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8)화 (8/385)
  • 8화. 황금색 돌덩이에 불과한 것들

    ‘내 혼약으로 귀한 집에 시집을 가겠다니. 세상일이 그리 쉬울 줄 알았어?’

    마음속에서 또 다른 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온이 조용히 탄식하며 불쑥 솟아오르는 좋지 않은 감정들을 내리눌렀다.

    ‘봐, 이제 저들도 못하게 됐어.’

    “큰, 큰아가씨…….”

    서아가 덜덜 떨자 지온이 거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많이 놀랐어?”

    서아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그저…… 아가씨께 방법이 있으셨던 것이면 왜 처음엔 그리하셨는지 몰라서요.”

    천천히 머리를 빗던 지온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한 번 죽고 나서야 생각이 바뀌게 된 거지. 이 집에 온 후에, 저들은 일부러 날 건드려서 내가 무도한 행동을 하게 만든 거야. 전에는 그게 안 보여서 날뛰기만 했는데 오히려 난 저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던 거지. 밖에서 보니 그 말이 꼭 맞더라, 저들이 저렇게 하는 건 이 혼약을 가로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야.”

    큰아가씨가 자분자분하는 설명을 서아는 조용히 들었다.

    “유씨 가문은 저들과 한패가 아니었어. 그러니 숙부님 댁에선 먼저 내 평판을 망가뜨려야 했겠지. 그래야 유씨 가문이 혼약의 상대를 바꾸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사실 숙부님 댁에서는 이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어.

    하지만 중요한 건 유씨 가문이 실은 이 혼사를 원치 않았다는 거야. 선조께서 정하신 것이니 어쩔 수 없이 하는 혼인인데, 만약 혼약이 깨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가 거울 속 서아를 보며 빙긋 웃었다.

    “지서와 오가던 혼담도 깨지겠지. 유씨 가문이 머리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신은 큰아가씨를 모시라며 보내진 사람이니, 자신은 당연히 큰아가씨 편이 아니겠는가? 매번 큰아가씨가 저들에게 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탔는지 모른다.

    ‘그러나 또 큰아가씨의 성격이 불같아 이노야댁 이야기만 꺼내면 화를 내니, 그동안은 무어라 말도 꺼내지 못해왔는데…….’

    오늘의 이 결과가 참으로 깨소금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생각을 마친 서아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그런데 이렇게 하시면 이노야와 척을 지게 되는 게 아닌가요?”

    “척을 지면 지는 거지.”

    지온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아가씨!”

    서아는 아직 그녀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하고는 얼른 말했다.

    “지금은 이노야가 이 가문의 주인이에요. 다른 것들은 몰라도 집안의 재산도 모두 이노야의 손에 있단 말이에요. 대노야께서 생전에 대부인께 남겨주셨던 재산도 지금 모두 위씨 부인께서 관리하고 계시는데…….”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척을 지지 않았으면 저들이 그것들을 돌려주었을 거라 생각해?”

    “그건 당연히…….”

    아니었다.

    서아는 기운이 빠져버렸다.

    지온은 구슬 비녀를 보석함에 넣고는 몸을 일으켜 창을 열었다.

    바깥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그녀의 소매를 흩날리고 머리칼을 흔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옷 위에 흔들리며 어우러져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을 자아냈다. 

    지온은 곧이라도 선녀처럼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창가에 선 선녀님이 말했다.

    “속세의 한낱 황금 돌덩이 때문에 양심을 버리면, 고상한 마음에도 더러운 흙이 묻지 않겠어?”

    금전으론 자신을 우롱할 수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속세를 벗어나 해탈하신 듯 말씀하시지만, 아가씨가 입은 옷도 모두 속세의 것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입을 뻐끔거리던 서아는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지온의 미소가 어쩐지 다른 뜻이 있는 듯하여 꿀꺽 삼켰다.

    “피곤하다.”

    지온이 창을 닫았다.

    “우선 좀 잘 테니까 누가 오든 깨우지 마.”

    “네, 아가씨…….”

     * * *

    지온은 금방 잠이 들었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끝도 없이 펼쳐진 물결에 휩싸였다. 동시에 뭍에서 들려오는 죽고 죽이는 소리가 멀고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종화!”

    비명을 지르듯 이름을 부르며 잠에서 깨어난 지온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보랏빛 침상의 휘장이 눈으로 들어왔다. 늘 보던 것이 아니었다.

    한참이 흐르고서야 그녀는 꿈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아, 그렇지. 지금 난 지씨 가문의 적장녀, 지온이지.’

    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무예를 익힌 신체는 귀와 눈이 밝아 쉽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큰아가씨는 자는 것이냐?”

    “네, 대부인.”

    “다들 혼약을 물렀다고 하던데, 어찌 된 일이야?”

    “네, 큰아가씨께서 유씨 집안의 증표를 돌려주고 앞으로 각자 알아서 혼례를 올리면 되는 것이며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곧이어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온 것이냐? 동서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네…….”

    머뭇거린 서아가 불안한 듯 물었다.

    “큰아가씨께서 일을 치신 것일까요?”

    “아니다. 넌 아가씨만 잘 보필하거라.”

    발걸음 소리는 작아 거의 들리지 않았는데 발걸음 소리는 금방 문밖으로 사라졌다. 더는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더 누워있던 지온은 그제야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재미있네? 조용하기만 한 대갓집 후처가 경신술(輕身術)을 쓸 줄 안다니.’

    * * *

    밤이 되었다.

    장씨 부인은 나한상에 누워 깜빡깜빡 졸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든 부채가 이따금 흔들리길 반복하던 중, 그녀의 남편인 지익이 돌아왔다.

    “노야 오셨습니까.”

    눈을 뜬 장씨 부인이 몸을 일으켜 그를 맞았다.

    장씨 부인이 그를 도와 외투를 벗기다 풍기는 주향을 맡고는 불만을 토로했다.

    “노야, 왜 이리 늦으신 것입니까? 대체 얼마나 마신 것입니까?”

    지씨 가문의 삼노야인 지익은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유씨 가문의 일로 둘째 형님이 어찌나 화가 나셨는지 모르겠소. 둘째 형수와 크게 다투시고는 날 찾아오셨소. 그리고 형님과 지금까지 술을 마신 것이오.”

    하녀에게 성주탕(醒酒湯)을 내오라 지시한 장씨 부인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 일은 뭐라 하십니까?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여지도 없다십니까?”

    “그렇소. 형님께서 유씨 가문에다 말을 해보긴 했는데 혼약서마저 저들에게 빼앗겼다고 하셨소.”

    지익이 사정을 설명해주곤 한숨을 내쉬었다.

    “유씨 가문과 사돈을 맺지 못하게 되었다니, 너무 아쉽게 되었소.”

    그는 진심으로 탄식했지만, 장씨 부인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쉬운 것은 둘째 아주버님과 형님이시지요, 저희와 무슨 상관이랍니까?”

    흠칫 놀란 지익이 말했다.

    “어찌 그리 말을 하시오? 유씨 가문과 사돈을 맺게 되면 우리도 덩달아 덕을 볼 수 있을 텐데!”

    남편이 옷을 갈아입게 하고 세수까지 거든 장씨 부인은, 시녀들까지 모두 물리고서야 입을 열었다.

    “노야, 이리 오래 봐놓고도 아직 둘째 형님 내외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신단 말입니까? 남의 덕이나 볼 줄 알지, 그분들이 언제 다른 이들에게 덕을 끼친 일이 있기나 했었느냔 말입니다. 이 혼약도 본래 큰조카의 혼약이었지요. 처음부터 욕심을 부려 속이려 들지 않았다면 모든 걸 다 잃어버리고 혼약을 무르는 이 상황까지 왔겠습니까? 큰조카나 둘째 조카나 모두 노야의 질녀들인데, 유씨 가문과 사돈을 맺으면 저희야 덕을 보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지익이 머뭇대며 대답했다.

    “그러나 지온의 성질이 고약하지 않소. 그 아이가 유씨 가문에 시집을 갔다가 혹시라도…….”

    장씨 부인이 차갑게 웃자 지익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지서의 성격은 뭐 좋은 줄 아십니까? 그저 둘째 형님께서 수년간 철저하게 숨겨온 것뿐입니다. 지온이가 성격이 좋은 것은 아니나 그래도 저들처럼 속내가 음흉하고 악독하지 않지요. 둘째 지서는 몇 푼 안 되는 능력으로 눈은 하늘 끝에 달렸습니다. 오히려 그런 아이가 유씨 가문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복인지 화인지 모를 일이지요.”

    지익은 기분이 상했다.

    “어찌 그리 말할 수 있소, 아무리 그래도 같은 집안의 질녀가 아니오!”

    “같은 집안의 질녀이니 그 아이의 진짜 모습을 아는 것이지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장씨 부인이었다.

    “노야, 큰아주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큰아주버님께선 분명 앞으로 집안의 대소사는 형제가 서로 상의해서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노야의 둘째 형님께서 노야와 상의한 일이 무엇 있으셨습니까? 

    그리고 작년 노야께서 영전하려고 위, 아래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보내려고 했을 때 기억하시지요? 그때 둘째 아주버님께서 얼마를 주셨습니까? 삼백 냥입니다! 도성에서 삼백 냥으로 대체 뭘 한단 말입니까? 절계루(折桂樓)에다 사람이나 불러 놓고 식사나 한 끼 하자고요? 그때 그 일만 아니었으면 노야가 기회를 놓쳤겠습니까?”

    그러자 지익이 대답했다.

    “집안에 돈이 없기 때문이었잖소?”

    그러자 장씨 부인이 한 서린 얼굴로 노기탱천한 음성을 낮췄다.

    “돈이 없다니요! 둘째 형님이 지서, 고 앙큼한 계집에게 지참금으로 넣어주려 챙겨 놓은 돈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오만 냥입니다, 무려 오만 냥! 그 돈을 조금만 나누어 노야의 영전에 썼으면, 노야께서 아직도 영전하지 못하고 있겠습니까!”

    지익은 경악스러운 숫자에 넋이 나가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입을 벌리던 노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문에 돈이 그리 많았소…….”

    * * *

    장씨 부인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이 보았던 지참금 액수가 떠오를 때마다 치미는 화에 이불 끝만 잘근 씹었다.

    그 와중에 저녁에 했던 대화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 것인지, 드르렁드르렁 잠만 잘 자는 남편의 모습에 장씨 부인은 속에서 천불이 났다. 화를 참지 못한 그녀는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지익을 몇 번 꼬집었다.

    그러자 잠결에 모기에 물렸다고 생각한 지익은 대충 손을 흔들어 아내 장씨의 손을 철썩, 내리쳐버리곤 다시 몸을 돌려 잠을 계속 잤다.

    남편을 깨워 한바탕 화를 내려던 장씨 부인은, 바로 옆 곁채에서 자는 어린 딸을 떠올리며 일단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자기 전, 장씨에게서 지서의 지참금이 오만 냥이란 소리에 지익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었다.

    “잘못 본 거 아니오? 가문의 전 재산이 그 정도 되는 게 아니겠소? 이리 큰 집안을 건사하는 일이 쉽지 않으니 당장 현물을 준비하지 못하는 경우는 왕왕 있소.”

    그러자 장씨 부인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노야인 줄 아십니까? 바깥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르고, 그저 다른 이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사람 같으세요? 제가, 제 눈으로 직접 형님의 장부를 본 것입니다! 오만 냥은 적은 금액이 아니지요. 지난해부터 형님은 계속해서 집안의 가산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뭔가 이상하다 싶어 며칠 전에 어렵게 기회를 찾아 장부를 들춰보고서야 그리 많은 돈이 적혀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지서를 위해서만 지참금을 준비해 놨을 것 같으십니까? 두 아들은 어쩌고요? 그러니 형님이 사적으로 가진 돈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실 이 일을 생각하면 장씨는 큰조카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지온이 기둥에 머리를 박은 일로 집안이 어지러워진 바람에 정신이 산만해진 위씨 부인이, 장부를 그대로 놓아두고 갔고, 그 때문에 장씨 부인이 몰래 장부를 보게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후 지난 며칠간 장씨 부인은 장부에 적혀 있던 숫자만 생각하면 속에서 기름이 바글바글 끓는 것 같았다.

    아버님께선 돌아가시며 재산을 형제들에게 따로 나누어주지 않으셨다. 그 때문에 자신의 남편은 혼인하며 어르신들께 받은 몇 가지 외에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일 년 내내 버는 돈이라고 해봐야 겨우 천 냥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그런데 형님댁에 재산이 그리 많을 것이라 누가 알았냐고! 딸의 지참금으로 오만 냥을 챙겨줄 정도라면 본인들 수중엔 대체 얼마가 있단 말인가? 딸이 시집을 갈 때 혼수는 또 얼마나 해주려고?’

    생각을 마친 장씨는 남편에게 말했다.

    “노야, 생각을 해보세요. 아버님께서 십수 년을 요직에 계셨습니다. 아무리 청렴하다 해도 손에 돈 한 푼 없으셨겠습니까? 더구나 큰아주버님께서도 외관(*外官: 지방의 관직 혹은 관원)을 전전하시며 집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내시었지요? 두 분께서 돌아가시고 그것들을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지익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형과 형수를 상대로 싸우지 못할 사람이었다. 아내가 계속 그 이야기를 하자 그는 대충 일을 넘기려 했다.

    “우리 손에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설마, 나더러 형님에게 따져 묻기라도 하라는 것이오? 나중에 지언이 시집갈 때도 돈을 내주지 않으면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시오!”

    장씨 부인은 머리 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다.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자신의 큰딸 지언은 아직 매파조차 찾지 않는 어린 나이였다. 그런 지언이 시집을 가려면 3, 4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 한마디로 3, 4년을 미루다니! 사내가 참으로 강단도 없지. 본인 속 시끄러울 것이 싫어 제 부인과 아이가 억울한 걸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닌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