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5)화 (15/385)
  • 15화. 하늘의 뜻

    지익이 남은 재산들을 정리하곤 말했다.

    “이건 모두 큰형님의 사유재산이니, 지온의 것이오.”

    지형은 그제야 깨달았는지 놀라 말했다.

    “큰질녀의 것이 왜 이리 많은 것이냐? 나머지는?”

    지익이 그를 슬쩍 흘겨보곤 남은 재산 역시 정리하며 말했다.

    “형님이 가주니 큰 몫을 가져가야지…….”

    지형은 이미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위씨 부인을 노려보자 위씨 부인의 고개가 움츠러들었다. 간밤에 보였던 바람난 부군을 잡던 기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형은 이제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한숨을 몰아쉬곤 제 부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집안 말아먹을 여편네가 무슨 짓을 한 것이오!”

    위씨 부인도 지지 않고 말했다.

    “왜 날 탓하십니까! 노야가 뒤에서 기녀를 키우다 이 사달이 난 것이 아닙니까!”

    “아직도 잘났다고……!”

    두 사람은 싸우기 시작했다.

    지익은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남은 것들을 마저 정리하고는, 지온에게 목록이 적인 명단을 건넸다.

    “가져가거라. 모두 네 아비가 네게 남긴 것이다.”

    심경이 복잡한 지온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작은 숙부님.”

    그렇게 먼동이 터올 때가 되어서야 집안에 일었던 풍랑도 점차 가라앉을 수 있었다.

    * * *

    안에서 밤새 난리가 벌어진 통에 아이들 역시 덩달아 꼬박 밤을 새웠다.

    지염과 지장 모두 충혈된 눈으로 연신 하품을 해댔다. 그들은 그저 제 방으로 돌아가,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지씨 가문의 대문을 쿵쿵 두드렸다.

    이윽고 총관이 헐레벌떡 들어와 소리쳤다.

    “큰일 났습니다! 그 기녀가 죽었답니다!”

    지형이 흠칫 놀랐다.

    “내가 한 일이 아니야!”

    “노야께서 돌아오시고 계속 나가지 않으셨으니 당연히 노야께서 하신 일이 아니시지요. 하지만 바깥사람들은 분명 저희 집안에서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할 것입니다!”

    안 그래도, 먹물 냄새 풍기던 문인 출신의 지씨 집안이, 하루아침에 집안 노야는 뒤로 몰래 기녀와 바람을 피우고 그의 부인은 직접 그 현장을 잡겠다고 주루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이 퍼져버렸다.

    게다가 그 집안 형제들은 돈 때문에 서로 반목하여 싸움질까지 했는데 거기에 기녀를 잡아 죽였단 이야기까지 나돌면 어찌 대문 밖을 나설 수가 있겠는가?

    위씨 부인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통쾌한 마음과 불안이 교차했던 것이다.

    “그 천한 계집이 내가 뭘 하기도 전에 먼저 죽어버렸구나.”

    장씨 부인이 물었다.

    “어찌 죽었다던가? 자진했다던가?”

    “듣기로는 목을 매달았다는 것 같습니다. 날이 밝기도 전에 관아에 알렸답니다.”

    지익이 말했다.

    “그래도 그 여인은 수치를 알았구먼.”

    그리곤 지형을 향해 눈을 한 번 부라렸다.

    아무리 그래도 한동안 만나왔던 여인이 아닌가? 그랬던 여인이 죽었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제 결백을 주장하다니!

    ‘내 형님이 이리 정 없는 사람이란 것을 그동안 내가 어찌 몰랐던 것일까?’

    한쪽에 서 있던 지온이 한숨을 폭하고 내쉬었다.

    ‘여기 있는 노야고 부인들이고 도대체 어떻게 믿을만한 사람이 하나 없는 것인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지온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 기녀는 숙부님과 숙모님께서 떠난 뒤에 목을 매단 것이지요? 그럼 관아에서 심문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올 테니 준비를 해두셔야겠네요.”

    그 말에 불현듯 깨달은 장씨 부인이 지익을 보았다.

    “아, 노야. 그럼…….”

    “다들 돌아가 계시오. 관아에서 사람이 오면, 나와 둘째 형님이 만나보겠소.”

    그리고는 지익이 지형을 노려보며 말했다.

    “형님, 관리가 오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해야 할 말이나 잘하시오. 어차피 더 떨어질 체면도 없고, 여기서 더 숨기다 일이 커지면 나도 신경 쓰지 않을 거요.”

    지형이 비웃었다.

    “누가 너더러 신경 써달라더냐? 금전 때문에 제 형님에게 얼굴이나 붉히는 놈이 무슨…….”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대문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하인 하나가 외쳤다.

    “노야, 부인! 형부(刑部)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순간 방에 있던 이들 모두가 또다시 멈칫, 놀랐다.

    “형부라니? 어떻게 형부에서 사람이 와?”

    지익이 놀라 되물었다.

    관례대로라면 형부는 직접적인 사건조사는 하지 않았다. 형부의 하위 조직인 현부(縣府)에서 먼저 심사가 끝나면 위로 보고가 올라가 다시 재심이 이루어지게 되어있었다. 더구나 소령이란 기녀는 직접 목을 매달아 죽었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형부가 움직였단 말인가?’

    지온은 뭔가 단순하지 않은 내막이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형부가 이 사건에 끼어든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소령이라는 기녀가 이 일로 자진했다는 것이 무척 이상했다.

    정실부인에게 간통이 드러나 잡혔다는 것이 기녀에게 뭐 얼마나 체면 떨어지는 일이겠는가?

    세상은 사내들에게 관대했기 때문에 첩을 아끼느라 정실을 내쫓지 않는 이상, 밖에서 기녀를 하나 데리고 있는 것 정도는 큰일이라 보지도 않았다.

    실상은 오히려 위씨 부인의 체면이 더욱 깎일 터였다. 정실부인이 기녀와의 간통을 잡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은, 제 평판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 * *

    형부에서 나온 이는 금방 도착했다. 두 노야가 나와 맞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곧장 그들은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여가솔들이 막 이사청 문밖을 나섰을 때, 이미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일행이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 놀란 지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제 모친인 위씨 부인의 소매를 붙들고 그녀의 뒤로 가 숨었고, 조금 더 어린 지선은 여차하면 울음을 터트릴 듯 울먹거렸다.

    위씨 부인과 장씨 부인 역시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기녀 하나 죽은 것이 아닌가?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어째 기세가 꼭 사람을 잡아가려는 듯 보이지 않는가?’

    가장 앞서 있던 관리가 대청 앞에 멈춰 서더니 내려온 명령서를 펴 보이며 소리쳤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들어라! 태평사에서 사건을 조사할 것이니 모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

    지선이 끝내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리자 그녀의 유모가 황급히 지선의 입을 막으며 작게 그녀를 달랬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두 노야가 안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지형은 그가 누군지를 알아보곤 금방 웃음을 지으며 상대를 향해 허리를 굽혀 공수했다.

    “고 대인(高大人)이 아니십니까? 오늘은 어찌 귀한 시간이 나시어 여기까지 걸음을 하시었습니까, 어서 오시지요. 먼저 들어와 차부터 드시지요.”

    그러나 고찬은 차가운 얼굴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본관은 오늘 이곳에 차를 마시러 온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지형(池亨)과 지익(池益)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지익이 공수하며 대답했다.

    “무슨 일로 오시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고찬은 그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여가솔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염과 지장 공자 두 사람이 노기에 찬 얼굴로 꼿꼿하게 몸을 세운 채 그녀들 앞을 막아섰다.

    ‘다들 형부의 태평사가 가장 무례하게 사건조사를 한다더니, 그 말이 꼭 맞구나!’

    ‘죄를 지은 범인도 아닌데 어디 함부로 남의 가문 여인들에게 시선을 보낸단 말인가?’

    그러나 고찬은 그것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말했다.

    “부인들은 어디 있는가?”

    지익이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대인?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라면 저희가 가서 조사를 받으면 될 일인데, 어찌 제 부인을 찾으십니까?”

    “두 사람의 부인들 역시 사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고찬이 대답했다.

    “그들뿐 아니라 어젯밤 취태평에 갔던 이들이라면 하인들까지 모두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함께 있던 모두가 매우 놀랐다.

    어찌 상황이 이리 심각해졌단 말인가? 기녀가 자진했으니 관련 질문을 묻는 것이라면 모를까, 마치 잡아 놓고 심문을 할 듯하지 않은가?

    “아가씨…….”

    서아가 자신도 모르게 지온의 옷소매를 쥐며 불안해하자 그런 서아를 본 지온이 낮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진짜 무슨 일이 있었다면 바로 잡아갔을 테니 아마 뭔가 물어보기 위해 찾아온 걸 거야.”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이었다.

    “그리고 저 관리들이 심문하려는 건 사건과 관련된 자들이지 우리는 아무 상관도 없잖아.”

    한쪽에 있던 지형이 말했다.

    “저희가 대체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고 대인,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대인께서도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인데 기녀가 죽었다고 저희를 범인 취급하시며 심문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의 말에 고찬이 신경 쓰지 않자, 지익이 좋은 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고 대인, 여긴 아이도 있지 않습니까? 대인께서 하시는 사건조사에 저희가 따를 테니 우선 아이들은 먼저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들은 나이가 어립니다. 이런 큰일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고찬이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보았다. 지선은 일곱 살이었고 위씨 부인의 어린 아들 지련(池璉)은 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지언과 지서와 같은 아이들 모두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로 다들 놀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고찬이 미간을 좁혔다. 고민하는 듯했다.

    그때 그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는 문 쪽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딘지 권태롭고 느릿한 목소리였다.

    “간밤에 취태평에 갔던 이들은 모두 남고, 다른 이들은 떠나도 된다.”

    순간 지온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시간이 길게 늘어지기라도 한 듯, 귀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음성이 비현실적으로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든 지온은 음성이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젊디젊은 관원이었다.

    겨우 스무 살이나 넘었을까 싶은 사내는 짙푸른 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훈훈하게 잘 생겼던지, 이마에 두른 못생긴 머리띠마저 그의 얼굴 위에 걸리자 이조차 풍류 공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다만, 얼굴 피부가 과도하게 창백하고 뺨에 비정상적인 분홍빛이 어려 어딘지 모르게 아파 보였다. 그러나 그 병색조차 단정하게 차려입은 관복과 어우러지자 우수(憂囚)에 젖은 듯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그가 천천히 걸어 다가오자 고찬이 몸을 돌리곤 공수했다.

    “대인!”

    지온의 귀로 두 노야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지온은 생각에 잠겼다.

    ‘아직 살아있다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곁에 있는 왕부의 시위(侍衛)들 모두 고수들이었고 그 자신 역시 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어쩌다 저렇게 변한 거지?’

    심지어 자신이 사람을 잘 못 본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녀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그는 옆을 지나며 지온을 슬쩍 바라보았다.

    두 번은 보기 어려운 미색이었건만,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낯선 이를 보듯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보낸 어둡고 무거운 눈빛에 다른 이들은 쿵쾅대던 심장마저 똑,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지서는 심지어 돌아가도 좋다는 말에도 걸음조차 떼지 않았을 정도였다.

    ‘저 사람…… 어떻게 유 공자님보다 더 잘생긴 거야?’

    역시 움직이지 않고 있던 지온은 서아가 옆에서 재촉하자 돌연 미소를 지었다. 이에 조금 놀란 서아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그제야 길게 늘어진 듯했던 시간이 다시 원래의 속도를 찾았다. 지온은 가벼운 탄식을 뱉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제위에 올랐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그 모든 과거를 품고 살아남았구나.’

    자신의 원래 몸에서 벗어나 새로운 육신으로 깨어났지만, 그렇다고 그 일에서까지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수많은 의문 속에 일어났던 그 사건으로 인해, 내 할아버지께선 그토록 의미 없이 돌아가셨는데. 

    반드시 그 죽음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기필코 받아 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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