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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95화 (95/95)

[95화]

이른 새벽. 시종장이 명경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방을 나섰다. 문밖에 시종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들에게 오늘 할 일을 일러주고 곧장 반소의 처소로 향했다.

사실 바쁘다는 핑계로 각방을 쓰고 있었지만 시종장은 알고 있었다.

가비를 위한 반소의 배려라는 걸.

그래도 혈기왕성한 사내가 연모하는 여인을 두고 목석처럼 있어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어찌 자리라도 한번 마련해봐야 하나?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했다. 연화에게 듣자 하니 밤일 정도는 무리가 없을 듯한데.

그저 찬바람이 몸에 스밀 것을 염려하면 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몸 데우는 데 그만한 게 어디 있다고.

머릿속으로 어떻게 두 사람을 붙여놓을까 궁리하던 중이었다.

“…….”

시종들을 앞서 걷던 시종장이 걸음을 멈추고 처소 안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정적이었는데 무언가 미묘하게 달랐다. …이상야릇한 분위기랄까?

바닥을 보니 물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는 흔적들이 있었다. 그 흔적은 목간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반소의 침소로 향해 있었다.

눈치를 챈 시종장이 뒤를 돌아 시종들을 바라봤다.

“오늘 하루는 침소 근처로 얼씬도 하지 말거라.”

“예?”

멋모르는 시종들이 눈을 맞추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여 부산스러움에 이제야 운우지락을 나눈 연인이 깰까 봐, 시종장은 서둘러 시종들을 밖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문을 닫기 전 생각했다.

오늘은 원들과 알현도 없으실 테고, 궁 내부 수리 재가(裁可)는 귀물경비대 우대장에게 맡기면 될 테고, 문제는 수도 정찰인데…….

이는 사실 좌대장 곤에게 맡기면 될 일이었다. 다만 그 주둥이가 보고를 핑계로 눈치 없이 침소까지 쳐들어올 일만 없다면야.

그건 어떻게든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일정을 정리한 시종장이 조용히 처소의 문을 닫고 나갔다.

쿵-

얼핏 들려온 문 닫는 소리에, 가비가 가는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간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잠자리는 자정이 넘어서까지도 이어졌다.

한 번의 거사를 치른 반소가 가비를 번쩍 안고 목간으로 들어가 따듯한 물에 몸을 씻겼다. 욕통에 몸을 겹치고 앉아 물장난을 치며 간간이 입을 맞출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불쑥, 흥분한 반소가 느껴졌다. 양심도 없이 방금 가진 가비의 몸을 또다시 탐냈다.

그럼에도 좋았다.

처음은 좋은 듯 아닌 듯 생전 처음 느껴보는 흥분 속에 빠르게 지나갔지만, 두 번째는 분명 다를 거란 확신 때문이었다.

결국, 물 밖을 벗어난 반소가 가비를 덥석 안고 침소로 들어갔다. 몸에 묻은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입술로 그것을 모조리 훑었다.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느끼는 가비와 달리, 반소는 처음부터 좋았다. 처음 맛본 정사(情事)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직 본능과 욕구만으로 움직였다. 한번 하고 나니 한 번 더 하고 싶고, 욕심을 채우고 나니 그보다 더한 욕심이 반소를 삼켰다.

이리 좋을 줄은 몰랐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극렬한 쾌락 속에 그대로 잠식됐다. 자신을 버겁게 받아내는 가비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아오는 두 다리와 제 목을 끌어안는 두 팔.

거친 몸짓에 가느다란 몸이 들썩일 때면, 뒤꿈치부터 타고 오른 전율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뜨거운 열락 속에 달구어진 쇳덩이처럼,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이 반소를 덮쳤다.

“왜. 더 자지 않고.”

반소가 깊게 잠긴 목소리로 가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직 열감이 가시지 않은 그의 가슴이 마른듯한 가비의 등과 빈틈없이 맞붙었다.

반소의 입술이 가비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달콤하게 비비다가, 부드럽지만 힘있게 빨아당겼다.

붉은색 멍울이 남았다. 비단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울긋불긋 어여쁜 꽃이 피었다.

제 것이라는 표식을 가득 남기고서야 조금의 만족감이 들었다.

“이상해. 왜 이렇게 조용하지?”

가비가 눈을 깜빡이며 반소를 돌아봤다.

“지금쯤이면 시종장님이 와서 깨워야 하는데.”

“아랫사람에게 하대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했을 텐데.”

“익숙하지가 않아. 천천히 할게.”

다른 건 적응이 빠르면서 유독 누군가를 하대하거나 수족처럼 부리는 일에는 서툴렀다.

가비가 도르륵 눈을 굴리더니 미심쩍은 얼굴로 반소를 바라봤다.

“설마 우리가 한방에서 잔 걸 안 걸까?”

“아마도.”

가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떡해…!”

창피함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합방했다고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반소는 태연했다. 한쪽 손으로 제 머리를 받친 뒤, 물끄러미 품에 있는 가비를 내려다봤다.

“앞으론 그보다 더한 것도 알게 될 거다. 후사(後嗣)도 기다릴 테고.”

“후사?”

가비가 작게 웃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이제 자신은 겨우 스물을 넘겼을 뿐이고,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

하지만 이곳에 남겠다고 결정한 순간 많은 게 달라졌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반소를 선택했으므로 가비가 아닌 천자비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었다. 각오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막상 코앞으로 닥친 일에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반소의 손이 가비의 뺨을 어루만졌다. 마치 가비의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느린 어조로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좋다. 날 떠나는 일만 아니라면.”

가비가 반소를 올려다봤다. 진득한 눈빛에서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

“어의로 살고 싶으면 어의로 살게 해줄 테고, 천자비로 살고 싶으면 천자비로 살게 해주마. 모두 마다한 채 은가비로 살고 싶다면 그리 살아도 되고. 후사 역시 네가 원할 때 이뤄도 좋아.”

그저 제 곁에만 있어 준다면 그걸로 족했다. 가비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이 더 큰 사랑으로 가비를 보듬을 자신이 있었다. 평생.

“천자비로 있으면서, 어의로도 살고 싶어.”

가비가 반소의 품에 파고들며 속삭였다.

“이렇게 둘이 있을 땐 은가비로 있고 싶고.”

“다 가지겠단 뜻이군.”

“응.”

“이렇게 욕심이 많을 줄이야.”

“내가 좀 그래.”

반소가 웃음을 터트렸다. 가비의 얼굴을 감싸며 입을 맞췄다. 가비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따스한 입술이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가비의 입술을 더듬었다. 촉촉한 입술 안쪽이 비스듬히 틀어지더니 이내 깊이 맞물렸다. 하나처럼 꼭 붙은 몸에서 다시금 열기가 피어올랐다.

가비가 간신히 입술을 떼어내며 말했다.

“…늦겠어. 나가야지.”

반소는 대답 대신 가비를 홱,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 그 위에 몸을 겹치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못 나가. 지금 내가 제정신이 아니거든.”

내 반려한테 홀려서.

반소가 다시 입을 맞췄다. 방금보다 질척하고 농도 짙은 입맞춤이었다. 뒤섞이는 숨결 속에서 서로의 체취를 음미했다. 금세 눈앞이 아득하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하아, 아.”

매끄러운 피부에 하나둘, 흔적이 덧대어졌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반소의 것이었다.

그건 반소도 마찬가지였다. 가비에게 깊숙이 자신을 묻으면서, 되레 각인되고 새겨졌다. 오직 가비만의 사내라는 걸.

“…아앗!”

가비의 몸이 힘없이 떠밀렸다. 그럴 때마다 반소의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잡아끌었고.

마침내 맞은 절정에서 두 사람은 함께 신음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서로가 놓칠세라 힘껏 끌어안았다.

멀리 동이 터오고 있었다.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근 두 사람은, 음궁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해가 뜨는 장면을 함께 바라봤다.

“춥지 않아?”

반소가 자신의 겉옷으로 가비를 온전히 감싸며 물었다.

“응. 괜찮아.”

오랜만에 마음 놓고 쐬는 바깥바람이 기분 좋고 청량했다. 자신을 뒤에서 꼭 끌어안은 반소 덕분에 서늘한 가을바람이 스밀 틈이 없었다.

반소가 뒤에서 가비의 뺨에 제 뺨을 비볐다. 물속에서의 노곤함이 채 가시지 않은, 발그레한 두 뺨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궁 내부 수리는 거의 다 끝났다고 하지 않았어?”

가비가 저 멀리 보이는 천태비궁과 양궁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마 나흘 내로 끝날 거다. 그럼 거처를 양궁으로 옮겨야겠지.”

가비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아쉽고 서운했다.

그 마음을 아는 것처럼 반소가 말을 이었다.

“여기 음궁은 그냥 둘까 해. 우리가 와서 쉴 수 있는 공간, ‘아지트’로.”

‘아지트’란 말에 가비가 반소를 돌아보며 웃었다. 언젠가 제가 했던 말을 흘리지 않고 기억해주었다는 게 놀랍고 기뻤다.

반소가 손가락을 뻗어 양궁 옆에 자리한 상앗빛의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가비가 알기로 그곳은 천자비궁이었다.

“저기 천자비궁은 이름을 바꿀 거야.”

“뭐로?”

“가비궁으로.”

가비가 동그래진 눈으로 반소를 바라봤다. 반소가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내게 천자비는 너뿐이니까.”

훗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사내든 여인이든 자신의 뒤를 잇게 되어도, 저 궁만은 가비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나중에, 반소 네가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게 되면 우리 둘이 저기서 지낼까?”

“좋지.”

“여기 음궁도 괜찮고.”

“그것도 좋고.”

어딜 가든 무얼 하든, 둘이 함께할 수만 있다면.

가비가 햇살에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으로 무언가를 바랐다.

기도가 끝나길 기다렸던 반소가 눈을 뜬 가비에게 물었다.

“뭘 빌었어?”

가비가 아련한 눈길로 먼 허공을 응시했다. 그 눈빛이 더없이 따사롭고 평온했다.

마치 모든 걸 품고 마는 빛처럼, 물처럼, 땅처럼.

“만약 삼생이 있다면, 그땐 현이 바라는 부모를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랐어.”

뒤늦게 들은 천태비 무리의 소식에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각자에게 맞는 최후라고 생각했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수긍만 했을 뿐, 일말의 동정심조차 들지 않았다.

다만 현에게는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눈빛이 애정을 갈구하는,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자의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두의 경애를 받은 듯했으나, 결국 제일 외로운 삶을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생사를 오갈 때, 다녀온 곳이 있어.”

“다녀온 곳?”

“어쩌면 나의 무의식이 그곳을 갔다 오길 바랐나 봐. 다들 너무 보고 싶어서.”

가비는 그곳에서 만난 부모님과 할아버지 그리고 고양이 점박이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나중에 말이야. 아주 먼 훗날 너와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땐 그곳에 너와 함께 갈 거라고, 그렇게 해달라고 빌었어. 네가 내 짝이라고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싶거든.”

그 말에 반소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비가 몸을 돌려 반소를 마주 봤다. 올려다본 그의 금안이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가비는 제가 걸친 겉옷의 앞섶을 펼쳐 그대로 반소를 끌어안았다. 그리하여 둘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사랑해, 반소.”

가비는 이 말만큼은 꼭 먼저 하고 싶었다.

“나랑 혼인해줘.”

그토록 오랜 시간을 견디고 돌아온 그에게.

“너와 평생을 함께할게.”

가슴 뜨거운 고백을 해주고 싶었다. 자신의 진심을.

가비를 바라보는 반소의 눈빛이 벅찬 감동으로 일렁였다.

“기꺼이.”

반소가 속삭였다.

“사랑한다, 가비야.”

오직 너 하나만.

그저 너 하나만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반소가 고개를 숙여 가비에게 입을 맞췄다.

태황국을 비춘 찬란한 태양 아래에서, 두 사람은 영원을 약속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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