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6)화 (6/385)
  • 6화. 돌아온 증표

    위씨 부인이 당장에 지서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거라!”

    유 대부인마저 놀란 기색을 지었다.

    ‘저 소저가 능운진인의 제자라고 하였지? 분명 무공 실력이 뛰어나지 않겠는가? 설마하니 너무 화가 나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 생각인가? 설마……!’

    그 순간,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생각을 했다.

    시녀 중 누군가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며 어딘가로 숨었고, 다른 시녀는 주인을 구하여 공이라도 세우려고 용감하게 제 주인의 앞을 막아섰다.

    모두가 강도라도 만난 듯 행동하고 있을 때, 지온이 그들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곤 비수의 짧은 손잡이 부분을 붙잡고 가볍게 비틀었다.

    비수의 칼날 부분과 손잡이가 분리되며 안에서 물건 하나가 나타났다.

    다시 비수를 원래의 모양대로 돌려놓은 지온이 서아에게 건네곤 물건을 쥐었던 손을 펼쳐 보였다.

    “이것이 그해 저의 선조와 유 노태사께서 서로 교환하셨던 증표입니다. 제가 오래 가지고 있으면서 한 번도 몸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았습니다. 오늘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드리어요.”

    ‘누군가를 다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구나!’

    놀란 가슴을 두드리던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다 어색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순간 표정이 굳었던 유 대부인은 금방 표정을 회복하여 웃음을 지었다.

    “고생이 많았네.”

    그리곤 옆에 있던 시녀에게 눈짓했다.

    시녀가 옥패(玉佩)를 받고 수유인장(*獸鈕印章: 인장의 손잡이가 동물로 조각된 인장)을 건넸다.

    유 대부인이 말했다.

    “그 물건은 당해, 소저의 조부께서 우리 가문에 주신 것이네. 집안에서 보물처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으니, 지온 소저는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해보게.”

    잠시 살펴본 지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의 상한 곳도 없습니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유 대부인.”

    유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 대부인은 일이 이리 순조롭게 풀릴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증표까지 돌려받았으니 드디어 이 문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럼…….”

    유 대부인이 예의상 몇 마디 이야기하려던 찰나, 누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잠시만요!”

    유 대부인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물건도 다 돌려주고, 돌려받았는데, 이제 와 또 무엇을 하려고? 너무 늦은 게 아니야?’

    위씨 부인 역시 마음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갑자기 지온이 말을 끊고 들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눈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가며 지온을 나무랐다.

    “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자꾸 그리 깜짝깜짝 놀라는 행동을 하지 말거라. 그러다 귀한 손님들께서 놀라기라도 하시면 다들 지씨 가문에선 손님대접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손가락질하지 않겠느냐?”

    지온이 겸손하게 몸을 낮추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큰숙모님, 화를 늦추시어요. 그저 서로 증표를 돌려받았으니, 이 일 역시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렇습니다. 그래야 혹시 앞으로 말이 나오게 되더라도 두 집안의 우의가 상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

    위씨 부인이 미간을 좁혔다.

    “더 확실하게 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이야? 이미 모두 확실하게 하지 않았어?”

    지온은 그녀와 입씨름을 하지 않았다.

    “제가 조심스러운 것이라 생각해주시어요.”

    그러며 지온은 슬그머니 유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지온이 이토록 깔끔하게 물건을 돌려주었으니, 유 대부인도 지온의 체면 정도는 충분히 챙겨줄 생각이었다.

    ‘이 일을 마무리할 수만 있다면 몇 번 더 웃어 주는 것은 문제도 아니지!’

    그리곤 유 대부인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지온 소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편하게 하게. 두 집안은 대대로 교분을 쌓아온 집안이 아닌가? 그러니 크게 보면 지온 소저에게 나도 백모 소리를 들어도 될 것이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백모에게 말을 하시게, 이 백모가 소저를 도와 해결해 주겠네.”

    이 혼약에서 빈손으로 물러나는 것은 지온에겐 확실히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러니 자리를 양보해준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스승과 영별(永別)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자신의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 소녀였다. 한참 어린 나이에 천애고아가 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혼약자마저 빼앗겼으니 의지할 곳이 필요하긴 할 터였다.

    유 대부인도 지씨 집안의 장남이 세상을 떠나며 지씨 가문의 여러 가산이 이노야댁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남의 개인 재산이 있다 해도 저들이 그것을 지온 소저에게 좋은 마음으로 넘길 리가 없었다. 사내 없이, 여인이 홀로 남은 집안의 재산을 다른 이들이 꿀꺽 먹어버리는 일도 흔하지 않던가?

    만약 지온 소저가 재산을 원한다면, 자신이 지씨 가문에 압박을 넣어 돌려주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하면 지온 소저의 조부와 맺은 우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마음을 굳히자 유 대부인의 얼굴에 뜬 미소가 조금 더 진실해졌다.

    지온이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자신은 넉넉한 인정으로 그것을 들어주어 무리 없이 일을 마무리하면 서로가 웃으며 마무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씨 집안의 권세가 비록 크다고는 하나, 권세를 믿고 사람을 기만하는 집안은 아니야!’

    그리 생각을 하며 유 대부인이 슬쩍 위씨 부인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 일에 대해 유 대부인은 이미 위씨 부인에게 운을 띄워놓은 상태였다. 위씨 부인 역시 싫은 기색이 있긴 했지만, 반대는 하지 않았다.

    지온의 조부는 살아생전 십여 년의 세월 동안 황제의 총애를 크게 받아 남겨 놓은 유산이 적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유씨 집안과 문제없이 혼사만 맺을 수 있다면 대노야의 개인 재산은 지온에게 내어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유 대부인과 위씨 부인 두 사람은 사정이 빤하게 보이는지라, 지온이 요구하면 재산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지온의 입이 열렸다.

    “숙모님, 저와 유씨 집안의 혼약이 파기된 것에 대해 큰 숙부께선 무어라 하시는지요?”

    위씨 부인은 순간 멈칫했다.

    ‘그것을 왜 묻는 것이야? 우리 노야가 더 무슨 말을 해?’

    지온이 다시 물었다.

    “이 일에 대해 숙부께서도 동의하신 것인지요? 조부님과 아버지 모두 계시지 않으시니, 숙부께서 저의 가장 가까운 어른이십니다. 그러니 이런 큰일은 당연히 숙부께 의견을 여쭈어야 하는 것이 옳겠지요?”

    위씨 부인은 순간 정신이 멍했다.

    ‘설마 내 남편이 저를 위해 나서줄 걸 바라는 게야? 어디서 장난 같은 소릴 하고 있어?’

    그러나 유 대부인 앞인지라 그녀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대답했다.

    “네 숙부도 당연히 동의한 것이지.”

    그러나 지온은 끈질기게 계속 물었다.

    “숙부께서 무어라 하셨는지요? 이 혼사는 조부님께서 정하신 것인데 숙부께선 이대로 물러도 괜찮다 하셨습니까?”

    위씨 부인이 말을 조심하며 대답했다.

    “네 숙부께서 이르길, 조부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미 많은 것들이 달라져, 과거의 틀에 맞춰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 또한 많아졌다 하셨다. 오늘날의 사정이 있으니, 그에 맞춰 틀도 달라져야 하겠지. 네가 혼약을 무르고 싶다면, 혼사에 적당하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숙부와 숙모가 되는 우리는 네 의견을 존중할 것이야.”

    말을 마친 위씨 부인은 득의양양해졌다.

    ‘들었느냐? 이 혼사는 네가 무르고 싶어 한 것이다! 우리가 억지로 무르게 한 것이 아니야!’

    유 대부인이 자리에 있으니 눈치 없이 반박하려 해도 이미 늦은 것이었다.

    지온이 계속 물었다.

    “정말 확실하게, 절대 후회하지 않으시는 것이지요?”

    “당연하지.”

    위씨 부인이 확언하자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되었습니다.”

    위씨 부인은 지온이 웃음을 짓자 자신이 말실수한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에 실수는 없었다.

    위씨 부인이 계속 무언가 실수가 없었는지 생각하고 있을 때, 지온은 이미 유 대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큰숙모님께서 그리 말씀을 하시니, 그럼 유 대부인께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유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뭔가 잘못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어렴풋하게 무언가가 아른거렸지만 당장은 짚이는 것이 없어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 혼사는 선조께서 정하신 것으로, 제가 집으로 돌아왔으니 선조의 명을 따라 혼약을 준행하여 유업을 지켜야 함이 옳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과거 그때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요. 조부께서 세상을 떠나시었고, 저의 부모님마저 모두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저는 얼마 전 스승님을 여의었습니다. 

    스승님께선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분이시기에, 제겐 부모와 마찬가지지요. 그러니 저는 도리에 따라 스승님을 위해 복상해야 함이 옳은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어찌 공자님의 시간까지 허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여, 저는 이제 숙부의 동의 아래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님과의 혼약을 물리려 합니다.”

    그리곤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증표도 모두 돌려받았으니, 제 말에 유 대부인께서도 다른 의견은 없으시겠지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 대부인은 눈을 빛내며 눈앞에 소녀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자신이 평생의 보아온 미인 중 단연코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찡그리고 웃는 모습 하나하나 독특하면서도 품위가 넘치는 것이 소문 속 무도하고 황당한 소저가 전혀 아니었다.

    혼약의 당사자는 자신의 둘째 아들이었기에 이 혼사는 유 대부인 역시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씨 집안의 큰아가씨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유 대부인은 직접 조방궁(朝芳宮)에 걸음 하여 몰래 그녀를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 지온 소저는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는 있었지만, 행동거지에서 대갓집 규수가 가지고 있어야 할 자태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씨 가문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행실에 대한 소문으로 유 대부인은 지온에게 완벽히 실망했다.

    ‘어미가 되어 어찌 저런 여인을 아들에게 반려로 들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온 소저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을 때, 위씨 부인이 은근하게 혼약의 신부를 바꾸고 싶다는 뜻을 비쳤지만 유 대부인은 반기지 않았었다.

    그녀의 눈에 지서는 도성의 평범한 규수들과 다르지 않아 자신의 아들에겐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온이 돌아온 후 다시 위씨 부인이 의견을 비쳤을 때, 유 대부인의 마음이 흔들렸다.

    ‘지서가 부족하다 해도 다른 이들에게 비웃음을 살 만큼은 아니지 않은가?’

    이 생각, 저 생각을 한 끝에 그리 하기로 결정을 내렸지만, 유 대부인은 내심 아들에게 못할 짓을 한 것만 같아 얼마나 한숨을 쉬었는지 몰랐다.

    혼약은 이미 한 것이니, 유씨 집안이 아무리 권세가 막강하다고는 해도 그것을 마음대로 파기하여 유 노태사의 명성에 흠을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둘째가 억울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었어.’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소저가 그런 제 아들과의 혼약을 무르려 하고 있다니!

    ‘이 혼약을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유 대부인은 그제야 지온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오만가지 감정을 느끼며, 유 대부인은 지온에 대한 생각을 크게 바꿨다.

    ‘전에 들었던 소문들은 아마도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구나.’

    설령 예의를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물론 지온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온을 유씨 집안으로 들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태사부 같은 집안에서 며느리를 들일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고려하던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잃어 애초에 숙부와 숙모를 이길 수 없는 상황에 놓였던 소저였다. 그런 상황에도 이리 큰 함정을 파놓고 저들 스스로 뛰어들게 하다니!

    ‘저런 심계를 가진 여인을 들이면 화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더구나 유 대부인인 자신이야 이러한 결과를 환영하지만, 여전히 지온의 선택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리 서로 얼굴을 붉혀봐야 본인에게 좋을 것이 무에 있다고?’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은 소녀에게 숙부와 숙모는 당연히 복수해올 것이다. 부모가 남긴 재산을 얻지 못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고, 아무와 정혼을 시켜버리면 그녀의 일생은 그대로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상대의 살은 갈랐을지 모르지만, 자신은 뼈를 내준 꼴이었다.

    그리 강렬한 성미를 가졌다면, 작은 무시조차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대단해 보이긴 했지만 멀리하고 싶은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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