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69화 (69/95)
  • [69화]

    모두 연회를 나간 음궁은 텅 비어 있었다. 침소는 불빛 한 점 없이 어둑했다.

    반소가 호롱불 하나를 밝혔다. 뒤를 돌아보자 창가 아래, 벽에 기대어 앉은 가비가 보였다.

    반소가 가비 옆에 나란히 앉았다. 가비는 세운 무릎에 턱을 괴고 있었고, 반소는 세운 무릎에 팔을 걸친 채였다. 일렁이는 호롱불 하나를 두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반소였다.

    “사람들이 널 달리 볼 거다.”

    “알아.”

    그 말에 반소가 가비를 돌아봤다. 미간을 찌푸린 반소와 달리 가비의 표정은 덤덤했다.

    “굳이 나설 필요 없었어.”

    배척? 고립?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이번 일로 사람들의 이목이 가비에게 집중된 것. 반소는 그게 싫었다. 더불어 질투심으로 끓어오르던 현의 눈동자도.

    그건 빼앗기기 싫은 측근이나 친우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건…….

    혹시 알고 있는 건가? 이 녀석이……,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어.”

    가비의 음성이 상념을 깨트렸다.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싫었고.”

    반소를 돌아보며 고집스레 눈을 빛냈다.

    “너랑 귀물경비대가 태황국을 지켜주고 있다는 걸 사람들도 알아야 해. 의식하고 있어야 해. 당장은 몰라도…, 누군가는 그걸 알려줘야 해.”

    자신이 적임자임을 가비는 알았다. 이곳에 출생 기록부도 없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자신이야말로 잃을 게 없는 무소불위의 사람이었다.

    “아니, 넌 못가.”

    가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반소가 말했다.

    “가는 방법을 찾지도 못할 테고, 찾는다 해도….”

    “…….”

    “내가 널 보내지 않을 테니까.”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반소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정말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지….

    이제는 그 마음조차 의심스러웠다. 아니, 이렇게 눈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런 생각마저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내 이름…,”

    가비가 눈을 돌리며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은갑이가 아니야.”

    “그럼.”

    “은, 가, 비. 그게 진짜 내 이름이야.”

    잠자코 있던 반소가 입안에서 그 이름을 뇌까렸다.

    은, 가, 비.

    혀끝으로 발음이 달게 감겼다. 저도 모르게 실긋, 입술 끝을 올렸다.

    “그렇군. 은, 가, 비.”

    반소가 가비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너랑 어울리는 이름이다. 예뻐.”

    나지막이 흘려보낸 그 한마디가, 가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름뿐만이 아니야. 네가 모르는 나는 저쪽 세계에 있어. 여기 있는 나는…,”

    “상관없다.”

    반소가 일축했다.

    “지금 네가, 여기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만 중요하니까.”

    가비의 눈이 흔들렸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말을 한다 해도 반소는 모두 튕겨낼 작정인 것 같았다.

    가비를 이곳에 두기 위해서라면.

    “너한테는 내가 유일하겠지만, 난 아니야. 친구? 저쪽 세계에 많아.”

    반소를 좋아하지만. 그 마음을 깨달았지만 확신은 들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남아야 할 이유. 스무 해를 살아온 세계를 두고 고작 반년 남짓한 시간을 보낸 이쪽 세계를 택해야만 하는 까닭. 명분. 그런 건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넌 왜 자꾸 그런 눈으로, 그런 말로 날 흔들어?

    바닥에 놓인 가비의 손 위로 반소의 손이 겹쳤다. 자연스럽게 얽히는 손가락을 피하려는 찰나, 반소의 손이 강하게 깍지를 잡았다.

    “네 말처럼 나한테는 네가 유일하다. 헌데 친우는 아니야.”

    “…뭐?”

    “난 널 친우로 보지 않으니까.”

    반소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불쑥 다가온 숨결을 가비는 피하지 못했다. 그럴 새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조금은 서늘하고 말랑한 입술이 가비의 입술 위로 겹쳤다.

    가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입술은 금방 떨어져 나갔지만, 숨결은 멀어지지 않았다.

    코앞에서 마주친 시선은 흔들림이 없이 곧았다. 빨려들 것 같은 검은 눈동자가 가비를 가득 담았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은 속절없이 그에게 끌려들었다.

    밀어낼 생각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사라져버렸다.

    “…흐읍.”

    다시 닿은 입술은 방금과 달랐다. 숨을 삼키고 입술을 가르며 거칠게 부딪혀왔다.

    깍지 낀 가비의 손을 반소가 끌어와 제 가슴에 품었다. 남은 한 손으로는 가비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으음.”

    고개를 살짝 틀자 두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그 사이로 마주한 살덩이가 서로를 탐색하듯 건드리다 깊이 얽혀들었다.

    축축하고도 뜨거운 접촉이 이어졌다. 숨이 차서 물러나려 하면 여지없이 다가와 휘감고 놓지 않았다. 애가 닳은 것처럼 몇 번이고 따라와 집어삼켰다.

    “하아…….”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잠잠했던 취기가 다시 올라오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자극이 두 사람을 덮쳤다. 서로의 숨이, 타액이, 속살이 뜨겁게 얽히는 감각에 이성이 마비됐다.

    반소의 두 팔이 가비를 끌어안았다. 제 허벅다리 위에 가비를 앉혀놓고 몸을 밀착한 채 입술을 탐했다.

    가비의 두 손이 그런 반소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몸이 야릇하게 엉킨 것도 모른 채, 반소가 주는 열기에 빠져버렸다.

    “…으응.”

    단단한 품 안에서 몸이 나른하게 녹아내렸다. 뒤늦게 자각한 달큼한 과일주의 짙은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그대로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새벽.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던 연회는 끝이 나고 밖은 조용했다. 귀물경비대가 돌아왔는지 처소 쪽이 조금 시끌벅적했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조용해졌다.

    반소는 침상 아래 앉아 잠이든 가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어깨에 푹 기대어 버린 가비는 이내 가물거리던 눈을 감아버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애가 타고 아쉽던지.

    홀로 거친 숨을 내쉬며 달뜬 심장을 추슬러야만 했다.

    “가비야…. 은, 가, 비.”

    나지막하게 가비의 이름을 속삭이며,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꿈쩍 않고 닫혀 있었다. 그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려보았다.

    파르르 떨더니 이내 팩,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 얼굴을 다시 제 쪽으로 조심스럽게 돌렸다.

    작고 갸름한 얼굴이 술기운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거침없이 물고 빨았던 입술도 그랬다.

    반소의 손이 도톰한 아랫입술을 어루만졌다.

    창 너머로 들어온 은은한 달빛이 가비를 비췄다.

    순간, 반소는 제 눈을 의심했다.

    가비의 머리카락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 잠시 눈을 감고 떴을 때, 그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신기루처럼.

    잘못 본 건가…?

    그렇다기엔 시야에 남은 잔상이 너무도 또렷했다.

    반소의 커다란 손이 가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영롱한 붉은 빛.

    꿈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일반적인 붉은색과는 확연히 달라, 반소의 뇌리에 각인돼 있던 바로 그 색이었다. 그리고 그건…, 제 어머니인 천태비의 본래 머리 색이기도 했다. 세상에 단 한 명만 지닌다는 천녀의 색.

    그게 왜 너에게 투영된 걸까.

    그 꿈이 혹, 제 전생은 아닐까 생각했다. 얼굴을 보지 못한 붉은 머리칼의 여인은 누군지.

    천태비인가? 아니다. 그럼 또 다른 천녀인가? 모른다.

    다만 제 심장이 뜯길 것처럼 아팠던 것만 선명했다. 꿈이라고 하기엔 벅차게 생생했던 감정들. 어디선가 분명 겪어본 적이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전생이 있다고 믿어?’

    가비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믿어. …믿게 됐어. 오늘부로.’

    세계가 다른 너와 나는, 어쩌다 만나게 되었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 넌, 내 눈앞에 나타났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가슴이 욱신댔다.

    꼭 무언가를 알리는 것처럼.

    “…읏.”

    반소가 어깨를 웅크렸다. 심장이 아플 만큼 거세게 뛰었다.

    쿵, 쿵, 쿵-

    반소가 이를 꾹 물었다.

    다른 날보다 통증이 길게 이어졌다.

    한참을 버티고 나서야, 통증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후우.”

    굳었던 어깨에 긴장을 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힐끗 올려다본 가비의 얼굴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곤히 잠든 모습이 아기 같아 웃음이 흘러나왔다.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비 하나를 두고 제 몸과 마음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날을 세우다 물러지고, 흥분으로 솟구쳤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넌…, 누구야.

    저쪽 세계에 있던 은가비 말고, 이쪽 세계에 있는 은갑이도 아닌.

    그 이전의 가비가 알고 싶었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인연으로 엮여 있다면, 묶여 있다면.

    그럼 이 끌림이 너무도 당연할 텐데.

    허나 그렇지 않다 해도 나는 네게 끌렸을 테고, 널 연모했을 거라고.

    잠든 가비를 보며, 반소는 그렇게 확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