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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70화 (70/95)
  • [70화]

    모쪼록 즐거운 마음으로 베푼 연회가 엉망이 됐다. 아니, 연회 자체는 성공적이었지만 현의 마음만 엉망진창이었다. 기분이 불쾌하다 못해 진창에 빠진 것만 같았다.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느라 힘이 들었다. 결국, 측근들의 술잔을 채 다 받지도 못하고 연회 장소를 빠져나왔다.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 침소에서 술을 펐다.

    ‘목숨 걸고 경계를 지켜주시는 야왕님과 귀물경비대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반소와 눈을 맞추던 가비가 떠올랐다.

    말도 안 돼….

    그건 반소에게 돌아갈 인사가 아니었다. 귀물경비대를 창단하게 둔 천태비와 그걸 유지하게 둔 자신이 받아야 할 인사였다. 그게 당연했고 마땅했다.

    헌데 넌 왜…….

    가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총애한다는 것을 드러낸 후, 많은 이들이 가비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쓴다고 들었다. 흡족했고 만족스러웠다.

    곧 자신을 찾아올 거라 생각했고, 찾아오지 않아 부르게 된다면 그 전과 다른 얼굴로 볼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처럼 웃는 얼굴로.

    그러나 모든 게 어그러졌다. 가비는 제가 뜻한 것과 정반대로 향했다. 오히려 더 멀어져 버렸다.

    왜 하필 형님이냐….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따른다 해도 못 봐줄 판에, 하필이면 반소였다. 자신과 극과 극인, 불순한 혈통의 반인반귀.

    “천자님, 그만 드시고 누우시지요. 회복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심히 걱정이옵니다.”

    “말해봐라, 장곡. 이 분노가 무엇이냐.”

    제게 이런 감정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열불이 끓어올랐다. 지옥불이라 할 만큼 뜨겁고 강렬한 감정이었다.

    단순히 제가 아끼는 아이가 형님에게 간 것이 싫은 건가. 가비가 아니어도 제 발밑에 엎드려 총애를 기다릴 자는 줄을 서고도 남았다.

    그도 아니면 그저 형님이 무언가를, 누군가를 갖는 것이 싫은 건가. 내키지는 않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허니 결국 이 감정의 주체는 가비였다. 가비가 형님을 따르는 게 싫은 것이고, 형님이 가비를 갖는 게 싫은 것이다.

    내가 그 아이를……,

    불현듯 혼란이 일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비역질이라니. 구역질이 올라온다고 일갈했던 일이 아니던가. 헌데 속절없이 가비에게 향하는 이 마음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현이 거친 숨을 내쉬며 탁자 위로 몸을 수그렸다.

    “천자님!”

    장곡이 한달음에 다가와 현을 일으키려다 놀랐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현이 낮게 씨근덕댔다. 그 모습이 마치 성이 난 짐승과도 같았다.

    “욕정이 인다.”

    “허면 당장 시종 한 명을……,”

    “아니…!”

    다 필요 없다. 가비가 갖고 싶었다. 입을 맞췄던 느낌이 선연했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여인 같은 그 입술이…….

    “어찌하오리까….”

    현이 원하는 바가 무언지 알 수 없어 장곡은 새까맣게 속을 끓였다. 살해당한 선대 천자를 대신해 아들처럼 키워온 천자였다. 아니, 아들이 아니라 보물처럼 애지중지 곁을 받들어왔다.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자부했건만, 언제부턴가 빤히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천자님…….”

    제발 말씀을…….

    장곡이 애가 탄 그때, 밖에서 천태비가 왔다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곡이 냉큼 가 문을 열었고, 천자도 취한 몸을 겨우 가누며 고개를 들었다.

    “천자…!”

    천태비가 짐짓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장곡과 시종관을 통해 현의 상태를 듣고 온 것이었다. 천태비가 현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같이 좋은 날…, 왜 이런답니까.”

    천태비의 안타까운 손길이 현의 뺨을 어루만졌다.

    현이 입술을 짓씹으며 토로했다.

    “…괴롭습니다.”

    “뭐가요. 뭐가 천자를 그리 만들어요. 이제 곧 혼인 날짜를 잡고 천자비를 맞을 새신랑께서 그럴 일이 대체 무어가 있다고요.”

    하…. 그렇지. 잊고 있었다. 오늘 연회가 왜 열렸는지를.

    어머니께서 불로초의 행방을 알아냈다고 들었다. 부정 탈 것을 염려하여 혼인 날짜가 잡힐 때까지 밀궁에 고이 데려다 놓았다고.

    밀궁은 어머니인 천태비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고, 현은 그곳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얼 하시든, 어머니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저를 위해서라면.

    헌데 말처럼 이제 곧 새신랑이 될 자신은 제 짝인 불로초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불로초를 찾았다고 들었을 땐 기뻤다. 그런데 그 기쁨은 제 병증이 나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일 뿐, 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수로 찾았는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따위도 궁금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제 반려라고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온 여인을, 해서 흠모할 거라 생각했던 그 여인을 현은 조금도 관심 있어 하지 않았다.

    생각은 온통 가비와, 그 가비를 곁에 둔 반소에게 있었다.

    “다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마음만은 얻을 수 없다는 게 괴롭습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유형의 것이 무형의 것을 이길 수 없다는 걸.

    하여 처음 느껴보는 상실감이 현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투기심이 들끓었다.

    “천자…. 천자가 무얼 원하는지 이 어미는 다 알아요.”

    나긋한 천태비의 말에 현이 고개를 들었다. 잔뜩 일그러진 현과 달리 천태비의 얼굴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마치 모든 걸 꿰뚫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천자, 틀렸어요.”

    천태비가 현의 손을 가만히 다독였다.

    “계집은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저 취하는 거랍니다.”

    현의 눈썹이 꿈틀댔다. 어머니가 무언가 착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독심술을 가진 듯 제 속마음을 다 아는 어머니도 짐작하지 못하는 감정이라니.

    현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닙니다, 어머니. 계집이라니요. 그런 게 아니라…,”

    “계집이에요. 그 아이.”

    천태비가 입꼬리를 올렸다.

    현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천자의 몸이 그 아이가 계집임을 본능적으로 안 거지요. 그래서 이리 몸 달아하는 게 아닙니까.”

    “어머니, 지금 무슨 말씀을…,”

    현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숨을 삼켰다.

    “허면 은갑이 그 아이가…….”

    “그래요. 사내가 아닙니다. 서문의 도움을 받아 어찌 감추어왔겠지만, 제 촉을 피할 순 없지요.”

    외모를 떠나, 사내와 여인은 냄새부터가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시종관을 시켜 뒤를 캤더니 출생 기록부도 없는 근본 모를 아이였다. 그런 길가에 채는 돌멩이 같은 아이가 막 돋은 잡풀이 아니라 고고하게 솟은 연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기운이 너무 맑아서 내 위장까지 청소되는 기분이었어.

    병증을 치료하는 건 불로초겠지만 당장 현에게 정신적으로 필요한 건 그 아이였다. 못 줄 것이 없었다. 갖지 못해 안달하는 것뿐. 막상 가져보면 금세 흥미가 떨어질 테니.

    “돈과 권력을 싫어할 계집은 없어요. 맛을 보지 못했을 뿐, 한번 맛보면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게 그것입니다. 허니 망설이지 말고 가져요. 이 어미가 곱게 차려서 선물로 안겨 줄 테니.”

    충격이 가신 현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침잠됐다.

    그래. 은갑아…. 네가 그렇단 말이지.

    그제야 반소의 행동이 이해됐다. 왜 그리 가비를 싸고돌았는지. 곁에 붙여두려 했는지.

    아는 것이다. 그 아이가 여인이란 걸…

    해서 그리 흉흉한 눈으로 날 노려보았던 거야.

    이제야 길을 잃었던 감정이 방향을 잡은 듯했다. 부옇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개운해졌다.

    가비가 여인이라니. 제가 느끼는 감정에 정당성을 부여받은 듯했다.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 * *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잠을 깬 가비가 가늘게 눈을 떴다.

    “아, 머리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침상 아래로 발을 내리자, 문득 어제의 기억이 물밀 듯이 떠올랐다.

    향긋한 과일주. 익숙한 체향.

    입술, 숨결.

    그리고 마음….

    반소를 향한 제 감정과 몸을 휘감던 뜨거운 열기가 생각났다.

    “…반소.”

    이곳이 제 방이 아니라는 생각에 퍼뜩 눈을 들자, 텅 빈 방 안이 보였다. 반소는 일찌감치 나가고 없었다. 저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살폈다. 흐트러진 것 없이 그대로였다.

    “미쳤어.”

    자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키고 싶어서 아주 환장했지!

    얼굴을 문지른 가비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러다 우뚝, 동작을 멈추고 창가 아래 자리를 바라봤다. 어제 반소와 앉아 있던 곳이었다. 입을 맞췄던 자리이기도 하고.

    어쩌면 들켜도…, 상관없는 건가.

    반소에 대한 마음을 깨닫자 더는 감출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나 여자야….

    그 말을 하면 반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놀라겠지? 아니면 오히려 좋아할까?

    성별과 상관없이 내가 좋다고 했지만, 그래도 여자라고 하면 다행스럽고 기쁘지 않을까?

    어쨌든 사실을 고백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든 욕을 먹든 말해야 한다.

    그게 진짜 은가비니까.

    마음을 정한 가비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재빨리 명의당에 들러 세수하고 옷만 갈아입은 뒤 약방으로 올 생각이었다.

    허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침소 밖에 서 있던 시종관이 말을 건넸다.

    “일어나셨네요?”

    “헉, 시종관님.”

    가비가 당황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니까 그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반소를 상대로 밤새 술을 퍼마셨다고 하면 될걸,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다행히도 시종관이 먼저 말을 건넸다.

    “안 그래도 일어나시면 아침 식사를 챙겨주라는 반소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예? …예.”

    가비가 시종관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 딸린 방 한편에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국은 해장하기 딱 좋아 보였다.

    가비가 멋쩍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어? 근데 오늘은 밥이 두 개다?

    슬그머니 눈을 들자 시종관이 가비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식사 시간이 심심치 않게 밥 동무를 해주라고도 하셨거든요.”

    “아…….”

    뭘 그런 것까지….

    부끄럽고 쑥스러운 기분에 냉큼 밥 한술을 입에 떠 넣었다.

    “어의님 때문에 제가 별 경험을 다 해보네요.”

    잠자코 있던 시종관이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었다.

    “반소님과 꽃도 심어보고, 밥까지 얻어먹다니. 별일 중에서도 별일입니다.”

    “그런, 가요? 하하.”

    가비가 어색하게 웃으며 밥을 먹었다.

    그런 가비를 시종관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말단 어의는 삭막했던 음궁이 얼마나 변했는지 실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항상 차갑게 날이 서 있던 반소가 얼마나 무뎌졌는지도.

    그게 본인 때문이란 걸 모르고 있었다.

    “…뭐. 나쁘진 않네.”

    “예?”

    가비가 못 들었단 얼굴로 눈을 들었다. 시종관이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맛있게 드시라고요.”

    “네. 진짜 맛있어요. 그때 백숙도 끝내줬는데….”

    “또 해드려요?”

    “아니요,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니라……, 그래도 돼요?”

    염치 불고하고 그럼…, 이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시종관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소박하지만 정겨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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