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2)화 (2/385)
  • 2화. 처리할 일

    긴 머리를 빗으며 지온이 물었다.

    “유모도 머리 손질을 할 수 있으신가?”

    젊은 날, 위씨 집안 부인의 시중 시녀였던 포씨 유모는 머리 손질을 무척이나 잘했다.

    포씨 유모가 얼른 대꾸했다.

    “큰아가씨, 하고 싶으신 머리형이 있으십니까?”

    “아무거나 상관없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면 돼.”

    순간 포씨 유모가 긴장했다.

    ‘누굴 만나려고? 방안에서 조용히 정신이나 놓고 있을 것이지, 또 불나방처럼 날뛰려는 건가?’

    비록 혼사가 이미 결정이 되었다고는 하나, 이 난리가 집안 밖에 알려지면 보기에 좋을 것도 없었다.

    거울로 안절부절못하는 유모를 보던 지온이 가만히 입꼬리를 올렸다.

    “지씨 집안과 유씨 집안의 혼사가 결정이 났으니 나머지 것들도 그만 처리해야 하지 않겠나?”

    그 말에 포씨 유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모는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되물었다.

    “진심입니까?”

    두 가문에서 혼약을 맺기로 약속했을 때, 작성한 혼약서는 워낙 허술하여 혼약의 당사자가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혼약을 정할 당시의 증인이 문제였다. 지온의 조부는 선제(先帝)가 총애하던 신하였고, 선제가 혼약의 증인이 되어 선제가 보는 앞에서 두 집안은 서로 증표를 교환했었다.

    문제는 그 증표를 지온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혼인할 사람이 바뀌었으니 증표 역시 지온에게서 회수를 해야 마땅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결정 난 상황에, 이노야의 집안에서 지온을 이리 깍듯하게 대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지온이 요양하던 내내 포씨 유모는 병문안 명목으로 여러 번 방문하였지만, 모두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오늘, 지온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보아하니 진짜 생각이 바뀌었나 보구먼!’

    하긴, 대노야도 계시지 않으니 장남가엔 사내가 없었다. 앞으로 큰아가씨의 미래는 모두 지온의 숙부인 이노야, 지형에게 달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 노야와 각을 세워봐야 본인에게 도움 될 게 없는 게야.’

    차라리 지서 아가씨가 잘되게끔 고분고분 증표를 내어주면, 이노야 역시 연약한 소녀를 상대로 싸우려 들지 않을 터였다. 괜찮은 집안을 찾아 지온 아가씨를 시집보낼 터이고 평생 기대고 살 수 있을 터였다.

    “아주 예뻐. 유모가 손이 꼼꼼하네.”

    지온은 그리 말하며 거울에 비치는 소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위로 틀어 올리고 남은 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뺨 양쪽으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손바닥만 한 얼굴이 더욱 청순하고 갸름해 보였다.

    지온이 했던 말을 떠올리던 포씨 유모는 초조해진 마음을 감추고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 큰아가씨께서 워낙 아름답기에 그리 보이는 것이지요. 머리칼도 풍성하시니 올림머리가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보시지요, 꼭 선녀님 같지 않으십니까? 선녀님처럼 앞으로 사실 날도 구만리시고요.”

    포씨 유모가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앞으로 살날을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잘 알겠지!’

    빙긋 미소를 지은 지온은 포씨 유모의 아첨이 마음에 든 듯, 드디어 그녀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혼인이라는 것이 어찌 되었건 서로가 원해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유씨 집안에서 원하지 않는 것을 나 같은 여인이 혼자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지. 유모 말이 맞네. 내가 계속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앞으로 구만리 같은 남은 날들이 어찌 될지 모르지 않겠나.”

    지온의 종지부를 찍는 말에 포씨 유모는 삼복더위에 냉수를 들이켠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언중유골(言中有骨)처럼 말에 뼈가 있는 것이, 차남 가문이 강요했다고 돌려 말하는 것 같은데……설마, 아니겠지?’

    거울 속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푹 빠진 지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포씨 유모는 자신이 너무 예민하단 생각이 들었다.

    “유모, 그만 돌아가 숙모님께 말을 전하는 것이 좋겠네. 더 시간이 지체되면 숙모께서 몸이 달아 병이 나실지 모르지 않나?”

    그제야 다시 정신이 돌아온 포씨 유모는,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거울 속 지온과 눈을 맞췄다.

    ‘됐다. 어렵게 큰아가씨가 포기했는데 일을 크게 벌일 필요 없겠지.’

    우선 이 일을 해결하고 나면 앞으로 큰아가씨의 기를 죽일 기회는 많았다.

    포씨 유모는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며 웃음을 짜냈다.

    “그리하겠습니다, 큰아가씨.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가 데려온 다른 시녀들과 떠나자 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큰아가씨, 진짜 증표를…….”

    지온은 거울 속에 보이는 낯선 얼굴을 살피며 생각했다.

    ‘참으로 아름답네. 내 원래 얼굴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아.’

    “너도 전부터 내게 은근슬쩍 여러 번 이야기 하지 않았어? 이제 이 집안은 숙부님의 말대로 돌아가니, 그들과 맞서서는 편히 살기 어렵다면서.”

    지온의 말에 서아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세요, 큰아가씨! 저는 그저…… 그저…….”

    “일어나. 쓸데없이 무릎부터 꿇을 필요 없어.”

    지온이 천천히 말했다.

    “내가 험한 꼴을 당할까 걱정해서 한 이야기라는 거 나도 알아. 그리고 네 말이 맞고. 사실이 그런 것을 가지고 네게 트집을 잡거나 하지 않을 거야.”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던 서아는 지온이 화가 나지 않은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서아는 장남가의 시녀로, 본래 대노야의 후처로 들어왔던 대부인 정씨(丁氏) 곁에 있던 시녀였다. 지온이 집으로 돌아오자 서아는 지온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지온이 가문으로 돌아온 후, 서아는 지온이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지온은 고집이 세고, 분을 참지 못하는 성격에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몰라 일만 생기면 그저 난동을 부렸다.

    본래라면 혼사 역시, 이노야댁에서 먼저 혼약을 빼돌린 것이었기 때문에 지온에게 유리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지온처럼 윗사람에게 버릇없이 따지고 나오면 유리했던 상황도 불리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서아는 좋은 마음으로 지온을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지온의 성격이 어찌나 거칠고 급한지, 대화는 고사하고 여차하면 서아를 때리려 들었다. 그래서 서아는 그저 지온의 뒤를 바짝 따르며 보필할 수밖에 없었다. 서아는 그렇게 눈치를 보고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차마 지온이 이노야댁에서 크게 난동을 부리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소란이 있고 지온은 많은 것들을 깨우친 듯 보였다.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고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던 지온을, 서아는 이틀을 꼬박 새워 간호했다. 그리고 드디어 삼 일째가 되던 날 밤, 지온이 눈을 떴다.

    눈을 뜬 그녀는 마치 기억을 잃은 듯 먼저 이곳이 어딘지, 언제인지를 물었다.

    의원이 전하길, 머리는 무척이나 정밀하고 중요한 곳이라 머리를 부딪치고 바보가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했다.

    서아는 더 조심스럽게 그녀를 간호하였고, 무엇을 묻든 모두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게 몸이 조금 좋아진 큰아가씨는 아주 이상하게 변했다.

    한밤중, 자신에게 굳이 사다리를 가져오라 시키더니 지붕엘 올라 별을 보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나! 컴컴한 밤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지붕에 서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던지…….’

    서아는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지온이 며칠간 별을 보는 바람에 사람들은 희화원에 귀신이 나온다며 수군거렸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삼일만 별을 보고, 별을 보는 일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며칠간 지온은 먹고 자고를 반복하며 별다른 일을 만들지 않아, 다들 조금 마음을 놓았다.

    지금의 대부인 정씨는 지온 아가씨의 친모가 아니라 관여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계속 이렇게 난리를 부리면 결국 불행해지는 것은 본인이 아니겠는가?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셨다니 다행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서아는 지온의 허리띠를 매어주고 노리개를 걸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지온을 보던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오늘 정말 예쁘세요.”

    지온이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전에는 안 예뻤고?”

    지온이 부드럽게 이야기하자 서아도 조금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전에도 예뻤고, 오늘은 더 예쁘시다고요.”

    서아는 일부러 아첨하는 것이 아니었다. 큰아가씨는 본래 예쁘긴 했지만, 눈에 늘 눈물이 가득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드럽게 접힌 눈매에, 입가엔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마치 살랑대는 봄바람이 부는 듯하지 않은가.

    “어머니께선 어디 가셨지?”

    “이노야께 가셨습니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풍당(頤風堂)으로 가자.”

    이풍당은 지씨 가문의 본당이자 집안의 차남인 지형이 사는 거처였다.

    지온의 말에 서아는 매우 놀랐다.

    “아가씨…….”

    서아가 말을 잇기도 전에 지온이 끊었다.

    “소동 부리려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조금 전에 너도 들었잖아,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래.”

    서아는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아가씨, 대부인께서 돌아오신 후에 하시는 것이 어떠세요? 아무래도 아가씨께서 아랫사람이니 말씀드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실 텐데…….”

    그러나 지온이 그 말엔 신경도 쓰지 않자 서아는 하는 수 없이 지온을 따랐다.

    * * * 

    두 사람이 나가자 밖에 있던 시녀 둘이 황급히 일어나 얼른 인사했다.

    “큰아가씨를 뵙습니다.”

    지온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벽도가 금방 뒤를 따르며 물었다.

    “아가씨 어디를 가시는지요?”

    지온의 대답은 여전했다.

    “이풍당.”

    밖에 있던 시녀 둘의 반응 역시 서아와 같았다. 그녀들은 냉큼 지온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들며 말리려고 했다.

    “아가씨, 아직 몸도 좋지 않으신데 바깥바람을 쐬시면 몸에 좋지 않으실 거예요!”

    “맞아요! 전하실 말이 있으시면 저희가 가서 전하면 되죠! 저희가 전해도 똑같잖아요!”

    “아니시면 대부인께서 돌아오길 기다리시는 것이 어떠세요? 대부인께서 오시면 함께 가 달라 하셔도 되니까요.”

    지온이 소매를 떨쳐 두 시녀를 밀어내곤 말했다.

    “가서 싸우려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

    지온을 시중들던 지난날들을 떠올린 두 시녀는 지온의 성질을 떠올렸다. 도저히 지온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말리려던 그때, 지온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물었다.

    “너희의 이름이 뭐니?”

    머뭇거리던 시녀 두 사람이 대답했다.

    “벽도(碧桃)입니다.”

    “저는 홍행(紅杏)이어요.”

    지온이 미간을 좁혔다.

    “그 이름은 누가 지어줬어?”

    “대부인께서…….”

    지온이 곧장 대답했다.

    “대부인께 앞으로 벽도는 하로라 하고, 홍행은 의운이라 부르겠다고 전해드려.”

    “…….”

    ‘갑자기 왜 이름을 바꾸시는 걸까?’

    두 시녀가 어리둥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지온은 이미 장원의 문을 나서고 있었다.

    “큰아가씨!”

    두 사람은 동시에 생각했다.

    ‘이름이 바뀌는 것이 대수던가, 큰아가씨가 일을 치는 것이야말로 큰일이지!’

    두 시녀는 새로운 이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뒤를 쫓았다.

    그러나 지온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두 사람이 장원을 나왔을 땐 이미 그녀와 서아의 신형이 저 멀리 흔들흔들 사라지고 말았다.

    “어쩌지?”

    홍행, 아니 의운이 하로를 보았다.

    하로가 동동, 발을 굴렀다.

    “어쩌긴 뭘 어째! 어서 쫓아가야지! 대부인께서 외출하시면서 더는 아가씨가 소란을 부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계속 말씀하셨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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