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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94화 (94/95)
  • [94화]

    연화가 돌아간 뒤, 유독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가비는 침상에서 일어나 시종장의 뒤를 따라다녔다. 처음엔 만류하던 시종장도 오죽하면 그럴까 싶어 그냥 놔두었다.

    그러다 행여 일이라도 거들라치면 ‘천자님께서 아시면 경을 치십니다!’하며 정색을 했다. 결국, 겁을 먹은 시종장이 등을 떠밀어 침소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가비가 천족의 서고에서 가져온 ‘약초도감’을 펼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어깨가 뻐근할 즈음에 고개를 들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어스름이 내려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가비가 책장 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나무함이었다. 그 안에는 아까 연화에게 준 것과 같은 씨앗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중 몇 개만 골라 손에 쥐었다. 그리고 힘을 집중했다.

    화아아-

    손아귀로 따스한 열감이 퍼졌다. 그 기운이 씨앗으로 스며들었다.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렴.

    그런 바람을 담고 있는데,

    “천자님 오셨나이까.”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밖에서 시종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일 집무실에 있던 반소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놀란 가비가 서둘러 침상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린 뒤 얌전한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시종장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반소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문 쪽을 바라봤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반소가 들어왔다.

    달칵-

    상투관에 숨겨진 금백색의 머리카락과 벌꿀을 담아놓은 듯한 금안.

    사내답고 수려한 그의 얼굴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상에 누워있는 가비부터 살폈다.

    일어나려는 가비를 향해 그가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겉옷을 벗어 평상복의 차림을 했다.

    시종들의 도움 없이 혼자 하는 게 익숙한 듯, 군더더기가 없는 동작이었다.

    가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같은 장면을 몇 번이나 보았지만,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칠흑 같은 머리칼에 회색 눈동자의 반소도 충분히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이렇듯 제 색깔을 모두 찾은 반소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한 분위기를 풍겼다.

    “끼니는 잘 챙겨 먹었나?”

    “응.”

    “약은.”

    “약도.”

    “불편하거나 아픈 곳은?”

    “없었어.”

    시종장에게 다 들은 얘기일 텐데 이렇듯 꼬박 가비를 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침상의 가장자리에 앉은 반소가 가비와 눈을 맞췄다.

    “종일 지루했다는 얼굴인데.”

    “완전.”

    그 말에 반소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미안하지만 아직은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양보 못 한다는 듯 단호했다.

    가비가 일부러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의궁만 좀 왔다 갔다 하면 안 될까?”

    반소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음궁 앞뜰까지만.”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바로 앞에 화단까지만. 어?”

    반소가 묵묵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가비가 부루퉁히 입술을 내밀었다.

    반소가 그 입술을 엄지로 꾸욱 누르며 이불 속에 감추어져 있던 가비의 손을 끄집어냈다.

    “내가 많이 봐주고 있는 것 같은데.”

    말과 함께 손을 펴려고 하자, 가비가 꾸욱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내 반소의 힘에 하나씩 하나씩 손가락이 펼쳐지고, 그 속에 감춰둔 씨앗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소가 찡그린 눈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무리 아니야. 이건 체력하고는 전혀 상관없……,”

    “걱정하는 내 마음은 전혀 알아주지 않는군.”

    “……미안.”

    가비가 꼬리를 내렸다.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소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이제 곧 가을이 온다니까 그랬어. 땅이 신경 쓰여서.”

    가비가 말하는 땅은 북쪽, 귀물의 땅을 말하는 거였다.

    “이렇게 내 기운을 씨앗에 실어주면, 그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건강하게 살 수 있으니까.”

    그로 인해 열매가 열리면 귀물들의 굶주림도 덜 할 것이었다.

    “그건 내가 원들과 의논해서 곳간을 열겠다고 한 거 같은데.”

    “알아. 그래도 이게 더 빠르니까.”

    놀랍게도 가비의 힘이 실린 씨앗은 어떤 곳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나무가 자랐다. 메마르고 푸석한 땅이든, 질척한 진흙탕이든 조건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땅에 내린 뿌리는 기존에 있던 나무들의 뿌리와 얽히며 하나로 합쳐졌고, 이내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죽은 나무에도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힘. 그것이 인간 불로초의 근본이며 힘의 본질이었다.

    그러니 이 힘을 이용하면 시간은 걸릴 테지만 죽음의 땅으로 불리던 귀물의 땅 역시 비옥한 땅으로 탈바꿈될 수 있을 것이었다.

    “난 내가 천녀로서…, 그리고 불로초로서 태어난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 반소 네가 천자로 태어난 것처럼.”

    때론 그 운명이 얄궂게 느껴진다 해도, 아프게 느껴진다 해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했다. 세상 모든 일엔 양면성이 존재했고, 그중 자신의 인생을 어떤 쪽으로 생각하고 결정지을지는 결국 본인의 몫일 테니까.

    “하지만 반소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건 내 잘못이야. 미안해. 이 씨앗을 마지막으로 당분간은 아무것도 안 할게. 약속해.”

    가비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반소가 그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걱정으로 노여웠던 마음은, 불안했던 마음은, 이렇듯 가비의 말 한마디로 녹아버렸다. 세상을 통틀어 자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가비뿐이었다.

    실은 아직도 두려웠다.

    가비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까 봐.

    집무실에 있으면서도, 원들을 알현하면서도, 태황국 곳곳을 직접 발로 누비면서도, 마음 한 자락은 늘 가비를 향해 있었다.

    매일 아침.

    차가운 이성만을 가진 채, 뜨거운 심장은 가비에게 두고 나갔다.

    너무 오랜 기다림은 그에게, 가비와 함께하는 익숙함을 주지 못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제 손이 닿는 곳이 아니면, 제 눈길이 닿는 곳이 아니면 어디에든 내놓고 싶지 않았다.

    답답해하는 가비를 알면서도…….

    반소가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조만간 시간을 낼게.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자.”

    “진짜? …바쁘잖아.”

    무능력한 간신배들을 색출한 뒤 파직하고,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는 일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또 양궁과 천태비궁의 내부 수리가 막바지였고,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나라의 살림살이를 살피는 것까지. 말 그대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가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비가 회귀의 이유였고, 돌아온 삶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니까.

    “이번 겨울까지는 어디든 나와 함께 하자. 그러다 봄이 오면…,”

    아직 내키지 않는 말을, 반소가 애써 토해냈다.

    “봄이 오면 네가 원하는 걸 해도 좋아. 자유롭게 다녀도 좋고.”

    자신의 삶과 운명에 누구보다 주체적인 가비인 걸 알기에.

    그런 가비를 새장의 새처럼 가둬놓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조금만 더. 건강에 대한 염려가 사라질 때까지만이라도 홀로 독차지하고 싶었다.

    “…응. 그럴게.”

    가비가 가만히 반소의 목을 끌어안았다. 콧등이 시큰할 만큼, 애틋한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고마워….”

    제 욕심을 누르고 자신을 배려해주는 반소가 좋았다. 사랑스러웠다.

    반소가 가비의 등을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그리고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춘 후 떨어졌다.

    가비가 아쉬운 듯 물었다.

    “벌써 가게?”

    요즘 반소는 가비를 두고 다른 방에서 잠을 잤다. 바빠서 그렇다는 걸 알지만 가비는 못내 그게 서운했다. 하루쯤은, 꼭 붙어 있어도 좋은데.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있다 가.”

    가비가 엉덩이를 비키며, 침상 위 제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자정까지만, 아니 딱 내가 잠들 때까지만. 응?”

    반소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강아지처럼 축 늘어진 가비의 눈꼬리를 보고 체념한 듯 웃었다.

    “그래. 잠들 때까지만.”

    목간으로 가서 목욕을 마친 반소가 자리옷을 갈아입고 침소로 다시 돌아왔다.

    가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옆자리를 내주었다. 반소가 그 옆에 가만히 몸을 뉘었다. 가비와 적당히 거리를 둔 자리였다.

    “…….”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비가 꼼질꼼질 다가가 반소의 팔 하나를 빼서 펼쳤다. 반소의 팔을 베고 누운 가비가 품 안으로 바짝 붙었다.

    “불편해?”

    “…….”

    반소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가비를 바라봤다.

    가비가 천천히 두 눈을 깜빡였다. 당연히 아닐 거란 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묵묵부답이라니,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머리가 좀…, 무거운가?”

    멋쩍은 마음에 물러나려 하자,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불편할 수밖에.”

    탁한 음성이 가비의 귓가를 간질였다.

    “연모하는 여인을 옆에 두고, 그냥 잘 수 있는 사내는 없으니까.”

    두근.

    가비의 심장이 반소의 말 한마디에 요란하게 뛰었다.

    반소가 손을 올려 귓가에 흐트러진 가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 작은 솜털 하나까지도 손끝이 저릴 만큼 어여뻐서 힘겨웠다.

    반소의 손이 찬찬히 가비의 이마를 스쳤다. 가지런한 눈썹을 지나 얄팍한 눈꺼풀 위를 스치고, 눈꼬리에서 잠시 머물러 그곳을 둥글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다시 곧게 뻗은 콧날을 지나 아이처럼 보드라운 뺨에서 또 한 번 멈추고, 이내 입술을 그리듯 매만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거든. 네가.”

    분홍빛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누르니, 안쪽으로 붉은 살이 유혹하듯 보였다. 목구멍이 메말라 마른 침을 삼켰다. 이 타는 듯한 갈증을 너는 알까?

    “모조리 핥아먹어도 성에 안 찰 듯싶고.”

    수도 없이 꿈꿨다. 자신의 세상 속에 갇힌 가비를.

    네 날개를 꺾을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멀리 날아가게 두지도 않을 거라고.

    늘 제 주위를 맴돌며 같은 궤도를 돌게 할 거라고.

    그렇게 영영 자유로운 속박으로 널 묶어둘 거라고.

    이 욕망을, 욕심을, 넌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너에게는 결코 드러내지 않을 내 검은 소유욕을.

    몰라도 상관없고, 안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놓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같이 안 잔 거야?”

    가비가 물었다.

    “…나 때문에?”

    반소의 눈이 어둡게 침잠됐다. 가비를 바라보는 짙은 금안이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버틸 자신이 없다. 참을 자신도 없고.”

    “…….”

    “지금도 미치겠거든.”

    허나 이대로 안아버리면, 분명 후회할 테지.

    그런 후회를, 아니 그 뒤에 따라올 가비의 원망 어린 시선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네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비켜나는 일은, 눈 밖에 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애정의 지독한 목마름 때문에.

    “왜 멋대로 사람을 환자 취급해?”

    가비가 아랫입술을 물며 반소에게 다가갔다. 단단한 가슴을 끌어안자, 경직되는 몸이 느껴졌다. 천천히 시선을 올려 눈을 마주했다.

    “나 진짜…, 괜찮거든?”

    “…….”

    “밥도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정말 아무렇지 않아.”

    “…….”

    “그러니까……,”

    입술이 막혔다. 반소가 가비를 품에 안으며 몸을 밀착했다. 입술이 열리고 그 안으로 뜨거운 숨결이 엉켰다. 어느새 반쯤 몸을 겹친 반소가 힘겹게 입술을 떼어내며 속삭였다.

    “못 멈출 거야.”

    “멈추지 마.”

    “후회할 거야.”

    “그런 건 개나 주라지.”

    풋, 웃음이 터졌다. 미소를 머금은 서로의 입술이 다시금 겹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깊게 당겨 안고, 애가 닳을 것 같은 몸짓으로 서로를 갈구했다.

    까마득한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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