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81화 (81/95)
  • [81화]

    늦은 새벽. 가비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았던 곤과 풍도 어느새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앉은 자세로 기우뚱, 잠이 들어 있었다.

    그들이 깰까 봐 조심스레 신발을 신고 마당 한가운데 놓인 평상에 걸터앉았다. 올려다본 밤하늘은 짙은 먹빛을 띠고 있었다.

    후텁지근한 여름 바람이 가비의 뺨을 스쳤다. 꿈에서 보았던 할아버지 은수만과 불로초로 태어난 자신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건 불로초, 인간 은가비의 시작이었다.

    제 첫 번째 삶.

    그리고 두 번째 삶은 가비가 기억해낸 바로 직전의 삶이었다.

    태황궁에서 현에게 겁탈당하고 반소와 이별을 맞는.

    그럼 지금이 세 번째 삶이라는 건데.

    의문이 생겼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태황국에서 살았는데, 왜 세 번째 삶은 다른 세계인 걸까.

    그리고 지금의 삶이 왜 두 번째 삶과 겹치는 걸까.

    정확하게는 겹친다기보다 반복된다는 느낌이 강했다. 현도, 천태비도, 그리고 반소와 자신까지. 모든 인물과 상황들이 마치 겪은 적이 있는 일처럼 되풀이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회귀 같은 걸까?

    그럼 나는 왜, 태황국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거지?

    이 모든 일이 ‘회귀’라면 그 시작도 마땅히 태황국이어야 했다.

    은가비의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 모두 태황국이 시작이었으니까.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그런데 아니다.

    그럼 이 모든 일을 ‘전생’과 ‘현생’으로 봐야 할까?

    그렇다면 적어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거나 겹치는 상황은 없어야 했다.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이 완전히 달랐던 것처럼.

    그럼 지금의 난…, 뭐지?

    내 삶은……, 뭘까?

    현존하는 자신에 대한 물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어졌지만 딱히 답은 찾을 수 없었다. ‘회귀’ 또는 ‘전생’과 ‘현생’에 대한 도돌이표 같은 의문만이 머릿속을 떠다닐 뿐이었다.

    와중에 명확한 결론 몇 개는 건졌다.

    하나는, 제 삶이 반복이든 아니든 변함없이 ‘불로초’라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 삼생을 거치며 다른 삶을 살아도, 결국 불로초로 태어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은가비 뿐이었다.

    또 하나는, 자신의 능력이 단순히 ‘불로불사’가 아니라는 것.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거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직감일뿐. 그 힘을 어떻게 끌어내야 하는지, 사용해야 하는지는 막연하기만 했다.

    마지막 하나는, 반복된 듯 보이는 두 번째 삶과 지금의 삶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단 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불로불사의 힘을 가진 은가비는, 제 삶 자체는 온전히 살아내지 못했다.

    첫 번째 삶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두 번째 삶은 ‘생’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림으로써 육체적인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지금의 은가비는 달랐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나약하지 않았으며, ‘생’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릴 만큼 심약하지도 않았다.

    그건 반소도 마찬가지였다.

    직전의 삶은 대의라는 명분으로 반역을 일으켜 은가비를 잃었지만, 지금의 삶은 은가비를 지키기 위해 반역을 일으킨,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그러니까 달라.

    가비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반소.

    네가 날 지킨 것처럼, 나도 널 지킬거야.

    우린 서로를 지킴으로서 같은 상황을, 같은 결과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

    지금의 삶이 전생의 반복이든, 회귀이든, 그 무엇이든.

    그렇게 생각하자 중요한 건, 이 삶에 대한 정체성이 아니었다.

    그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우리였다.

    덜컹-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화였다.

    연화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가비 옆에 앉았다. 그 안색이 무척 피곤해 보였다.

    “괜찮아?”

    “그 말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지.”

    연화가 걱정 어린 얼굴로 되물었다.

    “괜찮아?”

    가비가 대답 대신 화살을 맞았던 제 팔뚝을 보여주었다.

    세상에.

    흔적도 없이 나아 있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연화를 보며, 가비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나도 놀랐어. 눈 뜨고 나니까 몸이 가뿐하더라고.”

    “…다행이다.”

    연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비가 불로초라는 게 몸소 증명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두가 받아들여야 했다. 연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안해.”

    가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널 자꾸 위험하게 만들어서.”

    이유가 어찌 됐건 가비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았다. 지금은 귀물의 땅을 함께 가야 할 처지가 되었고. 하지만 연화는 덤덤했다.

    “말했잖아.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거기 있었으면 죽었을 거야. 나한테도 선택지가 없었어. 널 따라오는 수밖에.”

    아마 궁을 벗어나기도 전에 잡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잡혔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테고. 그러느니 차라리, 귀물경비대를 따라나선 게 현명한 처사였다.

    친우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구해준 가비를 믿었다. 그런 가비가 믿는 반소와 귀물경비대를 믿었고. 해서 이 선택이 잘못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사 귀물의 땅에서 죽는다 해도….

    그건 타살이 아니라 사고사일 테니 적어도 억울하진 않을 것 같았다.

    “단지 좀 서운할 뿐이야.”

    “서운해?”

    “네가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란 게.”

    “아, 그건…,”

    “내가 너 좋아했잖아. 첫사랑이었거든.”

    “…….”

    얼어버린 가비를 보고 연화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농담이란 걸 알고 가비도 싱겁게 웃어버렸다.

    어느새 하늘에 박힌 별이 사라지고 동이 트고 있었다.

    “은갑님!”

    문이 벌컥 열리며 가비를 찾는 고함이 들려왔다. 곤이었다.

    곤이 허옇게 뜬 얼굴로 평상에 앉은 가비와 연화를 바라봤다. 눈 떠보니 사라진 가비 때문에 심장이라도 철렁 내려앉은 얼굴이었다.

    “아니, 왜 여기에…. 말씀이라도 하고 나가시던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곤의 얼굴이 볼만했다. 꼭 아기를 맡은 보모 같은 표정이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뒤따라 나온 풍이 물었다.

    가비가 팔뚝을 걷어 보이며 웃었다.

    “멀쩡해요. 다 나았어요.”

    그 말에 신기한 듯 곤과 풍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후 귀물경비대 전원이 곤과 풍을 따라 마당으로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가비가 연화를 비롯한 귀물경비대를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사과할게요…. 그동안 여자인 걸 숨겼어요.”

    굽혔던 허리를 펴자, 모두의 시선이 가비를 향해 있었다.

    그들의 눈을 보며 가비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내 진짜 이름은 ‘은가비’예요. 나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지만, 적어도 피해는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잘 부탁합니다!”

    가비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색한 듯 눈을 굴렸다.

    반소의 정인이라고 했다. 반소가 연모하는 여인이라고.

    그런 사람이 저희에게 고개를 숙여서 사과하고 잘 부탁한다며 인사를 하니, 괜히 쑥스럽고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거, 가비님께선 제 등 뒤에 딱 붙어 계십쇼!”

    서먹한 분위기를 뚫고 곤이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귀물들이 얼씬도 못 하게 이 곤이 지킬 테니.”

    가비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처음에는 우락부락했던 곤의 인상이 지금은 누구보다도 듬직해 보였다. 곤뿐만이 아니었다. 침착하고 이성적인 풍도, 그 외의 모든 귀물경비대도 든든한 버팀목처럼 느껴졌다.

    비로소 귀물경비대를 아꼈던 반소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반인반귀로 불리지만 누구보다도 따뜻한 그들의 심성을.

    곤의 호언장담을 시작으로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옷을 갈아입고 떠날 준비를 마친 가비가 힘있게 발을 내디뎠다.

    “갈까요?”

    사위가 푸르게 밝아질 무렵, 주막을 나섰다.

    모두의 걸음이 거침없이 한 곳으로 향했다.

    경계를 넘어 귀물의 땅으로.

    * * *

    뚝. 뚝.

    습한 지하 감옥은 계절을 비껴간 것처럼 추웠다. 천장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반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까무룩, 정신을 놓았던 건지 눈을 뜨자 통증이 몰려왔다. 온몸으로 욱신거리는 둔통이 느껴졌다.

    그제야 반소는 자신이 묶여 있다는 걸 알았다. 양쪽 손목이 쇠사슬로 포박된 채, 십(十)자 모양으로 매달려 있었다. 맨발바닥으로 싸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벌거벗은 상체는 시퍼런 멍 자국과 굳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아아…, 그랬지.

    올가미에 걸린 채 꽤 오랜 시간을 버텼다. 가비를 태운 귀물경비대가 최대한 멀리 달아날 수 있도록, 방패막이가 되었다.

    모든 힘을 소진할 때까지.

    마침내 주술력이 끊어지고 맥없이 쓰러지자, 칼이나 활이 아닌 곤봉이 날아들었다. 딱 움직이지 못할 만큼만 때렸다. 생포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래서 확신했다. 자신을 살려두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어쨌든 소진된 주술력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수 있었다. 다만 그 힘을 좀 더 오래,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자유자재로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부족했다. 이보다 더 큰 힘이 잠재되어 있는데. 그것이 느껴지는데. 그걸 어떻게 터트려야 할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반소가 사슬에 묶인 손을 쥐락펴락해 보았다.

    하루. 하루면 될 것 같다.

    주술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이 사슬을 끊고 탈출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까지 가비가 잘 버텨주길 바랐다. 자신이 갈 때까지만.

    가서 다음 일을 도모할 작정이었다. 그게 반역이 되고 역적이 되는 길이라 해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니, 두고 볼 수 없게 되었다.

    천태비가 살아있는 한, 가비는 안전하지 못할 테니까.

    그런 위협 속에서 가비를 살게 할 수 없었다.

    이 땅에서 함께 하려면 위험이 되는 요소는 모조리 잘라내야 했다.

    그게 천족을 쓸어내고 천지를 뒤바꾸는 일이라 할지라도.

    저벅. 저벅.

    무덤 같은 적막을 깨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반소가 힐긋 눈을 들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이 철창 앞에서 멈췄다.

    침통한 표정의 서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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