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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84화 (84/95)
  • [84화]

    귀물의 땅에도 계절은 있었다. 숲과 들판엔 검은 풀과 검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호수와 계곡도 탁한 물이나마 넘실거렸다.

    그래도 땅은 여전히 상식이 불가한 곳이었다. 혹한일 때보다 조금 나을 뿐, 삭막하고 척박한 건 매한가지였다. 숲속엔 귀물들이 나무를 파먹거나 벌레 유충 같은 것들을 잡아먹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반소를 만났는데….

    가비가 잿빛 하늘을 보며 반소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괜찮은 걸까?

    벌써 사흘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태황궁을 빠져나온 지.

    그리고 반소의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지.

    허나 섣불리 땅을 나가 태황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귀물경비대라 해도 그 많은 경비대를 상대할 순 없어.

    이미 지방 도시 원들에게도 추포령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어쩌면 말을 두고 온 주막까지 경비대의 손길이 뻗쳤을지도.

    살아 있는 거지?

    살아 있는 거…, 맞지?

    답을 들을 수 없는 물음만 속으로 되뇌었다.

    약속했으니까. 죽지 않겠다고.

    나를 위해 널 지키겠다고.

    반소가 남긴 그 말이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힘도 될 수 없다는 게 절망스러웠다.

    내 존재는 그저…, 타인의 수명을 늘려주는 용도밖에 되지 않는 걸까.

    장기 이식의 도구로밖에 사용될 수 없는 걸까.

    정말 빌어먹을 운명이었다.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닌데.

    가비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결국, 이런 생각에 내몰려 첫 번째 삶을 살았던 은가비도, 두 번째 삶을 살았던 은가비도 생을 놔버린 것이었다.

    앞서 걷던 풍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가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쉬었다 가시죠.”

    가비가 고개를 끄덕였고, 귀물경비대가 행군을 멈췄다.

    벌써 사흘을 꼬박 돌아다녔다. 귀물들의 흔적이 최대한 없는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사이 주막에서 가져온 음식은 동이 났다.

    “가비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곤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가비가 앉으려는 자리에 제 겉옷을 깔아주었다.

    “아무 데나 앉으시면 안 됩니다.”

    “고마워요, 좌대장님.”

    “거참, 말 편히 하시라니까요.”

    “익숙해지면요.”

    머리를 긁적이던 곤이 봇짐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깨끗한 면포에 둘둘 말아둔 육포였다.

    “드십시오. 어제도 조금 밖에 못 드셔서 출출하실 텐데.”

    “이거뿐이잖아요. 나눠 먹어요.”

    첫째 날엔 주먹밥, 둘째 날과 셋째 날 아침인 오늘은 과일. 그나마 씹을 거라곤 이제 이 육포가 마지막이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드십시오!”

    곤이 억지로 가비의 품에 육포를 떠넘겼다. 그리곤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키 큰 나무 하나를 발견하고 그 위로 올라갔다. 곰 같은 덩치로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간 곤이 시커멓게 생긴 열매 하나를 따서 내려왔다.

    무언지 확인도 안 하고 대뜸 깨물고는 ‘크억, 퉤!’하고 뱉어냈다.

    “우라질, 이게 뭔 똥 맛이야!”

    걸쭉한 욕 한마디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덕분에 가비도 웃으며 생각을 전환했다.

    반소를 믿는다.

    그러니까 하루만. 하루만 더 기다려보자.

    애써 부정적인 마음들을 날려 보냈다.

    만약 내일까지도 소식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 일단 그가 무사한지 확인부터 해야겠지.

    죽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던 반소의 눈빛이 떠올랐다.

    근거 없는 확신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천태비가 반소를 죽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어떤 명분을 붙인다고 해도 필요가 없었다면 일찌감치 해치웠을 텐데.

    그런데 지금까지 살려뒀다는 건, 아마도 아직은 ‘필요’하다는 것.

    반소의 그 짐작을 믿어보기로 했다.

    생각을 정리하자, 혼잡했던 마음이 비로써 차분해졌다.

    괜찮아. 아직은.

    오늘까지 기다려보고 내일은 귀물경비대와 어떻게 할지 의논해 보자.

    “오늘은 그냥 여기서 야영을 하면 어떨까요?”

    풍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바닥도 평평하고 수풀도 적당히 우거진 게…, 괜찮아 보입니다.”

    가비도 풍을 따라 주위를 둘러봤다. 풍의 말처럼 오늘 밤을 쉬어가기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래봤자 다들 보초를 서며 새우잠을 자겠지만.

    풍이 무기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먹을 만한 게 있는지, 주변은 안전한지 정찰을 나가기 위해서였다.

    “반은 날 따라오고, 반은 여기 남아라.”

    그 말에 귀물경비대 절반이 풍을 따라 길을 나섰다. 남은 절반은 곤과 함께 가비를 에워싸듯 둘러앉았다.

    “하하. 적응 안 된다.”

    둥그런 원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은 가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옆에 있던 연화도 소심하게 속삭였다.

    “나도….”

    가비가 불로초인 동시에 반소의 정인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귀물경비대는 가비를 깍듯이 존대했다. 연화 역시 호칭을 바꾸고 존대를 하려 했지만 가비가 바라지 않았다.

    ‘나중에 연화야. 지금은 그냥 내 친구로 있어 주면 좋겠어.’

    그런 이유로 무리에서 연화 혼자만 가비를 편히 대하고 있었다.

    가비가 육포를 잘게 찢어 연화와 조금 나누고, 나머지는 곤에게 돌려주었다.

    “아니, 왜 이걸 다시……,”

    “안 받으면 나도 안 먹을 거예요.”

    그 말에 꾹, 곤이 입을 다물며 육포를 받았다. 뚱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그 모습을 본 연화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덩치는 산만 한 분이 엄청 잘 삐지는 것 같아.”

    “그래서 좀 귀여운 듯.”

    “그런가?”

    둘이 키득키득 웃자, 곤이 영문도 모른 채 귀가 가려운지 후비적거렸다.

    “다들 잘 있을까?”

    웃음을 그친 연화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무사하겠지?”

    가비는 대답 대신 하늘을 바라봤다. 말은 안 했지만 불안하던 참이었다.

    반소와 달리 그들은 평범했기에. 오정과 겸복, 그리고 서문까지. 모두 자신 때문에 위협을 받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이대로 반소에게 소식이 없으면, 일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데.

    그럼 반소와 그들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을 당할 수도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면 내 발로 태황궁에 들어가야겠지.

    모두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뿐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며, 가비가 아무렇지 않게 말문을 열었다.

    “오정이랑 겸복이도 연화 네 걱정 얼마나 했는지 몰라. 그렇게 퇴궁해 버려서 다들 많이 놀랐거든.”

    “퇴궁? 퇴궁이라니?”

    연화가 무슨 소리냐는 듯 돌아봤다.

    “나 퇴궁한 적 없는데? 퇴궁은 퇴직서를 내야 하잖아.”

    “…퇴궁한 적이 없다니?”

    가비의 얼굴이 굳었다.

    “퇴궁하고 납치된 거 아니었어?”

    “아니야, 그런 거!”

    연화가 펄쩍 뛰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는 떠올리기 싫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날 저녁, 밥을 먹고 방에 들어가 쉬고 있었어. 잠이 안 와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들었고. 그런데 누가 방에 들어온 것 같은 거야. 그래서 눈을 떴는데, 그 뒤론 기억이 없어. 깨어나 보니까 낯선 방이었고, 그곳에 며칠을 갇혀 있었어. 그러다가 매혈을 당한 뒤에 감옥으로 끌려간 거고.”

    가비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이 말이 사실이면…….

    너무도 태연하게, 연화가 직접 퇴직서를 제출하고 퇴궁했다고 말한 서문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어의도 한패야!

    가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사사삭-

    그때, 멀리서 수풀이 흔들렸다. 가비가 눈을 돌리자, 귀물경비대가 재빨리 일어나 손에 무기를 쥐었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익숙한 기척이었다. 느껴본 적 있는.

    파삭, 파사삭-

    사람 키만 한 수풀이 여기, 저기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비가 사색이 된 얼굴로 중얼댔다.

    “…귀물.”

    “뭐?”

    자신을 올려다보는 연화의 손을 가비가 붙잡았다.

    “도망쳐…, 귀물이야!”

    그 말을 끝으로, 풀숲을 가르고 귀물들이 튀어나왔다.

    와글와글, 엄청난 숫자였다. 사람 크기만 한 귀물들이 벌떼처럼 기어왔다.

    “대형을 갖추고 공격하라!”

    곤의 고함이 사방을 울렸다. 이내 야영지는 귀물들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연화야, 이리와!”

    곤의 엄호를 받으며 가비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손바닥이 긁히는 것도 모르고 먼저 올라가, 연화의 손을 잡아당겼다. 연화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못 올라가겠어! 어떡해!”

    공포에 질린 연화가 허겁지겁 그 뒤를 따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곤이 달려드는 귀물을 베어내며 연화의 엉덩이를 받쳐 위로 올려주었다.

    “꺄악!”

    가지 위로 간신히 올라온 연화의 몸이 기우뚱했다. 그 몸을 붙잡아 안전하게 안쪽으로 앉혔다. 그리고 상황을 지켜봤다. 귀물은 개미를 닮은 형상이었다. 언젠가 반소가 자신을 나무에 매달아 미끼로 썼을 때, 그때 봤던 귀물들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아니, 그놈들보다 세고 강해.

    자세히 보니 그때 봤던 놈들과 달리 외피가 짙은 황색에 턱과 앞다리가 발달해 있었다.

    “가, 가비야, 어떡해…. 나 너무 무서워.”

    연화가 덜덜덜 떨며 겁에 질린 얼굴로 나무 아래를 내려다봤다.

    쿵!

    나무가 흔들렸다. 연화가 나무의 몸통을 끌어안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가비도 중심을 잡기 위해 나뭇가지에 꼭 달라붙었다.

    쿵!

    다시 한번 나무가 흔들렸다. 밑을 보니 귀물들이 몰려와 머리로 나무를 치받고 있었다.

    “어딜!”

    곤이 달려와 묵직한 도(刀)로 귀물들을 두 동강 냈다.

    “가비님을 보호하라!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해!”

    정찰을 나갔던 풍과 귀물경비대가 복귀했다. 인원이 더해지며 귀물들이 삽시간에 쓰러졌지만, 그 수가 끝도 없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나오는 거야.

    가비가 심호흡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두 팔로 중심을 잡으며 나뭇가지 위로 꼿꼿이 섰다.

    멀리- 수풀 너머로 둥그렇게 팬 구멍들이 보였다. 귀물들은 그곳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땅속에서 사는 듯했다.

    “저기-!”

    손을 뻗으며 귀물들의 본거지를 가리킬 때였다. 본거지 주변으로 아주 작은, 조그마한 녀석들이 보였다. 덤비는 것들이 성체라면 저것들은 분명 새끼였다.

    가비 무리를 ‘적’으로 인지한 귀물들은 본거지를 버리고 싸우고 있었다. 귀물들의 일부는 공격을, 일부는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진을 치는 형국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비의 눈이 흔들렸다.

    멀리서 지켜보는데도 귀물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심이 전해졌다. 새끼들을 지키는 귀물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귀물경비대를 공격하는 귀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저들에겐…, 우리가 침략자인 걸까?

    목숨을 위협하고 자신들을 도륙하는…, 살인귀인 걸까?

    우리에겐 죽음의 땅으로 보이는 이곳이, 저들에겐 단 하나뿐인 생존의 땅인 걸까?

    그걸 우린, 우리의 잣대로 판단하고 휘젓고 있는 걸까?

    우리 마음대로…….

    흔들리던 가비의 눈이 마치 화면 속의 영화를 보듯 느리게, 느리게 모든 것을 훑었다.

    잿빛 하늘과 황폐한 숲을.

    거친 나무와 메마른 땅을.

    그 아래 서로의 목숨과 안위를 위해 싸우고 있는 귀물경비대와 귀물들을.

    불현듯 가슴이 공허해지며 그 안으로 뜨거운 감정이 차올랐다.

    쿵!

    그때, 귀물 하나가 나무를 들이받았다.

    멍하니 서 있던 가비가 그대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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