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물 건너간 혼사
짧은 시간,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유 대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저의 말이 참으로 맞네. 우리도 이견은 없네.”
지온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집안의 혼약은 이대로 끝을 내겠습니다. 앞으로 저와 공자 모두 각자 혼례를 치를 것이고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어요.”
유 대부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소저가 훌륭한 부군을 맞아 비단길을 걷길 바라겠네.”
“좋은 말씀 감사드리어요.”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는 위씨 부인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크게 잘못됐다, 뭔가 크게 잘못됐어! 혼약을 끝내고, 서로 상관도 없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녀가 아직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온은 이미 몸을 돌려 일어나 인사를 하고 있었다.
“큰숙모님, 저와 공자의 혼약은 서로 확실히 정리되었습니다. 앞으로 공자께서 어떤 분과 혼인을 하시든 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이어요. 지서와 공자와의 혼인이 순조롭기를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곤 지온은 입만 뻐금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위씨 부인을 내버려 둔 채 서아를 데리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 * *
한참을 넋을 놓고 있던 위씨 부인은 정신을 차리고 지온이 한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도 지온이 일부러 그런 소릴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단어 선택에 신중하지 못했던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지온의 입장에서 이것은 확실히 혼약을 무르는 것이 아니던가?
전에 그 난리를 칠 때 역시 입만 열면 혼약을 무르려는 것이냐 소리쳤기 때문에 자신들 역시 듣다, 듣다, 이골이 다 난 상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위씨 부인이 작은 희망을 품고 유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차를 마신 유 대부인이 오부인과 시선을 맞추곤 함께 몸을 일으켰다.
“일이 끝났으니 저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유 대부인, 그럼 저희 지서와 공자와의 일은…….”
유 대부인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쪽에서 막 혼사를 물렀는데, 어찌 바로 다른 혼사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부인께서 양해해 주시지요. 저희도 우선 노야께 말을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그렇습니까…….”
너무도 도리에 맞는 말이라 위씨 부인도 저들을 더 남겨둘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저 두 사람이 떠나는 것을 황망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유씨 집안 부인들이 마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눈으로 배웅한 위씨 부인은 문가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장씨 부인을 붙들고 물었다.
“동서, 내가 지금 이해를 잘못한 거 같네. 지금 부인들이 혼사를 없는 일로 하겠다고 한 겐가?”
* * *
분기탱천한 지서는 방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부수고 있었다.
“무슨 뜻이야? 그거 무슨 뜻이냐고! 자기가 그럴 능력이 없어서 유씨 가문의 눈에 들지 못하니까 내 혼사까지 틀어 막아버린 거 아냐? 어머니, 제발 방법을 생각해보세요!”
위씨 부인은 난리를 치는 지서 때문에 더욱 정신이 사나워져,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네 아비가 알아보러 가지 않았느냐? 넌 네 그 성질부터 죽여야 할 게다. 유씨 가문과 같은 집안은 교양을 가장 중히 본단 말이다.”
행동을 멈춘 지서는 참고 또 참다 결국 씩씩거리며 나한(羅漢)침상에 털썩 앉더니 울분에 차 말했다.
“어머니! 제가 허튼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진짜 그 계집이 양심이 없잖아요! 집에 돌아온 뒤에 저희가 큰아가씨라고 모시면서, 먹는 거며, 입는 거 뭐 하나 부족하게 해준 것이 있었나요? 그런데 그 계집이 어떻게 했나요? 말 한마디만 마음에 안 들면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워댔잖아요!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여인 평생에 가장 중요한 일을 두고 말 한마디 없이 저희를 싹 다 구덩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정말 악독하지 않나요? 집안에 독사를 키우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요!”
어두운 얼굴을 한 위씨 부인은 그녀가 쏟아내는 불평을 듣고 있었다.
유씨 가문의 두 부인이 돌아간 후, 그녀는 그제야 그 벌거숭이 계집이 처음부터 이를 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남편을 대신하여 파혼에 동의했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 계집은 곧장 그 말을 확실한 사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자신이 지서를 유씨 가문으로 시집보낼 수 있는 끈이 무엇이던가? 바로 시아버님이 맺은 그 혼약 덕분이 아니던가!
혼약이 사라진 지금, 유씨 가문에서는 자신들과 혼담을 나눌 이유가 없었다.
태사부의 권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지만, 지씨 집안은 위씨의 시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로 그때와 같은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위씨의 남편인 지형 역시, 홍려시(*鴻臚寺: 황실관련 의례를 관장하고, 사신 접대를 담당한 예부의 속사)의 한직에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유씨 집안의 둘째 공자 또한 얼마나 대단한 인재던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지서는 애초에 유씨 가문에 혼담조차 넣지 못할 규수였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와 곤혹스러워하던 위씨 부인의 귀에 지서의 말이 들렸다.
“어머니! 아니면 저희가 직접 유씨 가문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면 어때요? 이게 다 그 천한 계집이 함부로 입을 놀린 탓이고, 저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위씨 부인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너까지 나서서 더 일을 만들려는 것이야!”
이미 큰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어머니에게까지 혼이 나자 지서는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왜 저를 혼내세요? 그 천한 계집이 아니고 왜 저를 혼내시냐고요! 절 사랑하지 않으시는 거 아니에요?”
위씨 부인은 딸이 옆에서 시끄럽게 해대는 통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짜증이 나던 차에 때마침 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위씨 부인이 황급히 몸을 일으켜 맞으러 나갔다.
“노야!”
이노야, 지형이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들어왔다.
마흔에 가까운 그는 고상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마에 여러 겹 줄진 주름에서부터 불편한 심기가 드러났다.
“노야, 무어라 합니까?”
위씨 부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지서 역시 울음을 그치고 기대 가득한 얼굴로 아비를 바라보았다.
일이 터지고 위씨 부인은 곧장 남편인 지형에게 상황을 전했다. 내용을 전달받은 지형은 당연히 안 될 말이라며 곧장 유씨 가문으로 향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부인과 딸을 보곤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안 된 것입니까?”
위씨 부인은 마음이 달았다.
“어찌 모른 척을 할 수 있답니까? 노야, 아직 아버님과 유 노태사가 쓴 혼약서를 가지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혼약서 운운할 자격이 있으시오!”
한참을 빠져나갈 길이 없어 답답하게 가슴을 치던 노기가, 위씨 부인의 한마디에 터져 나왔다.
그가 소리쳤다.
“본래 이 혼약서가 우리 손에 있었으니 혼사는 전혀 문제가 없던 것이었소! 그런데 당신이 나도 혼약을 무르는 것에 동의했다고 해버리는 바람에 다 끝났소! 유씨 가문에서는 혼약서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오!”
“어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답니까! 그저 한 말이 문서로 남긴 것보다 더 믿을만한 것이랍니까? 노야……!”
지형은 아내인 위씨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 그 웃음에 위씨 부인은 냉수를 뒤집어쓴 듯 소름이 돋았다.
웃음을 그친 지형이 말했다.
“그 무슨 바보 같은 소리요? 유씨 가문이 어떤 집안인데! 그 집안사람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해놓고 없던 일로 할 수 있을 줄 알았소? 당신은 양심 없이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난 그럴 수 없소!”
화가 나서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한 심정에 위씨 부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제가 양심 없다 하셨습니까? 제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인데요! 다 노야의 딸을 위해서고, 노야가 유씨 가문과 사돈을 맺게 하려 한 게 아닙니까! 이 혼사에 노야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일이란 일은 제가 다 했지요. 그래서 어렵사리 유씨 가문의 인정을 받았던 것인데, 이제 와 저를 나무라시는 것입니까?”
“당신을 나무라지 않으면 또 누굴 나무란단 말이오?”
지형이 위씨 부인에게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증표를 교환하자 했을 때 당신이 유씨 가문 사람들을 불렀소. 그럼 당신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어린 계집 하나 찍어 누르지 못하면서 무슨 집안을 관리한다고!”
벌떡 일어난 그가 씩씩거리며 방안을 이리저리 돌았다.
“유씨 가문에 들자마자 당장 오노야가 나와 나를 맞더이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씨 가문에서 가지고 있던 혼약서를 꺼내더니 내 것도 달라고 했소. 안된다고 하고 싶었지만, 유씨 가문에서 그걸 가만 놔뒀겠소? 조금 전에 혼약을 물리겠다고 면전에 대고 말해놓고, 이제 와 다시 안 된다고 하다니. 우리가 유씨 가문과 관아라도 찾아가 서로 상고라도 할 것이오? 이는 사돈이 아니라 원수를 맺는 게지! 유씨 가문은 밉보일 수 있는 집안이 아니오!”
위씨 부인은 여전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정말 아무런 방법도 없는 것입니까?”
고개를 저은 지형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이미 사람들이 하는 소릴 들었소. 그 계집이 스승님의 복상을 위해 유씨 가문과의 혼약을 물렀다고, 의기가 넘치는 여인이라더이다. 유씨 가문이 돌아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 소문이 났겠소? 유씨 가문에서 일부러 퍼트렸단 말이오! 우리와 혼사를 끊으려 작정을 했다, 그 말이오!”
위씨 부인은 절망했다.
유씨 가문은 혼약을 무를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지서를 들이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벌거숭이 계집이 정정당당한 이유를 만들어 주었으니 그들이 그것을 잡지 않고 베기겠는가?
지씨 가문에선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가서 혼약은 여전하다고 소리라도 치란 말인가? 설령, 다른 이들이 그것을 믿는다고 해도 혼약의 대상이 지서로 바뀐 것은 어찌 설명하란 말인가?
제 것 같던 혼약이 한순간의 방심으로 훨훨 날아가고 말았다.
자신이 유씨 가문으로 시집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 지서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악! 이게 다 그 천한 계집 때문이야! 다 그 계집 때문이야!”
꺽꺽 울던 지서가 위씨 부인의 소매를 붙들었다.
“어머니, 이 일 그냥은 못 넘어가요!”
* * *
희화원으로 돌아온 서아는 아직 의혹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로와 의운이 조용히 그녀를 붙들고 물었다.
“어떻게 됐어? 문제없었어? 진짜 혼사를 물린 거야?”
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시선을 마주친 하로가 놀랍다는 듯 물었다.
“난리 안 치셨어?”
“안 치셨어.”
그리고 가만히 고민하던 서아가 다시 말했다.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의운이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잘 모르겠다니? 너도 자리에 있었던 거 아니야?”
그랬다. 서아도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상황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서아는 들어가 큰아가씨에게 물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두 시녀를 밀어내곤 방 안으로 향하며 말했다.
“내가 아가씨께 여쭤볼게.”
서아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하로와 의운은 의아해했다.
“바보라도 된 건가? 직접 봐놓고 난리를 친 건지 안 친 건지도 모른단 말이야?”
* * *
방으로 들어간 서아는 지온이 머리 장식을 꽂고 있자, 다가가 그녀를 도왔다. 그리곤 거울 속에 비친 지온을 흘끔거리다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큰아가씨, 아까 아가씨께서…….”
“음?”
지온이 미소를 지으며 서아를 보자 용기를 낸 서아가 물었다.
“아까 유씨 가문과의 혼약을 없는 것으로 한다 하셨잖아요. 그 뜻이 그러니까…… 둘째 아가씨께서 시집을 못 가게 되신 건가요?”
거울 속 미인이 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맞아. 내 혼약으로 귀한 집에 시집을 가겠다니. 세상일이 그리 쉬울 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