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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9)화 (9/385)
  • 9화. 가족끼리 돈 이야기는 무슨!

    속에서 천불이 인 장씨 부인은 아침, 지익이 출근을 하는데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작은딸이 찾아와 보채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씻고 단장을 했다.

    지씨 집안의 넷째 아가씨인 지선은 이제 겨우 일곱 살이었다. 가장 놀기를 좋아할 때라 아침을 먹자마자 정원으로 놀러 가자며 장씨를 보챘다.

    그들이 사는 저택은 장씨의 시아버님이 도성에 왔을 때 마련한 것으로 넓은 데다 작은 정원까지 딸려 있었다. 도성 땅값이 비싸다 보니 이런 저택을 가진 그들을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몰랐다.

    장씨 부인은 또다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시아버님이 물려준 가산이 얼마나 되는지 계속 생각했다. 그렇게 장씨가 정신을 팔고 있을 때 문득 지선의 청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큰언니!”

    장씨 부인이 고개를 들어 지선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연못가 작은 정자에 지온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지온이 물고기들을 보고 있는 것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지선의 목소리에 지온은 고개를 돌려 이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씨 부인을 보더니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해왔다.

    장씨는 어쩔 수 없이 미소를 보이며 지선을 데리고 지온에게 다가갔다. 그러는 장씨 부인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예법이 많이 발전했구나! 전에 보던 아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단시간에 변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 아니던가?

    ‘설마…… 처음부터 고의였단 말인가? 일부러 망나니처럼 굴어 집안사람들이 자신을 업신여기게끔 하여, 가장 중요한 순간에 칼을 꽂아 넣은 것이야? 그럴 리가? 겨우 열여섯 살 난 어린 소녀가 그런 심계를 가지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그날 지온이 이야기하는 모습은 전혀 근본 없는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능운진인 역시 모두가 인정하던 훌륭한 고인(高人)이었다.

    ‘그런 고인(高人)을 9년이나 따랐으니 이리 자랐다 하더라도 이상하진 않지.’

    장씨 부인의 머리가 복잡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녀는 탁자 위에 올려진 간식에 시선을 빼앗겼다.

    작은 백색의 다기 위에 정교하게 만들어 올라간 떡은 꽃잎이 풍성하게 편 작약 같았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군침이 돌게 하는 향긋한 냄새마저 풍기고 있었다.

    나이가 어린 지선은 간식을 보자 눈을 떼지 못했다.

    지온이 가만히 미소를 짓고는 시녀를 시켜 지선에게 떡 한 조각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큰언니!”

    지선이 즐거워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자신의 딸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지온을 본 장씨 부인 역시 덩달아 마음이 놓였다.

    “이런 간식은 처음 보는구나. 어디서 산 것이냐?”

    장씨의 물음에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제가 만든 것입니다. 남쪽의 간식이라 숙모님께서는 아마 보신 일이 없으실 것입니다.”

    장씨 부인은 매우 놀랐다.

    “이런 것도 만들 줄 아는 것이냐?”

    지온이 네, 하고 대답을 했다.

    “그저 다른 이들이 만드는 것을 본 일이 있을 뿐이어요.”

    장씨 부인이 감탄하며 말했다.

    “남쪽의 간식은 참으로 정교하구나. 우리 집안의 본적(本籍)도 실은 남쪽인데 이주한 지 오래되어 그 풍습을 모두 잊었지.”

    지온은 그저 미소만을 지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른 일로 속을 끓이고 있던 장씨 부인은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너무도 침착한 그녀의 모습에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슬쩍 물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아는 것이냐?”

    그러자 지온이 눈썹을 들썩이며 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장씨 부인은 어제 본 일이 있었던 터라 그녀가 진짜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 집안과 유씨 가문과의 혼약이 없는 일이 되었다더구나.”

    지온은 그저 네, 하고 나지막하게 대답을 할 뿐이었다.

    장씨 부인이 계속해서 물었다.

    “지온이 넌 그리될 줄 알고 있었던 것이냐?”

    지온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증표를 제 손으로 직접 돌려드렸으니 혼약은 당연히 없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장씨 부인이 얼른 대꾸했다.

    “하지만 유씨 가문에서는 지서와도 혼인 의사가 없는 것 같더구나.”

    지온은 여전히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숙모님께서 말씀해주셔서 지금에서야 알았네요.”

    장씨 부인은 지온이 보이는 모습만으론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놀라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기뻐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마치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 보였던 것이다.

    ‘설마 어제 그 일 역시 우연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그랬다면 왜 그리 형님께 몇 번이고 되물으며 후회하지 않겠냐는 말을 했단 말인가?’

    장씨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네 큰숙모가 무척이나 화가 나셨다. 간밤에 그 집에서 크게 소란이 일었던 모양이더구나.”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가 되어요.”

    “걱정도 되지 않는 것이냐?”

    지온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제가 걱정을 해야 할 것이 있나요?”

    장씨 부인은 밤새 고민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네 아버지께서 남기신 것들 전부가 형님댁에 있지 않니? 그것들 모두 네가 시집을 갈 때 혼수로 보내려고 준비해두셨던 것들인데, 돌려받고 싶지 않은 것이냐?”

    지온의 얼굴에 그제야 경악의 표정이 걸리자 장씨 부인의 마음 한편이 시원해졌다.

    ‘그리 연기를 하더니! 이제 못 참겠지?’

    그런데 지온의 입에서 이어지는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다 같은 가족인데 나눌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으니 준비된 것들은 자연히 어르신 분들께서 관리하심이 옳지요. 돈이 무엇이 중요할까요, 그저 가족들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좋은 것이지요.”

    “…….”

    장씨 부인은 치미는 답답함을 삼켰다.

    ‘이 요망한 계집이 무슨 헛소릴 하는 것이야!’

    ‘요망한 계집’의 헛소리는 한마디로 끝나지 않았다.

    장씨 부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온의 진지하고 간곡한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지요. 저희 모두 한 가족이 아닌지요? 피는 물보다 진하고, 혈육의 정은 떼어내기 힘든 법이라 하였습니다. 이도 위아래가 부딪칠 때가 있는데 그로 인해 원한을 품을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큰 숙부님과 숙모님께 먼저 실례를 범하였지만, 그도 모두 말씀을 드려 풀었으니 문제는 없을 테지요.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제가 곁에 있지 못하였으니 제가 받아야 할 가산이 숙부께 보내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 숙부님만큼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지요…….”

    지온이 찻잔을 바라보자 서아가 다가와 차를 채워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큰 숙부와 숙모님 역시 저를 아끼십니다. 아직 규방을 나서지도 못한 제가 그 가산들을 직접 관리하는 것도 불안한 일이 아닐는지요? 그러다 다른 이들에게 속임이라도 당하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그것을 숙부님과 숙모님께서 도와주시어 제가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안하고 좋은지요?”

    장씨 부인은 속으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기기만이 참으로 수준급이야, 누가 들으면 전에 형님댁과 죽네 사네 싸웠던 건 다른 사람인 줄 알겠어! 한 번 죽고 나더니 머리라도 바뀐 것 같지 않은가?’

    지온이 어조가 따뜻하게 바뀌었다.

    “저도 작은 숙모께서 저를 아껴주려 하시는 말씀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씀은 앞으로 쉽게 하지 마시어요. 혹시나 다른 이들이 들고 숙모님께서 이간질이라도 한다 생각하면 큰일이 아닙니까?”

    “…….”

    장씨 부인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차마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온이 작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숙모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꼭 큰 숙부와 숙모님께서 제가 지참금으로 가져갈 가산을 탐내시는 것 같습니다. 모르는 이들은 바람 소리만 듣고도 비가 온다 하는 법이니, 괜한 소문을 막을 수가 없지요. 그러다 나중에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숙모님까지 엮이면 괜히 숙모님만 양쪽으로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더구나, 가문에 돈이 얼마나 있으려고요!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싸우면 다른 이들이 비웃지 않겠는지요?”

    순간 장씨 부인의 마음이 흔들렸다.

    ‘설마 돈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위험한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장씨 부인이 슬쩍 주위를 살피자 시녀들도 마침 지선을 데리고 구곡교(九曲橋) 위에서 놀고 있는 터라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지온아, 네 큰숙모가 지서를 위해 준비한 혼례비용이 얼마인 줄 아느냐?”

    그리곤 잠시 말을 멎었던 장씨 부인이 더욱 강한 어조로 이어갔다.

    “자그마치 오만 냥이다! 오만 냥도 지참금만 오만 냥이고 거기에 가구며 옷까지 지어 보내면…… 네 큰 숙부의 한직 녹봉으로 오만 냥을 어떻게 벌 수 있겠느냐? 그게 다 네 조부님과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것이지. 네 조부님은 차지하고 네 아버지께선 경영에 참으로 밝으신 분이셨다. 오래 외관으로 계시면서 집으로 얼마나 많은 은자를 보내셨는지 몰라. 그 오만 냥 중에 대부분은 네 아버지가 번 것이야.”

    지온이 눈을 끔벅거리며 반문했다.

    “…오만 냥이요?”

    그녀의 놀라는 얼굴을 보자 장씨 부인은 그제야 가슴에 맺혀있던 화가 조금씩 가시는 기분이었다.

    ‘아주 놀랐을 것이다!’

    지온은 능운진인을 따라 사방을 다녔으니 입고 먹는 것이야 걱정이 없었겠지만, 수행하는 처지였으니 분명 낭비하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은자 몇 냥이면 달을 살 수 있는데 오만 냥에 놀라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눈을 끔벅이던 지온이 드디어 말했다.

    “작은 숙모님, 제게 농을 하시는 것이지요? 저희 집안에 오만 냥 현물이 있을 리가요!”

    “당연히 진짜지!”

    장씨 부인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지서의 혼례를 위해 네 큰숙모가 벌써 일 년을 바삐 다녔다. 네가 시집을 갈 때가 되면 오천 냥이라도 있을지 모르지.”

    도성의 관례를 생각하면 관가의 소저들이 시집을 갈 때 오천 냥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것이었다.

    장씨 부인은 오만 냥만 떠올리면 가슴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자 지온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숙모님, 무슨 일이든 증거가 있어야지요. 숙모님께서 오만 냥이라고 하시면 진짜 오만 냥이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봐도 오만 냥이나 있을 것 같지 않은 집안인걸요!”

    장씨 부인이 금방 대답을 하려 했지만, 곧바로 그녀의 말은 지온에게 막혔다.

    “그리 이야기하셔도 다른 이들은 믿지 않을 것이에요. 괜히 형님 내외를 음해한다 할 것입니다. 집안에 그리 돈이 많은데, 그 돈을 다 어디에 쓰는 걸까요? 휴, 아닙니다, 숙모님. 아무튼 가화만사성이라 했으니 더 말해봐야 무엇하겠는지요?”

    그리곤 한숨을 쉬며 지온이 몸을 일으켰다.

    “서아야, 우린 그만 돌아가자꾸나.”

    “네, 아가씨.”

    장씨 부인은 서아와 함께 멀어지는 지온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장씨 부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한참을 떠든 것이 날 가르치려고 든 것이었잖은가! 어딜 봐서 조카란 말이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어머니인 줄 알겠구먼!”

    지익과는 말이 통하질 않고 지온은 자신의 말을 믿질 않으니, 장씨 부인은 속에서 천불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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