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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75화 (75/95)
  • [75화]

    ‘침소로 통하는 뒷문.’

    꽃모종을 심었던 날, 반소와 함께 뒷문을 통해 침소로 들어갔던 게 떠올랐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비밀 통로. 그게 천태비의 침소에 없을 리가 없었다.

    침소로 들어온 가비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방안을 둘러봤다.

    “…….”

    누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조마조마함 속에, 애써 침착하게 눈을 굴렸다. 일단 그림이 걸린 자리부터 살폈다.

    그때 문을 당겨서 열었지?

    그럼 안에서는 밀어야 열린다는 건데.

    무턱대고 벽면을 밀어보았다.

    여긴 아니야.

    가비가 서둘러 다른 곳을 살폈다. 장식장의 뒤편과 사방탁자가 놓인 옆면. 그리고 특이한 문양의 벽지가 발라진 벽까지. 꼼꼼히 만져보고 밀어보았다.

    그렇게 방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없는 건가?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방안을 찬찬히 다시 한번 살폈다. 급할수록 돌아가랬다고. 조급한 마음을 따라 행동까지 경거망동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없을 리가 없잖아.

    반소의 침소에도 있는데, 천태비의 침소에 없다는 게 말이 돼?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면 문을 미는 힘이 약했던 걸까?

    다시 한번 살펴볼 요량으로 움직일 때였다. 무심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침상 아래에 놓인 양모로 만든 깔개였다. 정확하게는 천태비가 침상에서 발을 내리는 자리에 깔려 있었다.

    가비가 그것을 들췄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바닥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러다 툭, 손가락이 두 개 정도 들어갈 만큼의 팬 자리를 발견했다.

    설마…….

    반신반의하며 그것을 당겨보았다. 꿈쩍하지 않았다.

    아닌가?

    다시 한번 힘껏 당겨보았다.

    끼긱-

    “……!”

    움직였다.

    가비가 힘을 쓰기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작은 틈에 손가락을 고쳐 건 뒤, 있는 힘을 다해 당겼다.

    끼기기긱-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돌계단이 있었다.

    찾았어!

    가비가 서둘러 발을 디뎠다. 치워놨던 깔개를 문짝에 얹고 문을 닫았다.

    쿵-

    빛이 사라지자 칠흑 같은 어둠이 가비를 덮쳤다. 더듬더듬, 손으로 벽을 짚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곧 자정이었다. 반소와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각.

    하지만 돌계단은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남은 거야.

    계단 밟기에 신물이 날 즈음, 아롱거리는 불빛이 시야를 밝혔다. 덕분에 남은 계단을 수월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마침내 땅을 밟은 가비가 놀란 숨을 삼켰다.

    “…헉!”

    계단 끝엔 문이 없었다. 대신 또 다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 * *

    천태비는 급히 장곡의 거처로 향했다. 장곡의 거처 맨 끝방. 빛 한점 들지 않는 오래된 창고가 있었다. 누가 죽어도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천태비는 장곡을 통해 매혈꾼을 만났다. 그새 매혈꾼은 받은 돈으로 호의호식이라도 했는지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흘렀다.

    천태비 앞에 끌려온 매혈꾼은 두려움에 떨었다. 몰랐는데, 함께 매혈꾼으로 고용됐던 사람 모두 죽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이곳으로 끌려오던 중에 들었다.

    “처, 처, 천태비님 살려주십시오!”

    이 일을 사주한 것이 천태비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 나리! 제발 살려주십시오!”

    매혈꾼이 무릎으로 기어가 목석처럼 서 있는 장곡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제게 일을 고용한 사내였다. 허나 장곡은 꿈쩍하지 않았다.

    “천자는 어찌하고 있나요?”

    천태비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장곡이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천태비가 보낸 전갈을 받고 몹시도 들뜬 표정으로 침소에 있었다.

    “하아…….”

    천태비가 골이 아픈 듯 앉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이마를 짚었다.

    잠시 후. 창고 문이 열리고 시종관이 들어왔다. 시종관이 종지 그릇 하나를 천태비에게 내밀었다. 피가 고여 있었다. 천태비가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웩!”

    비렸다. 역하게. 이는 분명 불로초의 것이 아니었다.

    분노한 천태비가 종지 그릇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금 천태비의 기분 같았다.

    오늘 밤. 계획했던 모든 일이 틀어졌다.

    천자에게 선물로 보내려던 계집은 도망쳤고, 불로초인 줄 알았던 어의 년은 알고 보니 맛없는 맹탕이었다.

    “아아아악!”

    화를 이기지 못한 천태비가 매혈꾼을 걷어찼다. 매혈꾼이 억!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바른대로 말해라. 그날 그 어의 년의 피를 어찌 뽑았는지!”

    중간에서 바뀐 건지, 그도 아니면 빼돌린 건지.

    만약 빼돌린 거라면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이 귀한 걸 남과 공유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철저히 비밀에 부친 것이었다.

    불로초의 효능을 알면 서로 가지려고 덤빌 걸 알기에.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매혈꾼이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말했다.

    “몰라? 다 같이 보고 들은 것이 있는데 모른다니.”

    천태비가 차게 식은 얼굴로 읊조렸다.

    “너와 함께 고용되었던 놈들이 어찌 되었는지 못 들었느냐? 그놈들 목숨 값까지 네게 준 것이다. 만에 하나 생길 불상사를 대비하여.”

    그리고 그 불상사가 정말 일어날 줄은 몰랐다.

    “허니 잘 생각해 보거라. 그날 그 어의 년의 피를 뽑았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네 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야.”

    서슬 퍼런 협박에 매혈꾼이 머리를 감싸 쥐고 고심했다. 머리와 등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특이점이 없었다.

    어의라는 신분으로 매혈하러 온 게 특이하긴 했지만 정말 그뿐이었다. 매혈꾼은 억울한 표정으로 울먹였다.

    “정말…, 정말 별일 없었습니다, 천태비님! 정말입니다, 나리!”

    매혈꾼이 천태비와 장곡을 번갈아 보며 애원했다.

    “저희도 그저, 그, 어의가 매혈하러 왔다는 게, 별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돈은 그 오라비가 받아가길래, 지지리도 못 사는 모양이라고 뒷말만 나눴을 뿐입니다!”

    “오라비?”

    천태비의 눈썹이 꿈틀댔다.

    “오라비라 하였느냐?”

    “예? 예, 예! 그 어의의 오라비라는 사람이 보호자로 같이 왔습니다. 얼굴이 여인처럼 하얗고 곱상해서 똑똑히 기억합니다!”

    “…하. 그 년에겐 오라비가 없는데?”

    이미 연화의 출생기록부를 뒤져본 천태비였다. 동생들만 줄줄이였다.

    헌데 오라비?

    “그날이 무슨 날이라고 했지?”

    묻자, 장곡이 바로 답했다.

    “태어의 서문이 말단 어의들을 몇 데리고 약초방에 감찰을 나간 날입니다. 함께 나간 이들의 명단은 홍춘과 명환. 연화와 은……,”

    순간 장곡이 말을 멈췄다.

    갑작스레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곡과 시종관이 부릅뜬 눈으로 천태비를 바라봤다.

    스산한 적막 속에, 천태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구나. 내 불로초.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희열감이었다.

    왜 몰라봤을까.

    이리 가까이에 두고.

    그리 맑은 기운을 가졌는데.

    천태비의 웃는 얼굴이 기묘하게 이지러졌다.

    이내 자리를 박차고 창고를 나섰다.

    “이 자는 어찌할…,”

    “죽여요.”

    산뜻하게 말하며 장소를 벗어났다. 등 뒤에서 매혈꾼의 단말마가 들렸다.

    * * *

    지금껏 단 한 번도 여인을 품으며 긴장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허나 오늘 밤.

    현은 떨리는 심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초야(初夜)를 맞은 새신랑이 된 기분이었다.

    아직 멀었는가.

    현이 초조한 눈으로 방 한쪽을 바라봤다. 그곳에 폭신한 깔개와 읽을 수 있는 서책, 그리고 주전부리가 놓여 있었다. 그날 가비가 잘 먹고 잘 보던 것들이었다.

    ‘책 볼 땐 입이 심심한데.’

    그렇게 말하며 제 앞에서 스스럼없이 엎드려 책을 읽던 가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계집은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저 취하는 거랍니다.’

    어머니 천태비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돈과 권력을 싫어할 계집은 없어요.’

    과연 은갑이 네가 그럴까?

    아니.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연회 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형님을 택하진 않았겠지.

    헌데 난…, 그런 네가 갖고 싶다.

    처음 느껴보는 이 마음이 연정이 아니면 무얼까. 그래. 연정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불로초는 그저 병증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반려를 기다리던 마음과는 달랐다. 이 마음은.

    네가 웃는 것, 우는 것, 찡그리며 화내는 모습까지 모두 보고 싶다.

    오직 나만 보고 싶어.

    그 강렬한 소유욕이 현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허니 망설이지 말고 가져요.’

    예. 가질 것입니다. 형님보다 먼저.

    내가 온전히 차지할 겁니다.

    가비를 생각하며 일렁이던 눈빛에 검은 욕망이 드리워졌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애가 닳아 심장이 지글거렸다.

    “…장곡!”

    밖에 서 있을 장곡을 부르며 나가려는데,

    쾅!

    거칠게 문이 열리며 천태비가 들어왔다. 그 뒤엔 시종관과 장곡도 함께였다.

    “어머니….”

    “천자!”

    천태비가 감격한 얼굴로 현의 손을 잡았다.

    “당장 경비대를 부르세요! 야경대 주경대 모두 다요!”

    “예?”

    “천자가 마음에 둔 그 아이…. 그 아이가 불로초랍니다.”

    “그게 무슨….”

    “그토록 바라던 천자의 반려! 천자비가 될 아이가 은갑이, 그 아이라고요!”

    순간 핑- 머리가 돌았다.

    은갑이…. 은갑이가 불로초라니.

    당황한 천자의 눈이 천태비 뒤에 서 있는 장곡에게로 향했다.

    장곡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은갑이 네가 내……!

    하늘이 정한 짝. 나의 천자비.

    머리끝이 쭈뼛 서는 듯한 전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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