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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2)화 (12/385)

12화. 싸워라, 어서 빨리 싸워!

며칠 후.

막 밤이 된 시간. 누군가 미친 듯이 달려와 지씨 가문의 대문을 두드렸다.

“이부인! 이부인! 이노야께서 취태평에 가셨다가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고 있습니다!”

화장을 지우던 위씨 부인은 그 소리에 분갑을 엎을 뻔했다.

“뭐라? 두들겨 맞다니, 이게 무슨 소리냐? 우리 노야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온 중년의 여자가 말했다.

“취태평에서 술을 자시다 그만 시비가 붙으시어…….”

위씨 부인이 노기 발산하며 탁자를 철썩 내리쳤다.

“요즘 왜 집엘 안 들어오시나 했네! 홍려시(*鴻臚寺: 황실관련 의례를 관장하고, 사신 접대를 담당한 예부의 속사)에서 제기(祭器)들을 집계해야 하여 일이 많아 못 온다 하시더니, 술을 드시러 가신 것이었어!”

포씨 유모가 얼른 말리고 나섰다.

“부인, 그 일은 일단 노야께서 오시면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일단 노야부터 모시고 오시는 것이 중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곤 중년 여인에게 물었다.

“노야께서 많이 다치셨는가? 지금은 어떠신가?”

여자가 대답했다.

“소식을 전해준 이가, 자신이 올 때도 계속 때리고 있다고 하여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그 소리에 위씨 부인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게 맞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쩐단 말인가?

‘그러나 부녀자가 싸우는 일에 끼는 것이…….’

“지염(池琰)이를 오라고 해? 아니지, 아니야. 지금 얼마나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고 있는데, 이런 어른들의 일에……. 그렇지. 서방님! 그렇지! 어서 서방님을 부르거라!”

위씨 부인의 그리 시켰을 때 지익과 부인은 이미 그곳에 거의 도착해 가고 있었다.

“형님!”

황급히 들어온 장씨 부인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요? 막 쉬려는데 둘째 아주버님께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위씨 부인은 두 사람이 지금처럼 반가운 적이 없었다.

“그저 맞았다는 소식만 전해온 터라 아직 정확한 상황을 모르겠네. 서방님께서 와주셨으니 어서 가서 확인을 좀 해주세요. 일단 노야부터 구해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말씀이 맞지요, 더 늦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요!”

장씨 부인이 위씨 부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형님, 어서 환복하고 오시지요,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알겠네, 알겠어.”

위씨 부인이 황급히 환복하러 가자 어질러진 화장대에 장씨 부인의 눈길이 머물렀다. 그녀가 분갑 한통을 주워들었다.

무척 평범한 다기 그릇에 담겨져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부드러우면서도 좀처럼 질리지 않는 향내가 코끝을 스쳤다.

손가락으로 콕콕 찍어 본 장씨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역시 점강각에서 만든 거네. 그릇까지 바꿔놓고, 누구에게 비밀로 하고 싶어 그랬나 모르겠군?’

위씨 부인이 나왔을 때 장씨 부인은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어서요, 형님. 아주버님께 별다른 일이 없으셔야 할 텐데!”

* * *

세 사람이 취태평에 도착했을 때, 낙칠이 데려온 이가 그들을 데리고 측문을 지나 후원으로 향했다.

점점 외진 곳으로 향하자 위씨 부인은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는 것인가? 노야께서 술을 드셨다 하지 않으셨나?”

그러자 그들을 데려가는 이가 대답했다.

“위씨 부인께서 모르셨나봅니다. 이곳에서도 술을 드실 수 있으십니다.”

앞쪽으로 불을 밝힌 작은 전각들이 보이긴 했다. 안에선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도 역시 은은하게 들려오긴 했다.

하지만 앞쪽의 왁자지껄한 곳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조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위씨 부인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취태평의 후원.

지형이 아이고, 하는 신음 소릴 냈다.

몸을 숙인 채 약을 바르던 아름다운 여인이 흠칫 놀라 얼른 손을 거뒀다.

“아프신지요?”

‘아프다마다지!’

거칠게 이를 드러냈던 지형은, 나긋나긋한 몸짓의 아름다운 여인이 눈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서 마음이 아프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아무리 아파도 말이 부드럽게 나왔다.

“괜찮았네, 괜찮았어.”

다시 몸을 숙인 여인이 약을 바르며 속상한 듯 입을 열었다.

“어디서 온 정신 나간 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조금 부딪힌 것을 가지고 바로 주먹부터 휘두르다니요! 그래도 중요한 부위들은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이어요.”

여인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노야께선 참으로 고상한 군자이십니다. 이리 마음이 넓으신 분은 노야뿐이실 것이어요.”

그녀의 칭찬에 지형은 금방 우쭐하여 말했다.

“당연하지! 내 아버지께서 계실 적에 우리 형제들에게 늘 겸손과 예를 가르치셨네, 그것이 재상부의 가풍이라고 말이지.”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 그가 또 한참을 허세를 부렸다.

사실 오늘 있었던 일은 지형도 재수가 없었다.

막 취태평에 들어서자마자 맞은편에서 바로 사람이 나오는 바람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는데, 상대가 그런 지형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던 것이다.

취태평에도 몰래 왔던 지형은 당연히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저 돈이나 물어주고 일을 마무리하려 했었다.

그런데 상대가 돈 좀 있다고 사람을 무시하는 거냐며 더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취태평에서 사람들이 나왔을 땐 이미 지형의 몸에 몇 군데 상처가 생긴 후였다.

상처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노야, 이리 다치셨는데 댁으로 돌아가셔서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그녀가 그리 말을 하자 지형 역시 고민에 빠졌다.

‘술을 마시고 넘어졌다 할까? 그러나 안사람에게는 제기들을 집계하느라 늦는다 했는데……. 아니면 날이 너무 어두워 실수로 넘어졌다 해야 하나?’

지형이 계속 고민하고 있을 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일더니 뒤이어 지형을 모시는 몸종의 당황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마, 부인! 여긴 어찌 오셨습니까?”

흠칫 놀란 지형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문이 활짝 열렸다.

장씨 부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둘째 아주버님께서 저곳에 계십니다!”

두 곳에 시퍼런 멍이 든 지형이 고개를 돌렸다가 경악으로 물든 얼굴을 했다.

“부, 부인!”

* * *

지형은 경악하며 방밖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위씨 부인 또한 경악하며 방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지익은 놀란 얼굴로 연신 방 안팎으로 시선을 돌렸고 장씨 부인만이 흥분한 채 부채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참으로 천재적인 수가 아니던가!

사람을 찾아 둘째 아주버님의 트집을 잡고 싸움을 일으킨 후에 곧장 집으로 연락을 취했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형님을 속여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이다.

현장을 딱 잡아챘으니 둘째 형님의 성질에 어떻게 참겠는가?

‘싸워라! 어서 빨리 싸워!’

한참이 지나고서야 위씨 부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위씨는 먼저 노야의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다 다시 탁자 위에 차려진 주안상을 보았다.

‘진짜 술을 마셨긴 마셨구먼!’

“부인!”

지 노야가 얼른 옆에 있던 여인을 밀쳐내더니 일어나 그녀에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여긴 어찌 왔소? 나, 난 그저 다른 이들과 이곳에 술을 마시러 왔는데…….”

“다른 이들이요? 다른 누구 말씀이십니까?”

위씨 부인이 여인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저 여자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당연히 아니오!”

지형이 그 자리에서 부정했다.

“다른 동료와 왔는데 그는 먼저 갔소. 난…….”

“아주버님!”

그의 말을 끊은 장씨 부인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형님께선 아주버님이 누군가에게 맞으셨단 소리에 이리 급히 달려오셨는데, 여기서 기녀와 술이나 마시고 계셨던 것입니까!”

“기녀와 술을 마시지 않았소!”

지형이 그 자리에서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다들 여길 좀 보시오. 조금 전에 어떤 미친놈이 들이박아 얼굴도 이리되지 않았소! 그래서 소령이의 거처에서 약을 빌리려…….”

“아주버님, 저 기녀의 이름도 아십니까!”

장씨 부인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위씨 부인도 역시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저 와서 약이나 발랐을 뿐인데, 이름은 왜 묻는단 말인가? 더구나 취태평에 있는 일꾼들이 얼마인데 굳이 여길 찾아와 약을 바른다고? 여기가 얼마나 외진 곳인데, 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먼가!’

상에 차려진 주안상도 분명 손님을 접대하려 내놓은 것이 분명한 주안상이었다. 거기에 잔은 두 잔뿐이었는데, 한 잔에는 입술연지 자국이 남아있었다.

위씨 부인의 분노는 급속도로 차오르고 있었다.

혼례를 올린 후 스무 해가 넘도록 집안에 첩 하나 들이지 않는 것을 보며, 그녀는 지씨 가문의 교육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부군이 얼마나 바른 처신을 하는지 모른다며 매일같이 다른 집안 부인들 앞에서 콧대를 빳빳하게 세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집안으로 데려온 게 아니라 밖에 숨겨둔 것이었어?!’

“지형!”

날카롭게 소리친 위씨 부인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 양심도 없는 인간! 나는 집안에서 자식들 낳고, 기르고, 집안일까지 챙겼는데, 노야는 밖에다 여인을 숨겨 놨단 말입니까!”

그리곤 그녀가 소령의 옷소매를 잡아챘다.

“금수방의 옷을 한낱 기녀가 무슨 돈으로 산단 말입니까? 노야가 사준 것입니까? 어서 말씀해 보세요!”

감히 그가 아내 위씨 부인에게 이실직고할 수가 있겠는가?

지형이 머뭇대며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말이오? 내가 어찌 그러겠소, 당신이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이지…….”

옆에 있던 소령이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이자 얼른 웃으며 대답했다.

“부인, 제가 비록 기녀이긴 하나 버는 돈이 적지 않습니다. 도성에 이름난 주루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기녀가 하룻밤 사이 받는 전두(*纏頭: 광대, 기생, 악공 등에게 그 재주를 칭찬하여 사례로 주는 돈이나 물건)가 얼마나 많은지 한 번 알아보시지요. 옷 몇 벌 정도는 저희도 살 수 있습니다.”

위씨 부인이 멈칫했다. 기녀가 돈을 얼마나 버는지, 관가의 부인인 그녀가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간혹 훈귀(*勳貴: 나라를 위해 큰 공로를 세운 귀족을 일컫는 말)집안이나 부유한 상인들은 이러한 여흥에 거액의 돈을 펑펑 쓴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던 것이다.

그 소릴 같이 듣고 있던 장씨 부인은 순간 불안한 마음에 얼른 소릴 질렀다.

“그 옷! 내가 금수방에서 본 것이네! 갓 뽑은 금실로 짠 비단이라 하였으니 못해도 백 냥은 되겠지? 그리고 자네 머리에 꽂은 금비녀도 얹은 보석의 색이 그리 고운데 수백 냥은 될 것 같은데? 손목에 찬 팔찌도 옥색이 잔잔하니……. 지금 몸에 걸친 것만 다해도 천 냥은 될 것 같네만, 아닌가? 입고, 다는 장신구들이 지금 한 것들뿐이진 않을 테고, 받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모두 살 만큼이나 된단 말인가?”

장씨 부인의 계산이 착착 맞았다. 평소 크게 여유가 없다 보니 옷이며 장신구를 살 때 치밀하게 계산을 하며 사는 통에 시세를 정확하게 알고 있던 것이다.

‘이게 여기서 도움이 되는구먼!’

장씨 부인의 말에 증거를 잡았다고 생각한 위씨 부인이 지형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지형! 이래도 아니라고 발뺌을 할 셈입니까! 지난번 접대에 필요하다고 굳이 집들을 팔아 가져간 돈도 다 저 여자에게 쓰신 것입니까!”

“부인, 부인…….”

지형이 연신 빌었다.

“아니요, 진짜 아니오.”

“아니십니까? 장부를 가져오실 수 있겠습니까?”

장씨 부인이 계산을 하는 것을 본 위씨 부인은 갑자기 방안 사방을 살폈다. 보면 볼수록 그녀의 얼굴에 냉소가 끊이질 않았다.

“허! 기녀가 사는 꼴이 귀족들보다 더 화려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방안에 골동품들을 넣어 놓은 것이 아주 저보다 더 대단합니다, 그려?”

순간,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저건 제 사고(*私庫: 개인 창고)에 있던 것이 아닙니까? 언제 저것을 훔치셨습니까?”

그리고 눈에 익은 것들 몇 개가 더 나오자 위씨 부인의 분노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지형! 내 물건을 훔쳐 기녀에게 갖다 바쳐? 가만두지 않겠다! 여봐라, 여봐라! 저 천한 계집이 몸에 걸친 것들을 싹 다 벗겨내라!”

지씨 가문의 하인들이 달려 들어왔다. 곧이어 취태평의 사람들 역시 막으려 뛰어들어, 서로 밀고 당기는 싸움이 벌어졌다. 시끌벅적하게 소란이 일자 이를 구경하러 주변의 다른 손님들까지 몰려들었다.

그 모습에 장씨 부인이 흥분을 했는지 들고 있던 부채로 제 다리를 탁, 하니 내리쳤다.

‘이런 상황까지 벌어질 줄은 예상치도 못했네!’

본래 둘째 형님이 아주버님께서 기녀를 숨겨두고 있단 것을 알면 볼만 하겠다 싶던 것이 다가 아니었던가?

‘아주버님께서 저 기녀를 위해 거짓말까지 했을 줄은……!’

제 부인의 사고에 있는 것까지 기녀에게 갖다 바치다니, 어찌 그런 짓까지 한단 말인가?

‘잠깐!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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