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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89화 (89/95)
  • [89화]

    밀궁을 나온 가비는 곧장 양궁으로 향했다. 시종관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비의 옷매무새를 정돈해주었다.

    “합방을 경하드립니다. 천자비님.”

    가비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목적은 달성했다. 반소의 몸에 퍼져 있던 고약은 이제 거의 다 정화되었을 것이었다.

    “들어가시지요. 천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곡이 침소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열린 문틈으로 냄새가 났다. 무언가 썩어들어가는.

    가비는 그 원인이 현이라는 걸 알았다.

    “…은갑아.”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더럽혀진 기운을 지울 수 없었다. 지독한 피 냄새가 곳곳에 배어있었다. 현이 가면을 쓴 채 가비를 맞았다.

    “…왔구나! 와 주었어!”

    현은 몹시도 불안정해 보였다.

    문이 닫히자, 그가 두 손으로 몸을 긁으며 방안을 돌아다녔다.

    “안 그래도 내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내 하나뿐인 반려이지 않느냐. 너와 합방을 해야 내 병증이 낫는다!”

    현이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인형처럼 서 있는 가비를 바라봤다. 가면의 눈구멍으로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금안이 아닌 탁한 황색을 띠고 있었다. 금백색의 머리칼도 듬성듬성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왜 그리 서 있는 게야?”

    현의 동공이 기묘하게 가늘어졌다.

    “너도 내가 귀물처럼 보이느냐?”

    그 말에 가비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귀물, 맞잖아.”

    현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널 낳아준 존재가 귀물이니까 너 또한 귀물이겠지.”

    “아니, 아니다….”

    “네가 가진 껍데기는 오래가지 못할 거야. 이미 망가지기 시작했고.”

    “아니, 아니야아!”

    흥분한 현이 고함을 내질렀다.

    “이건 그냥 병증이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병증이야! 그 반인반귀 놈이 나와 함께 잉태됐기 때문에 생긴 병증! 그 빌어먹을 놈이 날 이렇게 망가뜨렸어!”

    현이 극심하게 몸을 긁으며 소리쳤다. 그러더니 이내 삐딱한 시선으로 가비를 노려봤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깟 건 너와 결합하면 씻은 듯이 나을 테니까.”

    “과연 그럴까?”

    가비가 진실을 말했다.

    “너희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불로초의 피가 불로불사의 힘을 가진 건 맞지만,

    그 장기가 병든 다른 장기들과 대체 가능한 것도 맞지만,

    “불로초의 진짜 힘은 본질을 지키는 거야.”

    때문에 거짓이 진실이 될 수 없었다.

    “잠깐은 나로 인해 네 증상이 나은 것처럼 느껴지겠지.”

    초반엔 가비를 만나며 병증이 호전된 듯 보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야.”

    결국 본래의 성질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지금 네 모습을 봐.”

    그 말에 현이 제 얼굴을 더듬었다. 가면 밖으로 무언가가 비집고 나왔다. 물컹하게 늘어진 살가죽이었다.

    “내가 가진 기운이 널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거야.”

    굳이 결합하지 않아도,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물론 수백 년간 사람을 먹어온 천태비는 현보다 강했다. 해서 아직까지 버틸 수 있는 거였고.

    하지만 시간이 걸릴 뿐. 언제고 현처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럼 또 사람을 잡아먹겠지.

    “…….”

    굳은 듯 서 있던 현의 얼굴에서 가면이 떨어져 내렸다.

    툭.

    펼쳐진 손바닥 위로 흐물거리며 흘러내린 황록색의 피부가 만져졌다.

    “은…, 갑아.”

    현이 떨리는 동공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나 좀 살려다오….”

    현이 한발씩 가비에게 다가왔다.

    “나는, 나는 이 나라의 천자다.”

    태황국의 모두가 존엄하게 여기는 고귀한 존재.

    “나는 선대 천자의 자식이다. 서문 같은 인간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뿐인 천족의 혈통, 순혈!”

    그 말에 가비의 눈이 커졌다.

    서문이었구나. 현의 친부가.

    “그런 내가 반인반귀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지.”

    현이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크크크큭- 그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날 농락하려는 수작.”

    그리고 애처로운 얼굴로 가비에게 말했다.

    “처음 만난 날 내게 살갑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느냐. 병증에 걸린 내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고. 그날 날 보고 네가…, 웃어주었다.”

    햇살처럼 환하게.

    현이 감정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하지만 가비는 그마저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게 널…,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야.”

    현이 비틀거렸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괴로운 듯 신음했다. 잿빛으로 변해버린 머리카락이 힘없이 뽑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끔찍한 몰골이었다.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일반적인 반인반귀와는 근본부터 달랐다. 천태비가 심어놓은 악행의 결과였다.

    “아아아악!”

    현이 괴성을 지르며 가비를 덮쳤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막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그게 설사 잘못된 방식이라도.

    잘못 알고 있는 방법이라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비를 쓰러트린 후, 허겁지겁 옷 매듭을 풀었다. 가비가 나직이 경고했다.

    “인정하지 않으면 더 괴로워질 거야.”

    너 자신에 대해.

    극과 극을 달리는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현은 망가지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가비는 그것이 안타깝고 불쌍했다.

    “너 역시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 건 아닐 텐데.”

    그러니 지금이라도 자신이 반인반귀인 걸 인정하고 모든 걸 내려놓길 바랐다.

    “이제라도…, 진짜 너의 삶을 살아.”

    현이 멈칫, 가비를 바라봤다. 제 밑에 있는 가비의 표정은 누구보다 평온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이.

    난…, 난 이렇게나 무서운데.

    고개를 쳐든 현의 시선으로 언제나 익숙한 방안의 풍경이 보였다.

    이 모든 게…, 내 것이 아닌 적이 없었는데….

    그때,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쿵! 쿵! 콰앙-!

    궁 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이윽고, 밖은 요란한 소음으로 뒤덮였다.

    …왔구나.

    귀물경비대였다.

    가비는 그제야 굳었던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제 몸속에서 휘몰아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불로초의 힘.

    그중 불로불사에 해당하는 기(氣)를 완전히 차단하고자 했다.

    영원히 삭제해 버리기를.

    해서 더는 이로 인한 고통과 분란이 없기를 바랐다.

    또 훗날 내 아이들에게까지 대물림되지 않기를…….

    그렇게 염원하며, 힘의 원천으로 느껴지는 맥을 찾아 스스로 그 흐름을 차단해 버렸다.

    뚝.

    모든 게 멈췄다.

    감각하는 모든 것들이.

    반쯤 내리뜬 가비의 눈동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스위치를 꺼버린 로봇처럼, 의식마저 까맣게 암전돼 버렸다.

    “…천자님! 천자님!”

    밖에서 장곡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지금…!”

    부리나케 문을 열고 들어온 장곡이 숨을 멈췄다.

    “…처, 천자….”

    죽은 것처럼 누워있는 가비가 보였다. 그리고……,

    꾸룩-

    천자의 옷을 입은 황록색의 덩어리가 그 옆에서 꿈틀거렸다.

    “…장…, 곡….”

    현의 본모습이었다. 인간의 껍데기가 급격하게 녹아서 사라지고 있었다.

    현이 뭉툭해져 가는 팔다리로 바닥을 기었다.

    “나…, 나르을, 나를 좀…….”

    희번덕대는 눈만 빼고, 모든 것이 뭉개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 태어났을 때의 모습처럼.

    간신히 사람의 형체만을 유지한 진흙 덩어리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천…, 천자님!”

    장곡이 제게 엉겨드는 덩어리를 몸에 감고 일어났다. 휘청거리면서도 온 힘을 다해 현을 데리고 달아났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뒤엎는, 천지가 개벽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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