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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93화 (93/95)
  • [93화]

    눈 깜짝할 새에 여름이 지났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른 새벽. 연화가 준비한 탕약을 들고 음궁으로 향했다. 보초병과 눈인사를 한 뒤 들어서자,

    “거, 잠깐만 기다리시오!”

    곤이 괜스레 연화를 불러세웠다.

    또 무슨 일이지?

    연화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며 걸음을 멈췄다.

    터벅터벅 다가온 곤이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툭하니 물었다.

    “이 새벽부터 음궁엔 어쩐 일로 오신 거요.”

    “예에?”

    연화가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어쩐 일로 왔냐니. 벌써 한 달째 가비에게 탕약을 달여 이 시간에 대령하고 있는데. 정말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질문이었다.

    “천자비님께 드릴 탕약을 가져왔는데요.”

    “아, 탕약.”

    곤이 탕약이 든 뜨끈한 약탕기를 빼앗아 이리저리 살피더니 처소 쪽으로 들고 걸어갔다.

    “저기요, 좌대장님!”

    연화가 서둘러 곤을 쫓으며 약탕기를 가져가려 하자, 곤이 휙 약탕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런 속도로 걸어가면 탕약이 다 식는단 말이요. 이렇게 빨리빨리 가야지.”

    “예에?”

    곤이 보란 듯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연화가 입술을 꾹 다물며 바쁘게 곤을 쫓아갔다.

    마침내 처소의 문 앞에서 약탕기를 돌려받았다. 연화가 부루퉁한 입술을 억지로 집어넣으며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거, 거, 저기 연 어의!”

    돌아서는 연화를 곤이 불러세웠다. 연화가 마지못해 돌아봤다.

    한참 뜸을 들이던 곤이 턱을 긁적이다가, 먼 산을 한번 바라보다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내뱉었다.

    “그, 오늘따라 분칠이 참 잘 먹었소.”

    “예에?”

    “허옇게 뜬 게 밤하늘에 휘영청 뜬 달덩이 같다고나 할까?”

    “달덩이요?”

    연화가 기겁했다.

    “이것 보세요, 좌대장님!”

    연화가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당분간은 저 아는 척하지 말아 주세요!”

    허우참, 별꼴이야, 정말.

    연화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아, 아니, 난 그….”

    곤이 벙찐 얼굴로 처소 안으로 사라지는 연화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멀리에서 지켜보던 귀물경비대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 푸하하!

    풍이 턱, 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언젠가 천자비님이 말씀하셨지. 분칠 잘못한 여인도 좌대장님 같은 남자는 싫어할 거라고. 눈길이라도 받고 싶으면 일단 그 말투부터 고치라고.”

    “이런 우라질!”

    곤이 버럭했다.

    “내가 뭘 잘못했어! 허여멀건 한 게 달덩이 같은 걸 어쩌라고!”

    한마디로 하늘에 뜬 달처럼 하얗고 예쁘다는 소리였다.

    “그, 뭐야, 저 약탕기도, 어! 왜 뚝하면 연 어의가 들고 와! 사내새끼들은 뭐하고!”

    사내새끼들은 겸복과 오정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은 탕약을 달이는 데 필요한 약초를 직접 검수하고 조제 하느라 바빴다.

    한마디로 매일 아침 무거운 약탕기를 들고 오는 연화가 안쓰러워 처소 앞까지 들어줬다는 얘기였다.

    “으휴. 그놈의 주둥이.”

    풍이 쯧쯧 혀를 찼다. 관심을 저딴 식으로 표현하다니.

    “네놈이 연분 내는 날엔, 내가 널 형님이라고 부른다.”

    “뭐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멀어지는 풍을 향해, 곤의 걸쭉한 욕지기가 쏟아졌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아침 풍경이었다.

    * * *

    “오셨습니까?”

    시종장이 웃는 얼굴로 연화를 반겼다. 연화가 짧게 눈인사를 전하며 물었다.

    “천자비님께선 기침(起枕)하셨습니까?”

    “예. 일찍 눈뜨신 후, 연 어의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시종장이 가비가 있는 침소로 연화를 안내했다. 음궁의 시종관은 이제 궁 안의 모든 시종관을 아우르는 시종장이자 천자 반소의 최측근 중 한 명이 되었다.

    똑똑.

    “천자비님, 연 어의가 들었습니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밝은 음성이 들려왔다.

    시종장이 문을 열어주었고 연화가 그 안으로 들었다.

    “천자비님을 뵈옵니다.”

    연화가 예를 갖추곤 침상에 앉아 있는 가비에게 다가갔다.

    가비가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연화를 향해 웃었다.

    “맨날 들어도 적응 안 된다. 그 호칭.”

    “이제는 적응하셔야지요. 곧 혼례 날짜가 잡힐 텐데요.”

    “연화 네 존칭도 적응 안 되고.”

    그 말에 뒤를 힐끔 돌아본 연화가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표정을 확 풀었다.

    “그럼 친우 노릇 좀 할까?”

    “제발.”

    눈을 맞춘 둘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연화가 챙겨온 약탕기에서 약을 따랐다. 적당히 식을 때까지 부채질했다가 가비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가비가 그것을 받아서 꿀꺽꿀꺽 삼켰다. 불로불사와 관련된 맥을 끊어버린 후, 생사를 오갔다. 의식이 돌아왔을 땐 과거의 모든 기억도 함께였다.

    지금의 이 삶은 전생이 아닌 회귀한 생이며, 그 기회는 반소가 만들어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반소가 회귀를 얻기 위해 수백 년간 천신으로 사는 동안, 가비는 저쪽 세계에서 한차례 태어났다가 죽었다는 것도.

    결국, 집안의 가보였던 약초도감을 남긴 선조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가비 자신이었다.

    그렇게 네가 날 기다린 만큼 나 또한 널 기다리고 있었어.

    다시 태어나길 반복하며.

    반소에겐 과제를 풀어야 하는 시간이었겠지만, 가비에겐 전생을 붙든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맞물린 시간은 마침내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했고, 이곳까지 이끌었다.

    회귀는 곧 지금의 현재가 되었고.

    그러니까 지금부터가 우리의 진짜 시간이고 현재야.

    평생 함께하게 될 거야.

    아낌없이 사랑할 때까지.

    “오늘 입가심은 가비 네가 좋아하는 알사탕.”

    약을 다 마시자 노란색 알사탕 하나가 입안으로 쏙 들어왔다.

    가비가 그릇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한 달째 이러고 있으려니까 좀이 쑤셔 죽겠어.”

    “오죽할까. 안 그래도 활동적인 사람이.”

    연화가 공감해 주면서도 엄격한 말투로 말했다.

    “근데 아직은 안 돼. 이제 곧 추워질 텐데 그럴수록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거든. 갑갑해도 조금만 참아.”

    어제 겸복과 오정이 와서 연화와 함께 가비의 상태를 요모조모 따져보고 간 참이었다. 누구보다 제 건강을 생각해주는 이들이기에 가비도 최대한 따르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회복이 정말 빠른 거라고. 겨울만 잘 지나면 완쾌할 거라고 장담했다. 그때까진 실내를 벗어나는 일은 자제하라는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다.

    “참!”

    가비가 생각났다는 듯이 침상에서 벗어나 서랍장으로 걸어갔다. 그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연화에게 내밀었다. 면포에 잘 싸인 씨앗이었다.

    “이걸 또 했어?”

    연화가 눈을 흘겼다. 가비가 그것을 연화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가다가 우대장님이나 좌대장님께 전해줘.”

    “이러다가 천자님께 걸리면 나 혼나.”

    “괜찮아. 몇 개 안 되는데 뭐.”

    연화가 못 이긴 듯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챙겼다. 그리고는 불쑥 곤을 떠올리며 뾰족한 음성으로 내쏘았다.

    “나 앞으로 좌대장님하고 말 안 할 거야!”

    “왜, 또. 뭐라고 했어?”

    “진짜 생각할수록 어이없어서. 무슨 그런 사람이 다 있니?”

    연화가 ‘허, 참, 기가 막혀’를 반복하다가 아까 처소로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얘기를 다 들은 가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큰 소리로 웃다가 이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놔, 진짜 그 모태 솔로.”

    “뭐?”

    “아, 아니.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 못 해봤을 것 같다고.”

    “그치? 그런 거 같지? 말을 그따위로 하는데 어떤 여인이 좋아하겠니?”

    연화가 제 얼굴을 더듬으며 물었다.

    “나 어때? 진짜 달덩이 같아? 이게 어딜 봐서 달덩이야?”

    “그러게. 뜰에 핀 꽃처럼 예쁜데.”

    그 말에 연화가 가비의 팔을 툭 치며 수줍게 웃었다.

    “네 반만 따라가도 밉상은 아닐 텐데. 좀 배우라고 해.”

    “하하. 그럴까?”

    “…응.”

    어라? 반응을 보니까 연화도 영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가비의 짐작을 뒷받침하듯, 연화가 새침하게 중얼댔다.

    “어쨌든 뭐, 사람이 투박해서 그렇지 나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 테니까. 내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이 씨앗은 좌대장님께 잘 갖다 줄게.”

    가비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의식을 차리고 나니 많은 일이 정리되었고, 웃을 일이 끊이지 않고 생겼다. 여러모로 마음이 참 푸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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