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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71화 (71/95)
  • [71화]

    그날 정오. 오전 업무를 마친 가비가 식당 앞에서 겸복과 오정을 만났다.

    점심 식사를 끝낸 후, 세 사람은 식당 뒤뜰에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다과방에서 가져온 약과를 씹으며 오정이 물었다.

    “근데 은갑아, 너 어제 어디서 잔 거야? 오늘 아침에 보니까 방에 없던데.”

    “…어?”

    가비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

    “으, 음궁 약방에. 거기서 잠들었어. 술 취해서.”

    “뭐? 약방? 푸하하! 야- 너 진짜 뼛속까지 어의가 될 놈이구나? 어떻게 술에 취해도 업무지에 가서 잠이 드냐? 대단하다.”

    오정이 못 말리겠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옆에서 겸복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제 반소를 찾던 가비를 모른 척해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사람들 참 간사하지 않냐? 이제는 근처에도 안 오네.”

    그저께까지만 해도 ‘은갑아, 은갑아’를 외치며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이 싹 사라지고 없었다.

    연회 날이었던 어제를 기점으로 가비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비의 위치는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천자의 총애를 받는 자에서 외면을 받을 자로.

    누군가는 어리석은 놈이라 생각할 테고, 누군가는 반인반귀를 따르는 미친놈이라 생각하겠지만 가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도 아니었고, 겸복과 오정은 변함없는 태도로 제 곁에 있어 주니 든든했다.

    게다가 현의 혼인 소식을 들은 후 마음이 편해졌다.

    혼인을 앞둔 그와 자신이 더는 엮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참! 나 연화한테 편지 붙일까 하는데.”

    “편지?”

    겸복과 오정이 가비를 돌아봤다.

    가비가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은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잘 지내고 있는지, 뭐 하고 사는지 너무 궁금해서.”

    말은 안 했지만, 퇴궁한 이유에 대해서도 물어놨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굳이 답 안 해줘도 된다는 말과 함께.

    “이따가 우전실에 가서 보내려고.”

    “그럼 나도 몇 자 쓸래!”

    오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겸복도 오정을 따라 일어났다.

    그 길로 세 사람은 명의당, 가비의 방으로 향했다. 오정과 겸복이 종이 한 장에 쓰고 싶은 말을 적어 가비에게 내밀었다. 가비가 그것을 잘 접어서 제가 쓴 편지와 함께 봉투에 넣었다.

    “그럼 오후에도 수고!”

    “파이팅!”

    “그래, 파이팅!”

    주먹 쥐고 파이팅을 외치는 오정과 겸복을 향해 가비도 주먹을 들어 보였다.

    우전실은 음궁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가비가 편지를 들고 우전실의 문을 열었다.

    “계십니까?”

    소리를 들은 담당자가 커다란 우편함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편지를 보낼까 합니다. 이름은 연화, 지금은 퇴궁했지만 얼마 전까지 어의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담당자가 주소지 보관함 쪽으로 걸어갔다. 듣자 하니 우전실엔 태황궁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의 집 주소가 기록, 보관돼 있다고 했다. 간혹 가비처럼 집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지냈던 마을이나 지역 이름을 적어놓는다고.

    그 중 퇴궁한 사람들의 정보는 따로 분류하는지, 담당자가 보관함의 맨 아래쪽을 뒤적였다.

    “여깄네.”

    혼잣말로 중얼대더니 주소가 적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편지는 거기 두고 가시면 됩니다.”

    “예.”

    아무리 친분이 있다 해도 개인 주소는 타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해서 우전실의 담당자가 직접 주소를 적어 보내주는 형식이었다.

    편지를 막 서탁 위에 두고 돌아서는데,

    탁-!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서탁 위의 편지를 덮었다.

    가비가 놀란 눈을 들었다. 반소였다.

    “반…, 소님.”

    입을 벙긋대는 가비를 보며 반소가 눈짓으로 나가자고 가리켰다. 편지는 손에 든 채였다.

    결국 반소를 따라 우전실을 나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쭉 빼고 바라보는 담당자의 눈을 피해 사람이 없는 외진 곳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주변을 둘러본 가비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반소가 대답 대신 편지를 찢었다.

    “왜 이래!”

    가비가 반소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편지는 갈가리 찢겨 반소의 손안에서 구겨진 후였다.

    “사람이 죽었다.”

    반소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뭐? 또 귀물 짓이야?”

    “아니.”

    “그럼?”

    “집에서 칼을 맞고 죽었어. 여든이 훌쩍 넘은 맹아 노인.”

    “맹……,”

    말문이 막힌 얼굴로 가비가 반소를 바라봤다.

    “너도 아는 사람이지?”

    반소의 물음에 가비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반소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걸 짐작하고 물은 듯, 반소가 말을 이었다.

    “알아보니 매혈꾼들에게 고용되어 피를 뽑던 사람이라고 하더군.”

    “맞아. 그래서 더 의심했고. 왜 하필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는 사람을 쓸까 생각했었거든.”

    “매혈꾼과 제일 오래, 가깝게 지내고 소통한 사람이다.”

    그 말은 즉, 매혈꾼들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노인이란 뜻이었다. 매혈한 장소도, 장소를 빌려준 사람도, 그리고 직접적으로 시술해준 사람까지 사라졌으니 뒤를 캘 수 있는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피를 판 사람들도 사실을 떠벌리지 않기에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현장에 직접 방문해서 매혈했던 가비와 연화 이외에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또 하나.”

    반소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방금보다 어두운 표정이었다.

    가비의 심장이 불안하게 들썩였다.

    “뭔데. 말해봐.”

    반소가 손안에 있는 편지를 힘껏 움켜쥐었다.

    “연화라는 네 동기가 사라졌어.”

    “…뭐?”

    며칠 전 우전실을 몰래 털어내어 주소를 알아낸 뒤, 집으로 직접 찾아갔었다.

    “휴가일 때 이후로 집에 온 적이 없다더군.”

    “그게…, 무슨 소리야?”

    “가족들은 여전히 궁에서 일하는 줄 알고 있어.”

    휘청-

    가비의 흔들리는 몸을 반소가 붙들었다.

    “말도 안 돼….”

    “퇴궁한 뒤 납치를 당한 건지 스스로 몸을 숨긴 건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고.”

    “연화가 왜? 뭐 때문에?”

    가비는 당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이 일이 귀물 사건과 관련된 게 맞긴 한 걸까?

    그럼 매혈꾼들은 누가 고용했고, 피가 필요한 이유는 뭘까.

    그것도 갓 성년이 된 젊은 여자의 피가.

    순간-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 지금.”

    너무 터무니없다는 걸 아는데. 아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걸 아는데.

    “이 일 혹시…, 귀물이 아니라 태황궁과 관련된 걸까…?”

    가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반소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맞아…? 그렇게 생각해?”

    아마도 가비와 같은 의심을 품는 듯했다.

    가비가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들에게만 민간요법으로 알려진 거지, 천태비와 천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잖아.”

    인간 불로초. 오직 그 사람의 피만이 현의 병증을 고쳐 줄거라 확신한다고 했다.

    그럼 불로초가 나타났다는 천태비의 별점.

    다른 때보다 유독 길어진 현의 병증.

    매혈꾼들의 등장.

    그리고 혼인 발표까지.

    이 모든 게 마치 한 줄기를 탄 듯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야. 그럼 안되는 거잖아.

    만약 그것 때문에 연화가 사라진 거라면……, 그건 나 대신…….

    내가 바로…….

    “…그럴 리가 없어!”

    가비가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반소가 놀란 얼굴로 가비의 어깨를 붙들어 세웠다. 잔뜩 날이 선 눈으로 가비의 반응을 살폈다.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져 있었다. 분명 반소에게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반소의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꿈을 꿨던 밤처럼, 불길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쳤다.

    “말해. 뭐가 문젠지.”

    가비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일부러 말 안 하려던 게 아니야. 난 단지…….”

    별일 아니었기에 말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연화 대신 팔을 내준 게 뭐 대수라고.

    그랬는데…….

    짐작하는 게 맞다면…, 어쩌지?

    그럼 내가 이번 일의 원인이라는 건데.

    그런 생각에 다음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정말…. 정말 연화가 불로초로 오인을 받아 사라진 거라면….

    결국 그 불로초는……, 나란 얘기잖아.

    믿을 수도 없고 믿기지도 않는 얘기였다.

    불로초라니.

    사람이 가진 피가 사람을 낫게 한다니.

    그런 허무맹랑한 일이 어떻게 존재한다는 거야.

    하물며 난…, 이쪽 세계 사람도 아닌데.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생각에 멍한 얼굴을 하고 있자, 반소가 잡고 있던 어깨를 한번 흔들었다.

    “……!”

    눈이 마주쳤다.

    “가비야.”

    나직한 부름에 정신이 돌아왔다.

    이걸 말하면 내가 여자라는 게 밝혀지게 돼.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하면 연화가…….

    가비가 마음을 다잡은 듯,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실은 그날 매혈한 사람, 연화가 아니야. 연화가 아니라…,”

    “…너야?”

    갑작스러운 물음에 가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반소의 미간이 깊게 팼다.

    “정말, 너야?”

    대답을 재촉하는 반소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건 가비가 여자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눈이 아니었다.

    그저 매혈의 여부만을 추궁하는, 마치 가비가 여자인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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