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화 (1/385)

1화. 큰아가씨, 지온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 초.

포씨 유모가 다른 이들을 데리고 희화원(熙和院)에 도착했다.

조용한 희화원의 복도에는 문밖을 지키는 시녀 둘만이 바느질을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포씨 유모가 온 것을 본 시녀 둘이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

“유모님.”

포씨 유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부인께서 큰아가씨께 보양탕(保養湯)을 가져다주라 하셨네.”

시녀 둘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눈썹을 슬그머니 들어 올린 포씨 유모가 물었다.

“설마 큰아가씨께서 아직 기침하지 않으신 겐가?”

앞서 있던 시녀 벽도(碧桃)가 말끝을 흐렸다.

“간밤에 큰아가씨께서 잠을 잘 못 주무셔서…….”

포씨 유모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지만, 그녀는 얼마 전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혼약이 다른 이에게 넘어간 큰아가씨는 기둥에 머리를 크게 찧어 피를 쏟았다. 그 후 정신을 놓은 큰아가씨는 실성한 사람이나 할 법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잠들어야 할 한밤중에 자라는 잠은 안 자고 산발한 머리로 지붕엘 오르지 않나, 누가 병문안을 오면 말 한마디 없이 온 사람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질 않나…….

분명히 밤에 이상한 짓을 하느라 잠을 안 자니, 낮에 깨어있질 못하는 것일 터였다.

‘그렇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람?’

이노야와 이부인도 큰아가씨가 더 정신을 놓고 실성하길 바랐다.

‘그리만 된다면 둘째 아가씨의 혼사를 두고 다른 이들도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대지 않겠지.’

포씨 유모가 온화한 얼굴로 물었다.

“큰아가씨께선 계시는가?”

“큰아가씨께선…….”

벽도가 막 입을 열었을 때 안에서 시녀가 하나 나오더니 포씨 유모에게 예를 올리고는 말했다.

“유모님, 큰아가씨께서 안으로 들라십니다.”

* * *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간 포씨 유모가 병풍을 돌자, 침상 위에 있는 소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열다섯, 여섯이나 되었을까? 또렷한 이목구비에 짙고 풍성한 머리칼을 늘어뜨린 소녀가 베개에 기대어 있었다.

방 안이 어두워 방의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칠흑 같은 흑발과 티 없는 맑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소녀만은 유모의 눈에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인기척에 소녀가 고개를 돌리자 흑옥 같은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 빛을 뿌렸다. 동시에 소녀의 선홍빛 입술이 작게 오므라들었다.

포씨 유모도 지(池)씨 가문에서 큰아가씨의 미모가 가장 뛰어나단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가면 예쁘다는 소릴 듣는 둘째 아가씨도 큰아가씨 앞에선 평범하게 보였다.

‘큰아가씨가 골칫거리라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유씨 가문(兪家)측에서도 그리 간단하게 둘째 아가씨와의 혼인에 응할 리가 없었다.

“큰아가씨를 뵙습니다.”

포씨 유모가 몸을 낮추며 예를 갖췄다.

이 집안의 큰아가씨, 지온(池韞)은 여전히 베개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았다. 눈꺼풀만 들어 올린 지온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유모가 어쩐 일인가?”

지온의 음성은 고저 없이 조용했지만, 포씨 유모는 어쩐지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마치 대단한 인물 앞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포씨 유모는 지씨 가문의 이부인인 위(魏)씨 부인이 지씨 집안으로 시집오며 함께 데려온 온 유모였다. 지온의 친어미였던 대부인이 별세한 후, 차남이 가문을 도맡게 되었다. 그 후로 지씨 가문의 삼남과 사남들 역시 포씨 유모에겐 깍듯하게 대했다. 이부인조차 그녀에겐 위엄을 드러내기보단 친밀함을 더 앞세우지 않던가?

‘그런 내가 어찌 이런 어린 벌거숭이 계집에게 압박을 느끼겠는가?’

포씨 유모는 이상한 기분을 털어버리며 웃음을 지었다.

“이부인께서 큰아가씨를 걱정하시어 제게 보양탕을 가져다 드리라 하셨습니다.”

유모가 옆에 있던 시녀에게 눈짓을 보내자 시녀가 앞으로 나와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육신양원탕(六神養元湯)입니다. 이부인께서 가장 좋은 약재를 사용하라 명하시여 총관이 도성의 약방을 모두 돌아 모은 것입니다. 여길 좀 보십시오, 이것은 동북의 인삼이고, 남해의 제비집에 천산의 설련도…….”

“숙모님께는 나 대신 감사하다 전해주게.”

그녀의 말을 끊은 지온이 옆으로 곁눈질을 하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헌데 내가 입맛이 없으니 이를 어쩌지? 서아(絮兒), 네가 연일 시중을 드느라 전보다 많이 말랐던데 양원탕은 네게 상으로 주마.”

멈칫한 시녀, 서아는 포 유모의 베일 듯한 시선에 당황하며 연신 손을 내저었다.

“아, 아가씨! 제가 어찌 감히 그것을 받겠습니까!”

지온이 말했다.

“상으로 내리는 것이니 받으면 될 일이지. 받지를 못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야?”

지온의 한 마디에 서아는 말문이 막혔다.

참다못한 포씨 유모가 입을 열었다.

“큰아가씨, 이 보양탕은 이부인께서 정성으로 준비하신 것인데 어찌…….”

지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니 서아에게 상으로 내리는 것이네. 지금 나는 먹지를 못하겠으니, 이대로 돌려보내면 숙모님의 정성을 저버리는 게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요양을 하는 동안 내내 서아가 애를 써가며 날 돌봐줬네. 서아의 기운을 북돋으면 날 더 잘 돌봐주지 않겠어?”

‘어찌 말이 그리 된단 말인가?’

포씨 유모는 정신이 다 멍해졌다. 지온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돌려 비꼬려 하는 말인지 순간 분간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보아온 것을 생각하면 큰아가씨는 그 정도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 아니야.’

거기에 가문에서 자라지 못해 교양마저 부족하여, 어리석고 사람 대하는 법도 모르는 소녀가 아니던가?

‘그러니 도리에 어긋나는 소릴 하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유모가 이 상황을 이해하려는 사이, 지온은 서아의 부축을 받으며 침상 밖으로 내려와 하늘하늘 걸어 화장대 앞으로 향했다.

“지난 며칠 숙모님께 여러모로 폐를 많이 끼쳤어. 지난 일을 다 잊으시고 이리 챙겨주시기까지 하셨는데 음식을 도로 돌려보내면 숙모님께선 내가 마음에 원한을 품었다고 생각하실 것이야. 다 큰숙모님을 생각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니, 큰숙모님께서 오해하지 않으시도록 유모가 돌아가서 이야기를 잘 해주게.”

‘감히 이부인을 위한다는 소릴 하다니.’

황당하여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포씨 유모였지만, 일단은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탕 한 그릇이니, 넘어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보다 포악하게 고집이나 피우던 큰아가씨가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억지긴 하지만 갑자기 이치를 따지고 들다니?’

포씨 유모는 함께 온 시녀에게 눈짓하여 양원탕이 담긴 그릇을 서아에게 건네곤 슬쩍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큰아가씨를 단장하던 서아 대신 자신이 지온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포씨 유모가 순순히 구는 것을 본 지온이 입을 열었다.

“큰숙모님께서도 귀히 여기는 유모의 시중을 내가 감히 받아도 되는 것인가?”

포씨 유모가 웃었다.

“종은 그저 종일뿐이지요. 큰아가씨를 모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포씨 유모가 건네는 뜨거운 수건을 받은 지온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복이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지. 어려서부터 스승님을 따라 돌아다니느라 모든 일은 내가 스스로 해야 했네. 시중 같은 건 받은 일이 없었어.”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던 포씨 유모는, 지온의 말에 지온이 겪어야 했던 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집안의 큰아가씨는 정말 팔자가 기구했다.

지온은 장남인 대노야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났다. 하지만 일곱 살 되던 해 병을 얻어 목숨마저 잃을 지경에 놓이게 되었고, 때마침 당시 집안에 객으로 머물고 있던 능운진인(凌云眞人)이 지온의 상태를 보고는 지온을 낫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조건으로 지온이 출가해야만 한다고 했다.

지온은 대노야와 대부인의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당연히 지온의 부모는 지온이 출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딸의 병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두 사람은 능운진인에게 애원하며 매달렸다.

지온을 살리기로 한 능운진인은 두 사람의 애원에 결국, 지온이 자라 건강해지면 다시 지온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지온이 집을 떠나고 9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 먼저 대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대노야는 그 후 후처 정씨를 들였다. 그리고 곧 대노야마저 세상을 떠났다.

지온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친부모는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고 생면부지의 계모 정씨 부인만이 집에 있었다.

지온이 이러한 상황에 적응할 겨를도 없이,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비보가 날아들었다.

지온이 어릴 적, 지씨 가문은 유(兪)씨 가문의 공자와 지온을 혼인시키기로 집안끼리 약조했었다. 그러나 지온이 집을 떠나있던 9년 사이, 지씨 가문에서는 그 자리에 죽은 대노야의 동생인 이노야 지형의 여식이자 지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 지서(池藇)를 밀어 넣었다.

태사부는 대단한 세가였고, 유씨(兪氏) 집안의 둘째는 넘치는 품위로 이미 도성에 소문이 자자한 공자였다.

도성으로 돌아오며 이미 유씨 집안의 둘째 공자를 보고 흠모하는 마음을 품었던 지온은, 집에 돌아와 혼약의 당사자가 바뀌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온은 불행히도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지온이 고집을 피우며 난동을 부리고 나오자 결국 이노야인 지형(池亨)이 혼약을 할 당시 쓴 혼약서를 꺼내들었다.

유 노태사와 지온의 조부가 약조했던 혼약서에는 허술하게도 혼약할 당사자의 정확한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다.

유씨 집안 역시 지온이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심지어 교양마저 없는 것을 보고는, 볼 것도 없이 둘째 아가씨인 지서를 며느리로 선택했다.

크게 망신을 당한 지온은 분이 치밀어 그대로 기둥에 머리를 세게 박았고 그 후, 그만 실성을 하고 말았다.

* * *

지온이 겪어야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탄식하던 포씨 유모의 마음은 다시 차가워졌다.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이고, 누가 그런 팔자를 타고 나라 강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본인 꼴을 좀 봐야지, 어떤 집안에서 어리석고 분수도 모르는 며느리를 들이고 싶어 하겠어? 반반한 면상 하나 가진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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