저 공자 역시 시험을 보았고 거기에 붙은 거지. 그래서 저 공자가 지금 낭중의 직책에 오르게 된 거야.”

    그리곤 지염이 입을 삐죽이며 무시하는 듯 말했다.

    “형부 태평사는 원래 그리 중요하지도 관아였지. 오랫동안 미제로 남은 사건을 맡던 관아였는데 루 낭중이 간 뒤로 무슨 고관대작들의 죄라도 담당하는 것처럼 달라졌거든. 의심스러운 사건만 있으면 전부 태평사로 보내고 보니까. 폐하께서 뭣 때문에 루 낭중을 그렇게 믿으시는 건지 모르겠어.”

    그러자 갑자기 지장이 말리듯이 소리쳤다.

    “형님!”

    그리곤 다른 쪽에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아전(衙前)들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고는 주의를 시켰다.

    “아직 저들이 집에 있는데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지염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무튼, 루 낭중이 손을 댄 사건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몰라. 그래서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지언이 덜덜 떨었다.

    “그럼 아버지랑 다들…….”

    “괜찮을 거야.”

    지장이 제 동생을 위로했다.

    “증인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리 그래도 죄를 덮어씌울 순 없지.”

    그때 갑자기 지온이 목소리를 냈다.

    “둘째 오라버니, 그럼 루 낭중과 북양왕가는 서로 관계를 끊은 건가요?”

    지장이 지온을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온 지 며칠이나 지난 그녀는 아직 자신과 제대로 대화를 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가 대답했다.

    “맞아. 북양왕세자가 도성으로 사람을 보내 그의 죄상을 통렬하게 고해 바쳤다더라고. 하지만 폐하께서는 루 낭중을 족보에서 내보내는 것까지만 허락하시고 죄까지 묻지는 않으셨어. 거기다 세자가 작위를 계승하기 위해 올린 상소까지 일 년 이상을 끌다 얼마 전에야 답을 보내셨고.”

    그 말은 황제가 루안의 편을 든다는 의미였다.

    지염이 말했다.

    “폐하께서 아직 의안왕이었던 시절, 선대 태자와 무애해각으로 수학하러 가신 일이 있었고, 당시 루안과 동창으로 우의를 쌓았으니 남다른 마음이 있으셨겠지.”

    지장 역시 그리 들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지온만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때 아무런 접점이 없던 두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남다른 마음을 가질 수가 있단 말이야?’

    태자는 그나마 루안과 두어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의안왕은 대화 한마디를 할 기회조차 없었다.

    ‘삼 년간 정세가 정말 많이 달라졌어.’

    당시 무애해각에서 의안왕은 자신에게 직접 불만을 토로하곤 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를 챙겨주고 있지 않은가?

    ‘북양왕이 죽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3년 전 해구들의 야습 때문에?’

    지온은 생각을 멈췄다.

    ‘이렇게 근거 없는 추측은 해서는 안 돼.’

    어찌 되었건, 당시의 루안은 왕작을 놓고 형제와 반목할 리가 없었다.

    북양왕이 사람을 보내 루안을 데려간 일이 있었지만, 그는 석 달 만에 다시 돌아와 앞으로 무애해각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었다. 이에 북양왕이 앓아누울 정도로 그에게 화를 냈다고 했었다.

    대대로 동북 주둔지를 지키는 가문의 당당한 일원이자 전신(戰神)이라 불리기도 하는 루안을, 학문을 위해 잠시 무애해각으로 보냈던 것은 선제의 뜻에 따라 북양왕가의 충심을 표하기 위해 그리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다시 집안으로 돌아와 가업을 이을 생각은 하지 않고 아이들이나 가르치는 선생 나부랭이가 되겠다니, 그게 말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당시 어떤 말로도 북양왕은 루안의 결심을 흔들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왕작을 계승하기 위해 형제와 반목을 했다고? 내가 알던 루안은 그럼 가짜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래, 그것도 확신할 수 없지.’

    지온은 과거를 떠올렸다. 의안왕과 태자 역시 그토록 우애 깊은 형제였는데, 결론은 어찌 되었던가…….

    * * *

    방 안.

    짙푸른 청색 관복을 걸친 낭중, 루안은 고급스러운 찻잔을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찻잔이 울리는 느릿하고 음울한 소리가 마치 깊은 지저(地底)에서 울리며 올라오는 소리 같았다.

    “…뜻밖에? 지금 본관이 가서 자네와 부딪혔다던 그자를 불러와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야 하는가?”

    풀썩.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리 힘이 풀려버린 장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저, 접니다. 제가 사람을 보냈습니다. 허나 루 대인, 저는 그저 둘째 아주버님께서 벌이고 계신 황당무계한 일을 형님께 알려드리고자 했을 뿐, 다른 의도는 정녕 없었습니다!”

    장씨 부인의 말에, 놀란 위씨 부인이 분노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서! 어찌 그리 악독하게 우리 집안을 해할 수가 있는가!”

    그에 주눅 들기 싫었던 장씨 부인이 그녀를 마주 노려보았다.

    “해는 둘째 아주버님이 끼치셨지요! 제가 아주버님에게 밖에서 기녀와 놀아나라 강요라도 했습니까? 제가 형님의 사고에서 물건을 훔치라 말이라도 했냔 말입니다!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악독하지 않고, 말을 전한 이가 악독한 이가 되는 것입니까?”

    “자네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리 크게 창피를 당할 일이 있었겠나? 거기에 이런 사건에까지 휘말리게 되었지 않는가!”

    장씨 부인이 냉소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형님에 일가족이 참으로 그 꼴입니다. 둘째인 지서가 언니인 지온의 혼약을 빼앗으려 할 땐 언제고, 도리어 지온이에게 그리 욕을 퍼붓더니, 집안 재산을 그리 많이 빼돌린 형님 부부가 지금 저더러 악독하다니요? 허! 그럼, 저희는 가만히 앉아 형님이 원하면 원하는 대로 괴롭힘이나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에 반항하면 악독한 것이 되고요?”

    그녀의 말에 위씨 부인은 감정이 크게 상했다.

    “집안 재산을 빼돌리다니! 장유유서가 아닌가! 따로 집안의 재산을 나누지 않는 한, 관리는 당연히 우리 집안에서 하는 것이 옳지! 감히 형님 집안에게 이리 불효를 저질러 놓고 어디서 큰소리를 내는가!”

    “허!”

    장씨 부인도 더는 참지 않고 가차 없이 화를 쏟아냈다.

    “서책도 안 읽으셨습니까? 학식도 참 없으십니다. 효는 부모에게나 말하는 것이고, 형님에겐 공경을 하는 것이지요. 형우제공(兄友弟恭), 형은 우애로 아우를 대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으로 대한다! 모르십니까? 물론 형님이 사람 같을 때나 그리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자네……!”

    “그만!”

    동서지간인 두 여인의 말다툼이 점점 시끄러워지자, 한쪽에 있던 고찬이 차가운 눈빛으로 크게 고함을 쳤다.

    “지금이 뭐 하는 시간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금세 겁을 먹은 두 부인이 입을 꾹 닫고는 약속이나 한 듯 속으로 서로를 향해 원망을 쏟았다.

    ‘이런 상황에 함부로 말씨름이나 하려고 하다니, 하여간 눈치도 없지!’

    제 부인이 그런 일을 벌였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지익은 매우 놀랐지만, 이윽고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대인. 모든 것은 저희 집안일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저희 역시 기녀가 자진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루안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스치고 지나가며, 그가 반문했다.

    “어찌 그리 기녀가 자진한 것이라 확신하는가?”

    순간 멈칫한 지익이 말했다.

    “자진한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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