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5)화 (5/385)
  • 5화.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될 일!

    이풍당.

    장씨 부인이 떠나자 둘째 아가씨, 지서가 금방 일어서며 말했다.

    “왜 저러는 걸까요? 주었던 증표를 돌려받고 싶으면 그냥 말만 해도 되잖아요! 유씨 집안에서 다시 저를 원할까 싶어 저러는 걸까요? 증표를 쥐고 주지 않는 건 또 무슨 뜻인지, 누굴 위협하려고!”

    위씨 부인이 경고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서야!”

    그러나 위씨 부인의 일갈에도 지서는 물러서기는커녕, 입을 열어 외쳤다.

    “분명 우리 일을 망치려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요, 어머니!”

    위씨 부인이 그녀를 꾸중했다.

    “이 어미가 그것을 모를 것 같으냐? 저 아이가 무슨 짓을 하건 너는 유씨 집안으로 시집을 갈 아이다. 그러니 행동을 조심해야지!”

    위씨 부인은 조금 전 지온이 보인 자태를 떠올리곤 마음에 불안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유씨 가문에서 지서를 선택한 것은 지서가 규방에서 자라 교양이나 인품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씨 부인은 자신의 딸이 실은 무척이나 오만방자한 성품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신한 규수와 같은 모습은 모두 겉으로 꾸며낸 모습이었다.

    전에는 그래도 지서가 지온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그렇게 나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오늘 지온이 보여준 모습은 무척이나 제대로 된 규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벌거숭이 계집이 얼굴이 반반하니, 대충 흉내만 내어도 그럴듯한 모습이 나오는구나. 문제로군.’

    혼인 문제가 거론되자 지서의 기세가 수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씩씩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저는 뭔가 계속 속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위씨 부인이 차갑게 대답했다.

    “무슨 생각이긴! 유씨 집안의 둘째 공자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은 것이겠지. 그 반반한 얼굴로 공자의 마음을 바꾸고 싶은 것이야!”

    “네?”

    지서가 매우 놀라며 외쳤다.

    “어떻게 그렇게 수치를 모를 수가 있는 건가요? 어머니, 그럼 저희는 이제 어쩌지요?”

    위씨 부인은 표정 없는 얼굴로 시녀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한 모금씩 마셨다. 그리고 치솟던 화가 어느 정도 식고서야 입을 열었다.

    “조급하게 굴 것이 있겠느냐? 공자가 직접 얼굴을 비출 것도 아니니, 그 아이가 마음먹은 대로 될 리가 없어. 직접 유씨 가문(兪家)과 증표를 교환하고픈 모양이니,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될 일이다. 그때가 되면 후회하며 또다시 부끄러움에 기둥에 머리를 박으려 들지도 모르지!”

    그녀가 슬쩍 눈을 굴려 자신의 딸을 보았다.

    “너도 유씨 집안에 들어가면 매사 처신을 잘해야 할 것이다. 모든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선 안 돼. 손을 봐주고 싶은 이가 있다면 반드시 제대로 된 기회를 잡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그러나 지서는 위씨 부인이 먼저 한 이야기만 떠올리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제 어미를 보고 말했다.

    “아하, 언니를 크게 창피를 주실 생각이세요, 어머니?”

    그리곤 다시 불만을 토했다.

    “정말 죽지도 않는 계집이에요. 지난번에 그렇게 창피를 당해 기둥에 머리까지 박았는데 또 살아났잖아요. 꼴도 보기 싫은데 왜 깔끔하게 죽지도 않는 건지!”

    그런 딸을 보는 위씨 부인은 또다시 머리가 아파 왔다.

    ‘어찌 속내를 숨길 줄 모르고 이리 다 드러내는 것이야?’

    그녀는 유씨 집안과의 혼사를 더욱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다시 명망 높은 집안을 찾는 게 쉽지 않을 것이야.’

    * * *

    지온은 책궤(冊櫃)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방은 사랑채 안쪽에 있는 대노야가 사용하던 서재였다. 여러 개의 커다란 책궤 안에는 각양각색의 책들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서아는 이 책들이 조부님의 것이라고 했다. 지온의 조부가 세상을 뜬 후 대노야인 지온의 아버지가 이 서책들을 물려받았고, 그 후 그마저 세상을 떠났다. 서책에 흥미가 없던 이노야, 지형은 이 책들을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던 것이다.

    지온은 서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노야께서 이 서책들은 기괴한 내용에 정상적이지 않은 책들이라, 적게 보는 것이 좋다고 하셨어요.’

    지온은 책들의 겉표지를 살폈다.

    <술장기요(術藏機要)>, <청낭경(靑囊經)>, <노반유권(魯班遺券)> …….

    그녀가 작게 웃으며 가볍게 움직여 서책들을 한권한권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는 눈들이 참으로 없구나.’

    보관된 서책 중에는 진귀한 서책들과 희귀본이 많았다. 심지어 그녀는 세상에 한 권뿐인 서책도 발견했는데, 모두 보기 힘든 귀한 책들이었다.

    ‘무애해각(無涯海閣)도 이 서책들이 없을 텐데…….’

    옛 추억을 떠올리고 지온은 멍하니 정신을 팔았다.

    서아가 방에 돌아오자 고개를 든 지온은, 서아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야? 어머니께서 허락을 안 해주셨어?”

    갑자기 들린 지온의 목소리에 서아는 놀라 몸을 흠칫 떨며 머뭇거렸다.

    “큰아가씨…….”

    ‘내가 무엇을 하러 간 건지, 다 알고 계셨구나…….’

    서아가 속으로 걱정하는 사이, 지온이 일어나며 손을 탁탁 털고는 찻잔을 응시했다. 이는 서아에게 차를 따르라는 의미였다.

    “지레 놀라지 마. 이 일에 어머니는 끼어드실 수 없어. 내가 증표를 내놓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큰숙모님께 따로 부탁을 드리는 것도 어렵지 않으시겠어? 더구나 큰숙모님이 어머니를 얼마나 신경 쓰신다고, 안 그래?”

    차를 따르던 서아는 손이 벌벌 떨려 찻잔 밖으로 차를 흘릴 뻔했다. 서아는 놀란 얼굴로 지온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서 사정을 다 알고 계셨던 거야? 그럼 지금까진 대체 왜…….’

    자연스레 찻잔을 받아 든 지온이 두어 모금을 마시곤 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 * *

    차를 모두 마신 지온은 다시 쪼그리고 앉더니, 계속 서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어딘지 흥분한 모습으로 서아에게 이것저것 시켜댔다.

    “여기 있는 책들은 모두 꺼내놔. 내가 모두 확인한 것들이니까, 저 책궤들은 치우고.”

    “네…….”

    서아가 뭐가 뭔지 모르겠단 모습으로 대답했다.

    서아는 시키는 대로 서책들을 정리하면서 지온을 몰래 흘끔거렸다.

    ‘아가씨께서 어쩐지…… 전이랑 달라지신 것 같아.’

    지난번엔 말도 얼마나 똑 부러지게 하시는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무척이나 잘 알고 계신 것 같지 않던가?

    ‘그걸 아시면서 왜 굳이 직접 증표를 교환하시려 하는 걸까? 설마 다른 생각이라도 있으신 건가?’

    * * *

    며칠이 지나지 않아 유씨 가문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이풍당에서 사람을 보내오자, 지온은 대부인을 만나러 갔다.

    자그마한 키를 가진 정씨(丁氏)는 조용한 부인이었는데, 지온과의 나이 차이가 겨우 일고여덟 살 정도밖에 나지 않았다.

    후처로 들어온 그녀는 대노야가 세상을 떠난 후, 지씨 집안에서 자신이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그녀는 두문불출, 안채에서만 지내며 집안에 일어나는 일들에 관여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갑자기 떠났던 의붓딸이 집으로 돌아오더니, 이노야댁과 문제를 일으키자 정씨 부인은 다소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온이 그녀에게 이풍당에서 사람을 보내온 일로 의견을 물어보자, 정씨는 달리 의견을 내지 않고 말했다.

    “그리되었다니 다녀오시게. 일찍 해결할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나.”

    서아는 내심 탄식했다.

    ‘대부인마저 엮이기 싫어하시다니. 오늘은 아가씨께서 절대 일을 치시면 안 되는데. 저러다 또다시 자진이라도 하셔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면 어쩐단 말인가?’

    * * *

    알겠다고 대답을 한 지온은 곧장 문을 나섰다.

    이윽고 그녀는 서아와 함께 손님을 모신 곳에 도착했다.

    안에는 이미 낯선 부인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흔 전후쯤 된 부인 하나는 온화한 얼굴로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서른이 안 된 듯 보이는 여인은 단정하고 수려한 외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들과 대화하는 위씨 부인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고 자신의 어머니 옆에 조신하게 서있는 지서는 묻는 말에만 조곤조곤 대답하고 있었다.

    지온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안에 있던 이들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지온이 왔느냐?”

    함께 손님을 맞이하고 있던 장씨 부인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태사부의 대부인이신 유 대부인과 오부인이시다. 어서 와 인사를 올리거라.”

    유 대부인은 둘째 공자의 어머니였다.

    고개를 들어 지온을 바라보는 지서의 눈빛에 악의가 스쳤다.

    ‘공자님을 다시 보고 싶었다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말 하나도 모르네! 공자님이 어떻게 직접 얼굴을 보이시겠어? 아주 깜짝 놀랐을 거다!’

    그러나 지서를 실망케 한 것은 지온의 신색에 조금의 변화도 없을뿐더러, 실망의 기색일랑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차분하게 예를 갖춘 지온이 입을 열었다.

    “사소한 일로 두 분을 직접 걸음하게 하였습니다, 송구합니다.”

    오부인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스쳤다.

    오래 집을 떠나있었던 지씨 집안 큰아가씨는 예의도 모르고 사람을 대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 들어, 거친 여인을 보게 될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예의도 바르고 자태도 남다른 것이, 다른 대갓집 규수에 비해 손색 하나 없지 않은가?’

    그러나 유 대부인은 신색(神色)에 변화 없이 웃으며 답했다.

    “그리 예를 차릴 것 없네, 지온 소저. 당연한 것이지.”

    그리고 안부를 물었다.

    두 사람이 서로 다정한 듯 이야기를 나누자 불안한 마음이 든 지서의 몸이 비틀렸다.

    ‘저 계집애가 생각한 게 이거였어? 가식적인 태도로 유씨 가문 부인들이 자신을 다시 보게 하려고 그런 거지, 지금?’

    시기적절하게 분노한 지서를 말린 위씨 부인이, 딸에게 안심하란 눈빛을 보냈다.

    ‘겨우 저 정도 모습으로 유씨 집안에서 어찌 마음을 바꾸려고?’

    세상 사람들 누구라도 겉모습은 꾸며낼 수 있지만, 저 아이가 집안에서 보인 여러 작태는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퍼지지 않았던가?

    ‘유 대부인이 그런 위험부담을 질 리가 없지.’

    지온과 유씨 가문의 부인들 사이에는 서로 통하는 주제가 없었기에 예의상 몇 마디를 주고받고 나자 다들 입을 닫았다.

    유 대부인이 고개를 숙여 차를 마시자 지온이 그녀를 더 기다리게 하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두 부인 부인을 모신 것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야 할 물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지온이 서아에게 눈짓하자 얼른 알아들은 서아가 소매에서 비수(*神色: 양날을 가진 단검) 하나를 꺼내어 올렸다. 그 자리의 모두가 대경실색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