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4)화 (4/385)
  • 4화. 저의 증표도 돌려받아야겠습니다

    지온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야기하자니 참으로 부끄럽네요. 시집도 가지 않은 소녀인 제가 어디 도움을 받을 만한 곳도 없다는 생각에, 직접 제 혼사를 쟁취해보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실패하고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는 소란까지 부린 것이지요. 자진에 성공했다면 모를까, 의식을 차리고 나니 도저히 다른 분들을 볼 낯이 없어 방에 며칠을 숨어있었던 것이었어요. 그렇게 지내며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르고 이제야 다른 분들을 뵐 용기가 생기어 이리 찾아뵌 것이지요.”

    “…….”

    두 부인은 다른 이들에게 비웃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을 비웃으면 된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자신들이 하려던 말을 스스로 다 해버린 이에게 또 무슨 소릴 할 수 있겠는가?

    수치를 주는 것도, 상대가 수치를 느낄 때야말로 진정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입만 아플 뿐이었다.

    ‘그나저나, 다른 이들이 비웃는 것을 가장 못 참던 아이가 아니었던가?’

    매번 지서가 슬쩍 건들기만 해도 폭발하던 아이가 어찌 저런 소리까지 할 수 있는 것인지, 이상하기만 했다.

    무겁게 침묵이 가라앉은 방안엔 지온이 차를 마시며 내는 찻잔 소리만이 작게 울리고 있었다.

    지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위씨 부인이 결국 예의상 말을 던졌다.

    “너무 신경 쓸 것 없다. 다 한 가족이니 지나갔으면 된 것을, 어찌 널 비웃겠느냐? 앞으론 화목하게 지내면 된다.”

    지온이 해사하게 웃음을 지었다.

    “역시 숙모님은 마음이 넓으시네요. 내심으론 저를 아끼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태도나 말투가 얼마나 친근한지, 순간 위씨 부인은 그녀가 자신의 친정 조카라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찻잔을 든 위씨 부인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마음을 추스르곤 화제를 바꾸었다.

    “그래, 이리 찾아온 것은 달리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

    “네, 숙모님.”

    지온이 곤란하게 할 생각이 없다는 듯, 깔끔하게 대답했다.

    “조금 전에 이미 유모에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기왕 혼사가 정해졌으니 나머지 정리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이노야댁 모녀 두 사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화색이 돌았다.

    ‘저 골칫덩이가 이제야 고집을 꺾었나 보구먼!’

    둘은 속내를 감추고 조용히 지온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숙모님 말씀처럼 모두 한 가족이 아닙니까. 이제 혼약은 지나간 일이 되었으니 다시 화목하게 관계를 회복하여야 하겠지요. 저는 유씨 가문에 시집가지 못하게 되었으나 가문의 둘째인 지서라도 원하는 바를 이룬다면 좋은 일일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귀한 집안과 혼사가 이루어지면 저희 가문 모두에게 좋은 일일 테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

    위씨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그런데 이런 소리가 저 아이의 입에서 나오니 어째 기분이 이상하구나.’

    그 와중에 나이가 어린 지서는 놀람과 기쁨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진심이에요, 큰언니?”

    “당연히 진심이지.”

    지온은 그녀를 향해 친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록 오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같은 혈통을 가진 사촌이잖니. 어려서는 자주 같이 모여 놀기도 하면서 다른 누구보다 서로 친했는데, 둘째 네가 기억을 할지 모르겠다.”

    지온이 집을 떠날 때 겨우 여섯 살이었던 지서는, 어릴 적의 기억이 흐릿했다. 그러나 지서는 혼사를 양보하겠다고 나선 사촌 언니의 체면을 기쁜 마음으로 세워주기로 했다.

    지서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기억하지요. 큰언니께서 집을 비우신 동안 저도 늘 걱정하고 있었는걸요.”

    지온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어려서 집을 떠나 어렵사리 돌아와 보니 부모님 모두 다시 뵐 수 없는 곳으로 떠나셨더구나. 그것도 무척 슬펐는데, 갑자기 유씨 집안에서 널 선택했다는 소식까지 들으니 감정이 격해져 내가 실수를 했던 거야. 그러니 이 언니가 그동안 네게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음성에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힘이라도 있는 지, 지서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큰언니! 그게 당연한 사람의 마음인 걸요.”

    그러다 가만히 생각을 한 지서가 우물쭈물 덧붙였다.

    “장유유서라 했으니 이 혼약도 사실 큰언니의 것이 옳다고, 저도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유씨 집안에서…….”

    “유씨 집안에서 지서, 널 더 반기는 것도 다 네 복이지.”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지온의 모습은 어쩐지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사촌 언니와 동생이 서로 우애를 뽐내는 모습을 보던 위씨 부인과 장씨 부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아이가 서로 앙숙처럼 싸우던 모습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저 아이가 왜 갑자기 사람구실을 하게 된 게야?’

    ‘무슨 수작이든 증표를 가져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지!’

    마음을 정한 위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지온아, 네가 그리 마음을 먹었다니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매듭지으면 좋겠느냐?”

    지온의 대답이 똑 떨어졌다.

    “당연히 돌려드려야 하는 물건을 돌려드려야지요. 앞으로 저와 유씨 가문은 조금의 관계도 없는 것이고, 둘째가 기쁘게 규방을 나서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위씨 부인의 마음에 꼭 드는 대답이었다.

    “그럼 물건은 가지고 온 것이냐?”

    몸을 슬쩍 앞으로 기울이며 위씨 부인은 기대어린 눈으로 지온을 바라보았다.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저도 가지고 오고 싶었지요. 다만 그 물건을 제가 가지고 있지 않아서요.”

    “그래?”

    위씨 부인의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온은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어차피 두 집안 모두 서로 교환했던 증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기왕, 제가 증표를 돌려드리게 되었으니 그쪽이 가지고 있는 저희의 증표 역시 제가 돌려받아야 할 듯합니다.”

    순간 잔뜩 경계하기 시작한 위씨 부인이 지온을 응시했다.

    “굳이 번거롭게 그리할 필요가 있겠느냐? 네가 물건을 그대로 지서에게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야?”

    미간을 좁히며 작은 한숨을 쉬는 지온의 모습이 무척이나 속이 상한 듯 보였다.

    “숙모님께선 모르셨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 늦은 밤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을 들은 일이 있었어요. 그때 부모님께선 유씨 집안에 건넨 증표가 부모님께서 정혼하실 때 사용하셨던 물건이라 하셨거든요. 그런 물건을 제가 어찌 다른 이의 손에 남겨둘 수가 있을까요? 물건을 되찾아 오면 제 그리움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을 것이고요.”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지만, 위씨 부인은 유씨 집안에 건넨 그 물건이 어디서 난 것인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나 증표가 지온에게 없다는 것은 위씨 부인 역시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조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때 이미 사람을 보내 모두 찾아보았던 것이다.

    ‘증표를 쥐고 돌려주지 않으려는 게, 혹시 물러나는 척하며 다시 어떻게든 해보려는 수작인가?’

    소용없는 짓이었다. 지온와의 혼사는 유씨 가문(兪家)에서 거절을 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정을 알린다 하여도 결과를 바꿀 순 없을 터였다.

    위씨 부인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고 주머니를 쥔 채 멍하니 바라보는 지온을 본 위씨 부인은 순간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저 아이가 그리 난리를 쳤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씨 집안의 둘째 공자를 보았기 때문이었지!’

    지온이 도성으로 돌아오던 날, 누군가 그녀의 주머니를 훔쳤었고, 그때 도둑을 잡아 준 것이 그 둘째 공자였던 것이다.

    도성에 얼마나 사람이 많은데, 하필 돌아오자마자 만나게 된 것이 혼약하기로 약속한 사내라니! 그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상대방이 또 도성에서 유명한 품위 넘치는 공자였으니, 소녀의 가슴이 얼마나 꿈으로 부풀었겠는가?

    ‘서로의 증표를 다시 돌려받아? 흥! 분명 그 핑계로 공자를 다시 보려는 것이겠지! 그걸 노리고 성정까지 바꾼 척을 하며 연기를 해대다니!’

    위씨 부인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증표를 돌려준다 하면 그 공자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야? 꿈도 야무지구나!’

    그러나 그런 연심을 이용하여 증표를 되돌려 받을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위씨 부인이 친근하고 선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말이 참으로 옳구나. 그렇다면 이 숙모가 네가 증표를 돌려받을 방법을 생각해보마. 어떠하냐?”

    지온의 눈에 기쁨의 빛이 스치자 위씨 부인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지온이 몸을 일으키곤 인사를 드렸다.

    “부탁드려요, 숙모님. 그럼 소녀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이풍당에서 나온 지온은 대충 주머니를 챙기고 말했다.

    “돌아가자.”

    “큰아가씨!”

    밖에서 타는 속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하로와 의운이 급히 달려왔다. 두 시녀는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려 했지만, 서아가 선수를 쳤다.

    “왜 그러셨어요, 큰아가씨? 유씨 집안에 건넨 증표를 돌려받고 싶으셨으면 말씀만 하시면 되셨을 텐데 왜 가지고 계신 증표를 주지 않으시고 굳이 그들과 교환하자고 하신 거예요?”

    지온이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당시 서로 증표를 교환했던 거잖아. 그러니 이제 서로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아?”

    화도 나고 마음이 단 서아가, 얼른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지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 이유로 다시 공자님을 뵈려 한 것이 아니고요? 아가씨께서 계속 주머니를 보고 계시던 것을 보았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춘 지온이 서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온이 자신을 바라보자, 순간 자신이 모시는 큰아가씨의 성격이 떠오른 서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때리시려나?’

    능운진인은 여인이었지만, 무척이나 대단한 고인(高人)이라 그분을 따라 사방을 돌아다녔던 큰아가씨 역시 무예를 배웠다. 연약한 팔과 다리를 가진 자신은 큰아가씨가 힘을 쓴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곧 지온이 웃음을 지으며 서아를 안심시켰다.

    “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거 없어. 배고프다. 가서 식사나 해야겠어.”

    “아가씨…….”

    지온의 시중을 들어왔던 서아는 지온이 무섭기도 했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했는데, 다시 돌아오니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부모님을 모두 여읜 것도 모자라, 혼약마저 빼앗겼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가련했던 것이다.

    “아가씨, 공자님을 다시 뵙기는 어려우실 거예요. 어떤 집안의 공자가 혼사를 물러 놓고 직접 나타나겠어요? 그런 일들은 모두 어르신들께서 알아서 하시는 법이에요.”

    서아는 큰아가씨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차라리 설명해주고 이해를 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지온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렇구나?”

    “아가씨…….”

    지온은 더 듣고 싶지 않은지, 손을 휘휘 흔들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서아는 그래도 쫓아가 더 이야기를 해보려 했지만, 하로가 말렸다.

    하로가 말했다.

    “우리도 다 아는 아가씨 성격을, 네가 몰라서 이래? 그냥 있어. 괜히 좋은 일 하려다 나중에 너까지 불똥 맞지 말고.”

    “그래, 그만해.”

    의운이 덧붙였다.

    “대부인도 어쩌질 못하시는데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아가씨께 충고를 해?”

    그녀들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자, 서아는 기운이 빠져버렸다.

    “난 그냥 큰아가씨가 불쌍해지는 것을 보는 게 마음이 아파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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