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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1)화 (11/385)
  • 11화. 사는 것이 괴롭구나!

    지형이 간 곳은 음주가무를 즐기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풍광을 즐기는 손님 몇 사람이 드문드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지형의 뒤를 밟던 낙칠은 순간 입으로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지형이 이곳으로 온 까닭을 이제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기녀들이 지내는 곳이구먼!’

    지형이 그중 한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 * *

    “뭐라?!”

    장씨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쥐었던 부채를 부러뜨릴 뻔했다.

    그녀 앞에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선 낙칠은 단호하게 말했다.

    “소인이 확실히 보았구먼요. 이노야께서 그 건물에 한밤중까지 계셨다가 취태평이 문 닫을 시각이 되어서야 다시 밖으로 나오셨습니다요.”

    그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소인이 풀숲에 밤새 숨어있느라 모기 놈들이 소인 손을 죄 뜯어 놓은 것 좀 보십시오.”

    낙칠의 울퉁불퉁한 손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은 장씨 부인은 얼른 손을 내저어 낙칠이 다시 제 손을 숨기게 했다.

    지온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던 장씨 부인은, 형님댁에 그리 많은 돈이 있다면 분명 어딘가에 돈을 쓸 것이라 생각했다.

    ‘안 쓰고 배겨? 몰래몰래 쓰고 있을 게 틀림없지!’

    논밭을 사들이거나, 오래된 서화나 그림 같은 골동품을 수집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장씨 부인은 둘째 아주버님이 기녀를 숨겨두고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둘째 형님의 성질머리를 생각하니 장씨 부인의 눈썹이 춤을 췄다.

    “그리 착실해 보이시던 아주버님께서 뒤로는 그런 짓을 하고 계셨다니. 형님께서 아시면 뒷목 잡고 쓰러지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방 안을 서성거리던 그녀가 다시 지시를 내렸다.

    “계속 따라다니면서 그 건물에 있는 이가 누군지 알아봐. 그리고 둘째 아주버님께서 며칠에 한 번씩 가시는지, 한 번 가시면 얼마나 머무는지도 함께 알아보도록 해.”

    “알겠구먼요.”

    기분이 좋아진 장씨 부인이 시중 시녀에게 말했다.

    “은자 두 냥을 가져다 낙칠에게 주거라. 밖에서 일을 보자면 돈이 들게야.”

    그리곤 잠시 생각을 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취태평이면 평범한 곳이 아니니, 은자 다섯 냥을 줘.”

    입이 귀에 걸린 낙칠이 연신 대답했다.

    “소인이 아주 제대로 알아볼 테니, 부인은 마음 푹 놓고 계시면 되구먼요!”

    * * *

    지온 역시 경악에 휩싸여 있었다.

    “뭐라고? 황위에 오르시기 전 폐하가 의안왕(宜安王)이셨단 말이야?”

    덩달아 놀란 서아가 멍하게 대답했다.

    “네? 네…….”

    서아가 말했다.

    “삼 년 전, 지난 태자께서 외부로 유학을 떠나셨다가 해구(海寇)를 만나셨어요. 선제께서 그 소식을 들으신 후부터 몸이 나빠지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안왕께서 황위를 계승 받으셨고요…….”

    지온은 눈을 꾹 감았다.

    깨어나고 보니 이미 천우(天佑) 3년이라기에 그녀는 태자가 진작에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내심 그래도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새로 제위에 오른 이가 의안왕이라니. 그렇게 됐단 말인가! 그리 되었단 말인가!’

    “무애해각(無涯海閣)은?”

    지온이 물었다.

    “무애해각은 어떻게 됐어?”

    “무애해각이요?”

    잠시 멈칫했던 서아가 나중에서야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아, 태자 전하께서 수업을 받으시던 서원이요? 듣기론 해구(海寇)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모두 타버리고 없어졌다고 하던걸요?”

    “남은 사람들은 있대?”

    서아가 멀뚱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저도 모르겠어요.”

    일개 시녀일 뿐인 서아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겠는가? 무애해각에 해구들이 들이닥쳤던 것을 아는 것도 과거의 태자 때문이었다.

    지온이 계속 물었다.

    “그럼…… 무애해각의 산장(*山長: 서원 학자에 대한 경칭)인 옥형(玉衡) 선생은?”

    “아! 그건 저도 알아요!”

    서아가 얼른 대답했다.

    “옥형 선생도 같은 날 변고를 당하셨어요. 그래서 지난 몇 년간 선생의 기일에 많은 학자가 오송원(五松園)을 찾아 참배했어요.”

    ‘역시 그랬구나. 좋은 일은 늘 어긋나지만, 나쁜 일은 틀림없이 맞아드는 구나.’

    그녀는 자신의 조부가 활에 맞는 것을 직접 목도했다. 자신이 바다에 떨어지고 있을 때 서원엔 이미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태자 전하가 제위에 올랐으니 할아버지의 죽음도 헛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그러나 결과는 최악을 향해 흘러갔다.

    조부가 돌아가셨고, 태자 역시 죽었으며 자신 역시…… 죽고 말았다.

    서원이 불탔다.

    조부의 피땀도 함께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

    ‘해구가 웬 말인가! 모든 것은 음모였다.’

    “큰아가씨?”

    다시 정신을 차린 지온이 말했다.

    “가서 서책을 좀 뒤적거려놔. 볕에 상할 수 있으니까.”

    “네, 아가씨.”

    * * *

    며칠 지나지 않아 낙칠이 다시 보고차 장씨 부인을 찾았다.

    “부인, 소인이 사람을 찾아 알아보았구먼요. 평소 취태평에서 어용문인 노릇을 하면서 밥 벌어 먹고사는 한량이 하나 있는데, 그자 말에 따르면 그곳에 소령이라는 무희가 살고 있다했습니다요. 원래 노야는 사흘이나 닷새에 한 번 취태평에 들리셨다는데, 요즘은 무슨 일인지 매일 가시는 것 같더구먼요.”

    장씨 부인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이상할 것도 없지. 사내들이야 심기가 복잡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더냐? 집에 와봐야 마누라 눈치만 봐야 하니 부드러운 치마폭에 취하는 것이 당연하지. 누가 둘째 형님더러 늘 인상을 구기고 있으라던가?”

    그녀가 부채를 살랑거렸다.

    “또 무엇이 있느냐, 계속 이야기해 보아라.”

    “네, 부인. 이노야가 취태평에 주기적으로 드나든 지는 이미 한, 두 해 되었구먼요. 허나 지금까지 어찌나 잘 숨기셨는지 그 한량도 소령의 애인이 씀씀이가 아주 크다는 것만 알고…….”

    “잠깐!”

    장씨 부인이 물었다.

    “씀씀이가 크단 말은 소령에게 좋은 것이라도 주었다는 것이냐?”

    낙칠이 대답했다.

    “한량이 말하길 소령이라는 무희는 옷도 천운각과 금수방의 것만 입는다는구먼요. 연지는 점강각의 것이고, 장신구는 노성가나 용봉루에서 만든 것들이라고 했구먼요. 듣자니 방에 깔아 둔 양탄자도 모두 파사(*波斯: 페르시아)에서 온 것이고, 금이며 옥이며 장식이 어찌나 휘황찬란한지 대갓집 아씨들 규방보다 더 화려하다했습니다요.”

    장씨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둘째 아주버님도 대단하시지, 천운각의 옷은 우리도 한 해 내도록 해봐야 딱 한 벌 밖에 못 지어 입는지라 밖에 나갈 때나 간간이 입는 것을…….”

    생각할수록 질투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천운각과 금수방은 도성에서 가장 좋은 옷가게라 옷 한 벌에 수십 냥을 호가하는 곳이 아닌가? 점강각 역시 도성에 딱 하나뿐인 특별한 연지 점포라 자신도 지난번 점강각에서 산 밀고(蜜膏)는 아까워 쓰지도 못하고 있었다. 노성가와 용봉루는 장신구를 만드는 손기술이 도성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었고 그 모양 역시 도성 최고로 새롭고 신선한 곳이었다.

    ‘둘째 아주버님께서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기녀에게 그리 바치다니. 달에 수백, 아니 천 냥은 족히 들어가지 않겠는가? 우리 집안은 일 년 내내 손에 들어오는 돈이라고 해봐야 겨우 몇 푼인데! 우리 노야, 이 바보 같은 사람은 이래도 제 형님과 얼굴 붉힐 생각이 없으니!’

    화가 치민 장씨 부인이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요즘 사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어떻게 해서든 형님을 괴롭게 만들어야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무슨 수를 내야겠어…….”

    그녀가 홀로 중얼거렸다.

    * * *

    유씨 가문과의 혼사가 바람에 날린 겨 마냥 날아가 버린 후, 위씨 부인은 한동안 바깥 출타를 하지 않았다.

    다들 지씨 가문과 유씨 가문에 혼담이 오간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없는 일이 되었으니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만난단 말인가?

    그녀는 다른 이들이 뒤에서 무슨 소릴 쏟아내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들리는 듯했다.

    거기에 더해 지서의 혼사가 정말 어려워졌다.

    제 딸이긴 했지만, 지서의 외모는 반반한 축에 속했고, 예의범절 역시 선생을 불러다 가르쳤으니 문제도 없었다. 집안 역시 대대로 문관을 배출한 학식 있는 집안인데 어찌 이리 혼사가 잘 풀리지 않는단 말인가?

    마음에 드는 집안에 슬쩍 연통을 넣어 봐도 늘 다음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지서가 못한 것이 무엇이라고?’

    위씨 부인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직 인연이 오지 않은 게 아닐까요?”

    장씨 부인은 입으로는 위로를 건넸지만, 속으론 콧방귀를 뀌었다.

    ‘흥! 지서를 들이미는 집안들이 감히 어떤 집안인데?’ 

    위씨 부인은 명문세가가 아니면 조정 중신가(重臣家)에, 서자는 또 눈에 안 차 반드시 적자를 원했다.

    지서가 제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하더라도 함께 어울리는 규수들까지 지서의 성격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런 명문가 사람들 중에 눈이 밝지 않은 이들이 어디 있다고…….’

    위씨 부인을 흘끔거린 장씨 부인이 떠보듯 입을 열었다.

    “형님, 제게 일이 좀 있어 의견을 여쭐까 합니다.”

    위씨 부인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말해보시게.”

    “실은, 저희 노야가 일하는 곳에 나이든 주부(*主簿: 관직명) 하나가 퇴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여, 저희가 조금 손을 쓰면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위씨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동서, 집안 사정이 어떤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가산이 적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 대부분 고향 집에 보내시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 많지 않네. 우리가 자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논이고 밭이고 함부로 팔아 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서방님께서 영전하려 하시면 형과 형수 된 도리로 당연히 도와야 마땅하나, 정말 내어줄 수 있는 금액이 많지 않네…….”

    “얼마나 되는지요?”

    장씨 부인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저희 부부도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이 조금 있습니다. 형님께서 어느 정도만 채워주시면 충분한 금액이 될 수 있을 것이에요.”

    위씨 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삼백 냥? 조금 더 짜내보면 오백 냥까지 될 것 같네.”

    장씨 부인이 고개를 떨구자 위씨 부인이 진심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동서, 집안에 정말 돈이 없네. 그 오백 냥도 우리 개인 돈에서 남은 것이야. 작년에도 자네가 영전해본다며 한 번 받아가지 않았었나, 그래서 우리도 얼마 남은 것이 없네. 아니면 이번엔 그냥 넘어가는 것이 어떤가? 다시 몇 년 더 모아 한 번에 수천 냥 정도 내면, 그땐 어쩌면 될 수 있을지 모르는 게 아닌가?”

    장씨 부인이 억지로 미소를 짜냈다.

    “형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만, 이번 기회는 놓치기가 정말 너무 아까워서…….”

    “그것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 자네도 우리 노야를 좀 보게. 벌써 수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영전을 못하고 있지 않은가? 돈만 있었으면 우리도 왜 이리저리 해보지 않았겠는가?”

    장씨 부인은 고분고분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속으론 욕지기를 쏟고 있었다.

    ‘둘째 아주버님이 영전을 못하는 건 일을 대충하기 때문이지 않나! 그것 때문에 상급자에게 꼬투리를 잡혀 그리된 것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야! 아니, 아니지. 형님더러 헛소리한다고 하면 큰조카가 집안사람들끼리 의가 상한다며 속상해하지 않겠어?’

    장씨 부인이 깊게 숨을 들이쉬며 화를 참고는 말했다.

    “네, 형님 말씀이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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