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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85화 (85/95)
  • [85화]

    “가비님!”

    곤이 몸을 날려 가비를 받아냈다. 그리고 빠르게 자신을 덮치는 귀물을 베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가비가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귀물들의 몸이 날카로운 검에 잘리며 이리저리 흩날렸다.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귀물경비대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사망자는 없지만, 부상자는 있었다.

    아비규환이었다.

    “그…,”

    그만해….

    가비가 입술을 달싹였다.

    “제발 그만….”

    끄악-, 끄아악-

    귀물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가비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일순 본거지 뒤편에서 진을 치고 있는 귀물들의 소리까지 귀에 아프도록 꽂혔다.

    끄그극-, 끄극, 끅.

    ‘엄마, 무서워.’

    ‘걱정마라, 아가. 이 엄마가 지켜줄 테니.’

    ‘아빠, 아빠! 죽지마!’

    귀물들의 언어가 사람의 언어가 되어 가비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휘돌았다. 숨이 턱 막혔다.

    “그만해, 제발….”

    가비가 숨을 헐떡이며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참상이 끔찍했다.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폐부 깊숙이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던 무언가가 솟구치듯 터져 나왔다.

    “제발…, 그만해!!!”

    푸아악-!

    일순 태양처럼 붉은빛이 사방을 감쌌다.

    으드드드드!

    땅이 진동하는가 싶더니 뜨거운 기운이 뻗어 나갔다.

    후와아악-

    멀리까지 뻗었던 기운이 귀물경비대와 귀물들을 삽시간에 감싸고 다시 한곳으로 모였다.

    땅을 짚고 있던 가비의 손, 그곳으로 빨려 들어갈 듯 사그라졌다.

    “…하아, 하아.”

    세상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정적.

    가비의 가쁜 숨소리만이 그 침묵을 깨트렸다.

    “가, 가비…,”

    곤이 넋 나간 얼굴로 가비를 바라봤다. 곤뿐만이 아니었다. 풍도 연화도. 그 외의 귀물경비대와 귀물들까지. 모든 동작을 멈춘 채 주저앉아있는 가비를 바라봤다.

    “…말도 안 돼.”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연화가 얼빠진 눈으로 속삭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제야 가비를 바라보던 모두가 연화가 앉아 있는 나무를 바라봤다.

    불에 탄 듯 검게 그을려 있던 나무가 초록의 울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연화가 제 눈앞에서 달랑거리는 붉고 탐스러운 열매를 바라봤다. 한 입 베어 물기만 해도 단물이 뚝 떨어질 것 같았다.

    진갈색의 튼실한 몸통을 지니게 된 나무의 뿌리는, 땅을 짚은 가비의 손바닥과 그 기운이 연결돼 있었다. 마치 가비에게서 새 생명을 얻은 듯, 가비를 향해 살랑거리며 그 가지를 흔들었다.

    “…하아.”

    가비가 제 손을 들여다봤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너무도 벅차오르는 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털썩-

    여기저기서 무릎을 꿇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들자 귀물경비대가 가비를 향해 서슴없이 엎드렸다. 귀물들마저도 사납게 움직이던 턱을 닫고 앞다리를 꿇어 가비 앞에 엎드렸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움에, 연화가 눈물을 흘렸다.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야 자신이 꾸었던 꿈의 일부가 무얼 말하는지, 누굴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생(生)을 상징하는 피와 같고,

    삶을 불태우는 불꽃 같은,

    하여 하늘을 덮고, 해와 달을 모두 집어 삼켜버릴 붉은 여인.

    그건 바로…….

    자신이었다. 은가비.

    그 힘과 능력을 온전히 깨달았다.

    불로초, 또는 천녀로서의 완벽한 각성이었다.

    * * *

    서문이 바른 고약은 반소의 몸에 빠르게 침투했다. 의식은 차렸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무언가가 몸의 순환을 막고 있었다. 그로 인해 주술력도 회복되지 않았다.

    “…허억, 허억.”

    반소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끝을 까닥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체력이 소모됐다.

    빌어먹을.

    욕지기를 내뱉는 입술이 잘게 떨렸다.

    이대로 가면 끝이다.

    자신을 빌미로 가비가 끌려올 것이었다. 이미 귀물의 것이 되어버린 태황궁으로.

    그건…. 그것만은…….

    허나 의식은 멀어지다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생전 처음 느낀 무력함이 반소를 좀 먹었다. 지켜주진 못할망정, 미끼가 되어서는 안 됐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걸까.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천태비, 어쩌면 천자까지 귀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가능성이 아니라 귀물이 분명하다.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날 선 직감이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 난 뭐지.

    천태비의 정체가 귀물이라면 자신의 정체성에도 의문이 들었다.

    사건이 있던 그 밤, 귀물의 습격이 있었다.

    보통 놈이 아니었고 누구도 놈의 정체와 침투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림자처럼 양궁으로 스며든 귀물은 선대 천자의 목을 베고, 천자비궁에 가서 지금의 천태비인 천자비를 겁탈했다.

    그 끔찍한 일의 결과가 반소 자신이고.

    헌데 천태비가 귀물이면 이 모든 일이 설명되지 않는다.

    “…윽.”

    순간 엄청난 두통이 반소를 엄습했다.

    “허억, 헉.”

    반소가 숨을 헐떡이며 탈수 증세를 보였다. 눈앞이 다시금 아득해졌다.

    가물거리는 시야로, 누군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붉은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

    가녀린 몸과 처연한 눈빛.

    천태비, 제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어머니.

    하지만 같은 얼굴, 다른 느낌이었다. 도무지 지금의 천태비와 같은 인물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상반된 기운이 느껴졌다.

    낯선 이질감. 또는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뒤엉켜 반소를 혼란스럽게 했다.

    ‘아가…. 네 이름은 반소(半霄), 하늘의 한가운데를 뜻한단다. 이 어미가 네게 주는 이름이야.’

    반소가 있는 이곳, 이 감옥 안에서 어머니는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귀물의 습격을 받은 밤. 이곳으로 끌려와 벌써 반년을 넘게 갇혀 있었다. 산달이 될 때까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가 사건의 충격으로 몸져누운 줄 알고 있었다. 부디 순산하기만을 바라며.

    어머니는 별점으로 이미 반소가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것도.

    ‘반소야.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거라. 이 어미가 죽고 혼자가 되어도…. 끝끝내 살아서 네가 진짜 천자라는 걸 태황국 모두에게 증명하렴.’

    어머니의 육체는 한계에 직면했지만, 그 정신만은 올곧고 또렷했다.

    마침내, 지저분하고 습기 찬 이곳에서 어머니는 반소를 낳았다.

    ‘으에에엥-’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작은 몸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다. 아기는 금백색의 머리칼에 아름다운 금안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철창 밖에서 바라보던 여인.

    여인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뱀처럼 교활하고 포악한 기운이 그득했다.

    ‘젖을 물려. 무럭무럭 키우렴. 내 아이의 껍데기를 바꿀 수 있을 만큼.’

    여인의 품에도 작은 아기가 안겨 있었다. 아기라기보다는 사람의 형상을 겨우 갖춘 황록색의 진흙 덩어리 같았다. 덩어리의 번뜩이는 눈이 여인을 똑 닮아 있었다.

    ‘천벌을 받을 게다.’

    어머니가 여인을 향해 나직하게 일갈했다.

    ‘수많은 사람을 해치고 피눈물을 흘리게 한 죄는 사라지지 않아.’

    ‘천벌은 인간이나 받는 게지, 나 같은 귀물에겐 해당하지 않는다.’

    여인이 어머니를 비웃었다.

    ‘네 대신 천태비로 살아갈 거야. 모든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리고 내 아들이 태황국의 천자로 군림할 것이다. 네 아들은 내 아들의 그림자로 천대받겠지.’

    여인이 어머니의 신력이 담긴 별점 기록서를 한 장 한 장 찢어서 입에 넣었다. 기록서에는 이 땅에 나타나게 될 불로초에 대한 예언도 적혀 있었다.

    여인은 천천히 그것을 씹어 삼켜 제 몸의 일부로 만들었다. 하여 별점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을 꾸몄다.

    그렇게 젖을 물린 지 백일이 되던 날.

    여인은 아기인 반소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죽였다. 목을 그어 그 피를 받아 자신의 피와 섞었다.

    ‘으아앙- 으앙’

    구슬프게 우는 반소의 몸에 그 피를 덕지덕지 발랐다. 빈틈없이 꼼꼼히. 제 아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여인은 피투성이가 된 아기 둘을 나란히 놓고, 그동안 자신이 사람을 잡아먹으면서 생성해온 마력을 사용했다. 마력은 여인의 욕망과 야욕이 집약된 악(惡)이었다.

    아기들의 몸을 덮은 피는 누런 막이 되었고, 이내 그 막이 찢어지며 새로운 모습이 드러났다.

    ‘…완벽해.’

    여인이 제 마력에 도취하여 중얼댔다. 이 일에 거의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지만 상관없었다.

    진흙 덩어리 같던 제 아기는 하얀 피부에 금백색의 머리칼과 금안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기운을 빼앗긴 반소는 검은 머리칼에 회색 눈동자로, 자신의 빛깔을 모두 잃어버린 채였다.

    죽은 어머니 옆에서 아기 반소는 목이 쉬게 울었다. 그런 반소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여인이 아름다운 제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요, 천자…. 어미예요. 천자를 낳아준 고귀한 태생의 천태비. 그게 바로 어미예요.’

    여인이 아기를 누군가에게 넘겼다. 장곡이었다. 눈짓을 받은 장곡이 아기를 안고 밀궁 밖으로 사라졌다. 여인이 싸늘한 눈으로 반소를 바라봤다.

    ‘네 이름이 반소라지? 네 어미가 널 그렇게 부르던데.’

    여인이 씨익,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그래. 좋은 이름이구나. 이제부터 넌 하늘의 가운데를 뜻하는 반소(半霄)가 아니라 깊은 밤을 뜻하는 반소(半宵)로 불릴 것이야. 어둠의 자식. 불길함의 상징. 귀물에게 범해져서 생긴 불행의 씨앗. 해가 아닌 달, 빛이 아닌 그림자 같은 존재로 살아가거라.’

    단, 필요할 때까지만.

    여인은 알고 있었다. 제 아기의 본질은 귀물. 그것도 강력한 제 피를 이어받은 아이였다. 허니 지금 쓰고 있는 껍질은 완전하지 못하다는 걸. 언젠가 탈피를 하며 귀물로서의 성체가 이루어지리라는 걸.

    그걸 묶어둘 수 있는 게 바로 불로초의 힘이었다. 그 영약이 제 마력과 합쳐지는 순간, 제 아이는 영원히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반소의 쓸모는 거기까지였다. 낮과 밤이 하나고, 해와 달이 하나인 것처럼. 빛과 그림자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마력으로 뺏은 반소의 힘은, 반소가 죽게 되면 사라지고 말았다. 해서 제 아이의 껍데기가 불로초를 만나 완벽해질 때까지, 그 힘이 온전히 제 아이의 것이 될 때까지, 반소는 살아 있어야 했다. 그게 여인이 반소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여인은 어머니의 살가죽을 벗기며 남은 마력을 모두 사용했다. 그것을 받아 혈담초와 끓여낸 건 다름 아닌 서문이었다.

    이제 곧 여인이 어머니로 둔갑을 하고 천태비의 행세를 하면, 궁에 들어와 태어의가 될 자였다. 귀물인 여인과 정을 통해 반인반귀를 낳은 사내이기도 했다.

    마침내, 누런 막을 뚫고 나온 여인은 죽은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내렸다는 천녀의 붉은 머리칼만은 복제할 수 없었다. 여인이 백발을 어루만지며 뇌까렸다.

    ‘하는 수 없지.’

    이제 더는 사용할 마력이 없었다. 있다 해도 이것만은 변화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상관없다. 천태비의 머리칼이 충격을 받아 변색 됐다고 하면 되니까. 되레 연민과 동정심을 얻겠지.’

    이야기는 뭐든 만들어내기 나름이었다. 이미 사람들은 몹쓸 귀물이 태황궁에 침범해서 선대 천자를 죽이고 천태비를 범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천태비의 뱃속에 천자의 씨와 귀물의 씨가 동시에 잉태되었다고. 마침내 이 둘이 한날한시에 태어났다고 믿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천자로 둔갑한 제 아들을 안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됐다. 안타깝고 애처롭지만 누구보다 존귀한 천녀로서. 죄악의 씨앗인 반인반귀조차 품어주는 자애로운 여인으로서 사람들의 공경을 받을 것이었다.

    여인이 눈짓하자 뒤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시종관이, 앞으로 반인반귀로 살아가게 될 반소를 안았다. 본디 죽은 어머니의 시종관이었던 자였다.

    시종관의 품에 안긴 반소는 모든 사실을 눈에 담았다. 어머니가 별점을 보던 신성한 밀궁이 핏빛으로 물드는 광경을. 추악한 진실을. 뼈아픈 죽음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기 반소는 지금의 일을 제 의식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죽은 그 장소에서, 반소는 잊고 있었던 모든 기억을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억지로 끄집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으…, 으윽.”

    사슬로 묶여 있는 이 자리.

    이곳이 어머니가 자신을 낳고 죽은 자리였다.

    그제야 서문이 제게 남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가시는 길은 이곳에서, 편히 보내드리겠습니다. 제가 베푸는 마지막 온정입니다.’

    감히…, 감히……!

    내 어머니가 죽은 자리에서 자신을 능욕하고 기만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유지한 그 몸뚱이로, 태황국의 모든 사람을 속이고 태황궁을 더럽혔다. 감히!

    “으아아악!”

    창자가 뒤틀릴 것 같은 분노가 솟구쳤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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