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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92화 (92/95)
  • [92화]

    동이 터올 무렵. 밤새 산란으로 진통을 앓았던 태황궁은 다시 태어났다.

    사악한 무리는 사라지고 새로운 천자가 새 아침을 열었다.

    할 일을 마친 귀물들은 곤을 따라 그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갔고, 주경대와 야경대의 경비대장은 처소에서 한 발짝도 나올 수가 없었다. 이제 곧 파직을 당할 것이었다. 그리고 무과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을 것이었다.

    엉망이 된 궁의 내부는 시종들이 아닌 경비대가 손수 처리했다. 부서진 잔해들과 핏자국 등을 빠르게 닦고 정리하였다.

    사시(巳時:09시~11시) 무렵, 태황궁 전체에 활동해도 좋다는 칙명이 떨어졌고,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머물고 있던 숙소 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 태황궁이었지만, 천지가 개벽한 건 모두가 알고 있는 바였다.

    양궁과 천태비궁은 즉각 폐쇄된 채 새로이 정돈될 예정이었고, 서문이 머물던 처소 역시 말끔하게 치워지고 있었다.

    모두가 충격을 받은 사태였으나, 그만큼 다들 태연하게 행동하려 애썼다.

    천태비와 천자가 귀물이었다니.

    서문과 장곡과 그 시종관이 작당 모의를 해왔다니.

    그 수십 년의 세월을 속아왔다니.

    그 뼈아픈 시간 동안 진짜 천자를 배척하며 기피 했다니.

    몰라서 당한 일이었지만, 이는 모두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태황국 전체를 할퀴고 간 상처였다.

    그리고 이것이 치유되고 해소되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럴 테지만 함께 헤쳐가야 할 일이기도 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더 많은 원(元)이 태황궁에 도착했고 별궁에서 대기했다. 수도에서 꽤 많이 떨어진 지방 도시의 원들이 도착하려면 적어도 하루나 이틀 정도가 더 걸릴 것이었다.

    모두 모이면 천자인 반소를 알현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해야 했다. 또 무능력한 자는 경비대의 경비대장들처럼 적출되어 파직될 것이니,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 다들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바깥 상황이 조용하지만 빠르게 수습되는 동안, 반소는 음궁에 틀어박혀 사흘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풍과 곤을 통해 상황을 지시하고 전달받기만 했다.

    허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걸 알았다.

    태황국 전체에 이 사태를 자세히 알리고, 제대로 된 천자로서의 즉위식이 필요했다. 상황을 어느 정도 추스르면, 가비가 천자비임을 정식으로 공표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너만 깨어나면…, 비로소 모든 게 제자리를 찾는다.

    반소가 침상에 반듯이 누워있는 가비의 뺨을 어루만졌다.

    가비는 잠을 자는 듯했다.

    처음엔 가비를 잃은 줄 알고 미치는 줄 알았다.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런 감정을 또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허나 자신을 급히 알현하길 바라는 세 명의 어의를 통해 간신히 이성을 찾았다. 가비의 친우로 지내던 겸복과 오정 그리고 연화였다. 연화가 가비가 준 종이를 보이며 말했다.

    ‘천자비님께서 제게 주신 처방전입니다.’

    거기엔 약초에 대한 간략한 정보와 그 조제법이 적혀 있었다.

    ‘일이 생기면 이 약을, 천자비님 본인께 써달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감옥에서 들었던 가비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건…, 날 지키는 일이야.’

    분명 그랬다. 가비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넌…, 널 지켜.’

    그러면서 불어넣었던 따스한 온기가 반소의 몸을 지배하고 있던 고약의 독을 깡그리 훑고 지나갔다. 연기처럼 사라지게 했다. 완벽한 정화였다.

    반소가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만큼.

    반소의 따스한 금안이 가비를 바라봤다. 금백색의 머리카락을 가비의 얼굴에 부드럽게 비비며 속삭였다.

    “그대가 나의 짝이야. 나의 반려.”

    간절히 원한다. 너를.

    간절히 바란다. 너를.

    “그러니까 돌아와. 기다릴 테니.”

    온기가 느껴지는 것에 안도하며 가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절실한 바람을 담은 뜨거운 구애.

    반소의 애가 타는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가비의 무의식은 알 수 없는 곳을 무작정 떠돌고 있었다. 푸른 허공을 한참 동안 맴돌다가 마침내 아름다운 초록빛 땅에 발을 디뎠다.

    ‘여긴 어디지?’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주변은 온통 무지갯빛 오로라가 경이로운 모습으로 퍼져 있었다. 피부에 닿는 따사로운 바람. 숨을 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에 들어오는 청량한 공기.

    가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팔을 벌린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평화롭고 평온했다.

    행복해.

    이유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이 잘 깎이고 다듬어져, 마침내 동글동글한 몽돌이 된 것처럼 편안하고 기분 좋았다.

    그때, 허공을 부유하는 갖가지 색의 비눗방울이 보였다. 그걸 좇다 보니 시선 끝에 사람들이 어른거렸다. 꽃이 있었고, 맑은 물이 있었고, 그림 같은 집들이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플 일도, 슬플 일도, 괴롭거나 고통스러운 일도 없었다. 이곳이 어딘지, 저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

    가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멀리 네발 달린 짐승 한 마리가 가비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점박이?’

    가비가 자세를 낮춰 달려오는 점박이를 반겼다.

    ‘점박아! 너 괜찮아? 잘 지냈어?’

    가비가 점박이를 품에 안고 얼굴을 비볐다. 가끔 점박이의 안부가 궁금했었다. 점박이뿐만 아니라 저쪽 세계에서 함께 했던 동물들 모두가 생각났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점박이가 가늘게 눈을 접으며 가비의 손에 뺨을 비비적댔다.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빤히 눈을 맞췄다. 무수히 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가비가 놀란 눈을 떴다. 점박이는 이미 남은 생(生)을 잘 보내고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가비가 자신을 구해준 날 이후, 가비의 친구인 은영이 점박이를 좋은 곳으로 입양 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점박이는 병을 얻어 평균 수명보다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새로운 주인을 만나 행복했다고 했다.

    또 그때 동물들을 해쳤던 진호는 그날 일로 가벼운 처벌을 받고 잘 사는가 싶더니, 대학을 졸업한 뒤 사고를 당해 장애를 얻게 되었다고 했다.

    ‘그랬구나….’

    가비는 그제야 이곳이 보통의 세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저쪽 세계와 태황국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도.

    아마도 저쪽 세계의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르는 듯했다.

    그럼 이곳은 죽은 자들의 세계인 걸까?

    가비가 점박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럼 난…, 죽은 걸까?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곳이 만약 죽은 자들의 세계라면.

    그리고 나 역시 죽은 거라면.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내심 기대하는 얼굴로 눈을 들었다.

    ‘……!’

    가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눈앞에 거짓말처럼 가족이 있었다. 다정하고 포근한 엄마, 상냥하고 품이 넓은 아빠.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으로 키워준 할아버지 은수만.

    ‘엄마! 아빠!’

    가비가 가족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이처럼 안겨서 얼굴을 비비며 그들을 놓칠세라 꼭 끌어안았다.

    가족들은 그런 가비를 하염없이 토닥여주었다.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씩씩하게 지내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안 된 날도 많았다. 어떤 날은 너무 보고 싶어서, 어떤 날은 너무 만지고 싶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꾹 참은 날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품에 안겨 울 수 있다는 게 꿈만 같고 기적 같았다.

    ‘가비야.’

    얼굴을 떼어낸 엄마가 볼을 감싸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야지.’

    ‘어딜?’

    난 여기 있을래. 엄마랑 아빠랑 할아버지랑.

    그리고 점박이랑. 여기 있을래. 여기 살 거야.

    다시금 품으로 파고드는 가비를 아빠가 다감한 눈빛으로 다독였다.

    ‘여긴 나중에 다시 와. 가비야.’

    ‘언제?’

    ‘네가 아낌없이 사랑을 다 준 날.’

    가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할아버지 은수만이 가비를 향해 인자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인석아, 넌 아직 멀었어.’

    전생과 현생, 그리고 회귀를 통해서까지도 아직 다하지 못한 사랑. 그 마음.

    그걸 모두 털어낸 후에야 이곳으로 와.

    여긴 그런 자만 올 수 있는 곳이니까.

    할아버지의 말에 가비는 뒤늦게, 자신이 두고 온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에 대해.

    ‘우린 언제나 이곳에 있으니까.’

    가족들이 말했다.

    ‘다시 볼 수 있어.’

    웃는 얼굴로 온화하게 가비를 보냈다.

    ‘그러니까 먼 훗날 보자, 가비야.’

    그 길로, 땅을 디딘 발끝이 둥실 떠오르는 걸 느꼈다.

    시선 아래로 가족들과 점박이의 모습이 멀어졌다. 천천히, 천천히-

    다시금 푸른 허공을 헤매었다.

    갑자기 따뜻하고 기분 좋은 물기가 온몸을 감쌌다.

    누군가 자신을 씻기고 있었다.

    아주 정성스럽게.

    자신의 머리칼을 빗기고, 손톱을 다듬어주며, 두 뺨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쓰디쓴 약을 입안에 머금고 제 목구멍으로 조금씩, 조심스럽게 흘려서 넘겨주었다.

    …반소.

    가비가 뒤를 돌아봤다.

    익숙한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돌아와. 기다릴 테니.

    ……반소!

    자신을 향한 무한한 애정.

    그 근원이 누군지를 깨닫자, 몸이 어딘가로 쑤욱 빨려 들어가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푸른 새벽.

    가비가 조용히 눈을 떴다. 시야가 맑았다. 눈에 익은 천장이 또렷하게 보였다. 여긴…….

    음궁이었다. 반소의 침소.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눈꺼풀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볼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린 손이 가비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못 견디게 그리운 손길이었다.

    떨리는 숨결이 가비의 뺨과 턱을 지나 목덜미로 내려갔다. 마치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이라도 하듯 맥이 뛰는 자리에 입술을 비볐다.

    “…가비야.”

    물기 어린 목소리가 깊게 잠긴 채로 가비의 이름을 속삭였다.

    “…기다렸다, 너를.”

    기다리라고.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가비를 끌어안는 반소의 몸이 경련하듯 잘게 떨렸다. 감격으로 인해 그의 눈가가 축축이 젖어들었다.

    그런 반소를 가비 역시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눈물이 났다.

    “…돌아왔어. 약속한 대로.”

    가비가 의식을 잃은 지 보름만의 일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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