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0)화 (10/385)
  • 10화. 이상한 일

    점심 식사 후 오수(午睡)를 취하려 침상에 누운 장씨 부인은 이리저리 뒤척였다.

    십수 년을 위씨 부인과 형님, 동서로 지내온 그녀는 지형 부부가 어떤 사람들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의 딸이 시집갈 때 오천 냥이라도 내어주면 다행일 터였다.

    전이라면 장씨 부인도 오천 냥으로도 만족했겠지만, 지서의 지참금이 오만 냥이라는 것을 본 이후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치밀었다.

    위씨 부인의 친정인 위씨 가문은 세도 없는 가문이라 그녀가 시집을 올 때 가져온 혼수도 단출했으니, 지서의 지참금은 시아버님과 대노야가 모은 재산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재산에는 우리 노야 몫도 있는 것이 아니던가? 대체 무슨 근거로 형님댁이 다 가져간단 말인가? 그것도 모자라 지서 손에 쥐어서 시댁으로 보내려 하다니!’

    그러나 그녀 혼자 길길이 뛰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며칠이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그녀는 결국 밀려오는 수마에 넘어가고 말았다.

    마음에 화가 있으니 잠자리가 평온할 리가 없었다. 장씨 부인의 꿈으로 여러 장면과 대화들이 마구 뒤엉키어 지나갔다.

    장부의 글자들이 떠올랐다가, 갑자기 형님과 지서가 보였고 마지막엔 지온과 정자에 앉아 나눈 이야기들이 보였다.

    ‘숙모님, 무슨 일이든 증거가 있어야지요. 숙모님께서 오만 냥이라고 하시면 진짜 오만 냥이 있는 것입니까?’

    ‘집안에 그리 돈이 많은데, 그 돈을 다 어디에 쓰는 걸까요?’

    ‘그리 이야기를 하셔도 다른 이들은 믿지 않을 것이에요. 괜히 형님 내외를 음해한다 할 것입니다.’

    흠칫 몸을 떤 장씨 부인이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에구머니!”

    “부인!”

    시녀들이 황급히 뛰어왔다.

    “조용히 해, 조용히!”

    장씨 부인이 짜증스레 부채를 부치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 말이 맞지! 그리 돈이 많으니 분명 쓰는 곳이 있을 것이야. 증거가 없으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고!”

    “부인?”

    정신을 차린 장씨 부인은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가서 낙칠을 찾아 나를 만나러 오라 전하거라.”

    * * *

    주방에서 보내온 탕을 본 서아가 미간을 좁혔다.

    “다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야? 제비집을 흰목이버섯으로 바꾸면 우리가 못 알아볼 줄 알았어?”

    탕을 가져온 하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어요! 오늘은 원래 흰목이버섯탕이에요. 위씨 부인께서 집안에 지출이 많아 아껴 쓰라고 하셨거든요.”

    “아무리 아껴도 아가씨 것을 아끼면 안 되지! 설마 제비집탕 한 그릇도 못 드실 정도일 라고!”

    “못 드실 정도 맞아요.”

    하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말에는 가차가 없었다.

    “큰아가씨께서 유씨 가문과의 혼약을 무르셨잖아요. 위씨 부인께서 급히 유씨 가문에 용서를 구하러 가셨어요. 용서를 구하는 게 뭐겠어요? 당연히 선물이죠.”

    서아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유씨 가문에서 이 혼약을 얼마나 무르고 싶어 했는데, 위씨 부인이 용서를 구할 필요가 뭐가 있다고!’

    그녀가 다시 무어라 이야기를 하려 할 때, 누군가 막아섰다.

    “서아!”

    수수하게 차려입은 작고 연약해 보이는 부인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낭하(*廊下: 하인이 기거하던 방)에 서 있었다.

    “대부인!”

    서아는 너무도 속상하고 부끄러웠다.

    대부인 정씨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하녀에게 말했다.

    “알겠으니, 가봐.”

    하녀가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정씨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서아를 향해 말했다.

    “앞으론 네가 직접 만들 거라. 조금 이따 내게 와 제비집을 챙겨가.”

    “네, 대부인…….”

    정씨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자 지온이 창문을 닫았다.

    지온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계모의 정체는 대체 뭐지? 분명 무공을 할 줄 아는데 왜 이 내원에 틀어박혀 다른 이들의 통제를 받고 있는 거지?’

    이 혼사만 무르면 곧장 이 집을 떠날 생각이었던 지온은, 계모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자 도리어 떠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 * *

    볕이 드는 좋은 날씨였다.

    지온은 시녀 셋을 불러 모아 서책들을 널어 볕에 쬐었다.

    대노야가 세상을 떠난 후 아무도 책궤를 관리하지 않았던지라, 책에 습기가 차거나 좀이라도 먹으면 너무 아까울 터였다.

    책들을 모두 널고 다시 안으로 들어온 서아는 서탁에 앉아 글을 쓰는 지온을 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곧은 자세로 붓을 든 모습이 마치 교범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다만 획을 긋는 속도가 무척이나 느렸다.

    흘끔 지온의 서예를 본 서아는 진심 어린 탄성을 작게 뱉었다.

    “아가씨, 필체가 정말 예뻐요!”

    지온이 그녀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글공부한 적이 있어?”

    서아가 부끄러운 듯 대답했다.

    “겨우 몇 글자 아는 정도에요. 전에 대부인께서 집안을 건사하실 때 옆에서 도와드리느라 적어드리고 그랬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말없이 계속해서 글을 써내려갔다.

    이 몸은 무공은 배웠지만, 글을 그다지 쓰지 않아 붓을 드는 일이 어색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괜찮아. 그래도 몸이 건강하니까 계속 연습을 하면 곧 전처럼 할 수 있어.’

    반 시진쯤 글을 쓰고서야 멈춘 그녀가 숨을 내쉬며 손목을 주물렀다.

    서아가 눈치 좋게 차를 올렸다.

    “아가씨, 조금 쉬세요.”

    알겠다, 대답한 지온이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복도에서 유모 하나가 정씨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얼굴을 보니 화가 난 듯했다. 정씨는 그런 유모를 담담한 표정으로 좋은 말로 위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지온이 소리 없이 웃음을 지었다.

    큰 숙부네와 척을 졌으니 앞으로 편히 지내긴 힘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소심하고 일을 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줄 알았던 계모가 자신을 감싸고 있지 않은가?

    희화원에 위기가 닥쳤으나 그녀는 체감하는 바가 없었다. 지온은 여러 가지로 새어머니인 정씨에게서 보살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지온이 집으로 돌아온 후, 지온의 계모는 그래도 나름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딱 하나, 그녀의 혼사를 두고 나서주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평소 지온이 생활하는 것에 있어선 조금도 부족함 없이 대해 주었던 것이다.

    순간 무슨 생각이 든 지온이 서아를 불렀다.

    “서아야.”

    “네, 아가씨.”

    “새어머니께서는 어디 분이시지?”

    서아가 대답했다.

    “도성 출신이세요. 대부인의 외숙께서는 일찍이 향시에 급제를 하셨다가 유학을 하시는 중에 산도적을 만나셔서 다리를 다치셨다고 하셨어요. 그 후에 화정교(華亭橋)쪽에 붓과 먹을 파는 점포를 내셨고요.”

    “음.”

    지온이 생각에 잠겼다.

    ‘도성 토박이에 평범한 가문이라.’

    지금의 지씨 가문이라면 그러한 여인을 들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허나 대노야는 지씨 가문 삼형제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당시 사품의 벼슬에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그래도 꽤 높은 관직까지 오른 인물이었으니 충분히 더 좋은 세가의 여인을 부인으로 들일 수 있었다.

    어떤 연유로 그녀를 들이게 된 것인지 여인인 지온이 자세히 묻기엔 무리가 있었다. 더구나 서아 역시 나이가 어리니 아마도 정확한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할 터였다.

    지온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내가 너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서 도성에 대해 아는 게 없네.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볼래? 예를 들면…… 새로운 황제 폐하 이야기 같은 거 있잖아.”

    * * *

    지형은 가슴이 답답하고 무척 짜증이 났다.

    유씨 가문과의 혼사가 무조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그는 몇 개월 전부터 주변사람들에게 유씨 가문과 혼례가 있을 것이라 은근히 자랑하고 다녔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변고가 생겨버려, 결국 주변 동료들에게 한동안 비웃음을 사게 된 것이다.

    그는 늘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비록 관직 품계가 높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께서는 살아생전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셨던가? 과거엔 집안도 영화로워 당시엔 자신도 재상의 아들이라 상부공자(相府公子)라 불리지 않았던가?

    ‘그랬던 내가 오늘날 이리 권세를 잃고 다른 이들에게 조롱이나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니.’

    일이 끝나 퇴근은 하였지만, 그는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혼사가 물거품이 된 후 딸 지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물건을 깨부수고 있었고, 그의 부인은 축 늘어진 얼굴로 날카로운 말만 쏘아대고 있었다.

    ‘일하며 동료들에게 시달린 것으로 충분히 울적한데, 퇴근하고 집에서까지 부인과 딸의 눈치를 봐야 하다니.’

    몸종이 마차를 끌고 다가오자 지형이 순간 생각을 하곤 말했다.

    “취태평(醉太平)으로 가자.”

    그러자 잠시 머뭇거린 몸종이 완곡한 어조로 말했다.

    “부인께서 일찍 돌아오시라 하셨습니다요.”

    그러나 지형은 신경도 쓰지 않고 대꾸했다.

    “일찍 집에 가 뭐하려고? 또 이죽거리면서 욕이나 하는 소릴 듣겠지! 사내가 밖에서 하는 일까지 부인이 상관할 바가 아니니 어서 취태평으로 가!”

    “알겠습니다.”

    * * *

    취태평은 주루였다.

    도성에 있는 큰 주루는 저마다 특색들이 달랐다.

    절계루는 음식 맛으로 유명했고, 영악루(永樂樓)는 가무(歌舞)가 뛰어났다. 그중 취태평은 뛰어난 풍광으로 호평이 자자한 곳이었다.

    지형이 취태평에 들자 어용문인(*御用文人: 권세 있는 이에게 빌붙어 지내는 문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따라 들어갔다.

    그 사내는 바로 장씨 부인이 찾았던 낙칠이었다.

    천하 걸출한 인물들이 모이는 곳이 도성이다 보니, 큰 주루들은 제각기 다양한 특색을 내세워 손님을 끌었다. 취태평은 평범한 주루 건물이 아닌 고상하고 우아한 장원의 형태를 갖추어 사람들의 호평이 자자했다.

    취태평은 다섯 걸음에 사랑(舍廊)채가 한 채, 열 걸음에 누각(樓閣)이 한 동 나오는, 이를테면 작은 형태의 궁 같았다.

    취태평에는 수많은 이들이 오가고 있었는데, 그 열기가 뜨거웠다.

    낙칠이 문인으로 변장을 하고 있던 터라, 술심부름을 하는 점소이(*점원) 들은 그를 보아도 어느 집 어르신이 데려온 이겠거니 생각하고 마음껏 돌아다니게 놔두었다.

    “어휴, 취태평에서 대충 하룻밤만 놀아도 은자 수십 냥은 되겠구먼! 이노야께서 참말로 주머니가 두둑하신가보이!”

    낙칠이 중얼거리며 지형의 뒤를 쫒았다.

    지형은 앞쪽에서 놀지 않고 여러 건물을 지나 뒤쪽에 있는 후원으로 쑥 들어갔다.

    낙칠은 그를 따라 들어가려다가 제지당하고 말았다.

    낙칠이 좋은 말로 구슬려도 보고 위협 아닌 위협도 해보았지만, 상대방은 요지부동한 자세로 들여 보내주지 않고 그저 한 말을 반복했다.

    “함께 오신 노야께서 안으로 들어가셨더라도, 직접 나오시어 데려가셔야 합니다.”

    도무지 방법이 없던 낙칠은 어쩔 수 없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지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던 낙칠은 아주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지형이 혼자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낙칠이 멈칫했다.

    ‘이렇게 일찍 나오다니? 상에 요리도 올라가지 않았겠구먼?’

    거기다 옆에 있던 몸종마저 사라진 것이 아닌가?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낙칠은, 옆문으로 나가는 지형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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