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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61화 (61/95)
  • [61화]

    “그러니까 은갑이 넌, 이 일이 귀물 사건과 관련이 있을 거란 얘기지?”

    여인들이 알려준 장소로 향하던 중 연화가 물었다.

    “응. 정확한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그래서 한번 알아보려고.”

    “알아봐서 정말 심상치 않으면 어쩌려고?”

    “귀물경비대에 알릴 거야.”

    그 말을 들은 연화가 무언가를 생각하듯 ‘흐음’ 소리를 냈다.

    “가만 보면 은갑이 넌 반소님이나 귀물경비대를 좋아하는 것 같아. 뭔가 신뢰하는 느낌이랄까?”

    사실 사람들이 사건 사고가 생겼을 때 찾는 건 주경대나 야경대였다. 주로 낮에 일이 생기면 주경대, 밤에 일이 생기면 야경대였다. 귀물경비대는 낮과 밤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귀물과 관련된 일이라면 모를까.

    “맞아. 연화 네 말이.”

    가비가 솔직하게 답했다.

    “난 반소님과 귀물경비대를 좋아해. 믿고 있고.”

    연화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비가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일 줄은 몰랐다.

    “어째서?”

    연화의 질문은 순수했다. 가비를 비난하거나 이상하게 보는 게 아닌,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였다.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건 귀물들의 습격이잖아.”

    하늘 아래 단 하나뿐인 세상. 태황국의 적은 사람을 위협하는 귀물들뿐이었다.

    “그런 귀물들에게서 사람들을 지켜주는 게 반소님과 귀물경비대고.”

    “응.”

    “그게 다야.”

    “어?”

    “내가 반소님과 귀물경비대를 믿고 좋아하는 이유.”

    가비가 연화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셨거든.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상대방의 겉을 보지 말고 속을 보라고. 그런 눈을 길러야 한다고. 근데 나한테는 반소님과 귀물경비대가 그래. 겉은 반인반귀일지 몰라도, 목숨 걸고 경계를 지켜주는 건 그들뿐이니까. 그런 행동이 말보다 진실하게 느껴져.”

    가만히 듣고 있던 연화가 생각에 잠겼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귀물경비대가 창단된 후 북쪽 땅의 경계는 늘 귀물경비대의 몫이었다. 야경대나 주경대가 그곳으로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인반귀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우세한 체력을 지녔다 해도 목숨이 하나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걸 담보로 일 년 중 절반을 나가 있어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래. 당연한 건 아니었네….”

    연화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의식하지도 못한 새 반인반귀에 대한 혐오와 불신이 태황국 전체에 뿌리 박혀 있었다. 그건 선대 천자가 살해당하고 천태비가 겁탈당했던 사건 이후 더 강해졌다.

    거기에 일반적인 반인반귀가 아니라 무려 천족의 혈통이 반이나 섞인 반소의 탄생은, 사람들로 하여금 극심한 두려움을 갖게 했다.

    허나 한편으론 천자에 대한 믿음 또한 그만큼 확고해져, 천자의 그늘에서 지배된 듯 보이는 반소와 귀물경비대의 모습에 묘한 안도감과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난 은갑이 너처럼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불편해?”

    “아니…. 오히려 생각을 전환해 볼 수 있는 것 같아. 시야가 좀 넓어진 기분이랄까?”

    연화를 바라보는 가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제 얘기에 반감을 갖기보다 생각의 다양성으로 존중해주는 연화가 좋았다.

    “연화야. 넌 굳이 이 일에 끼어들지 않아도 돼.”

    목적지를 앞에 두고 가비가 말했다.

    “나 혼자 들어가서 알아보고 올게. 매혈할 사람이 있다고 둘러대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만 할 거니까.”

    “그러니까. 그걸 직접 매혈하면서 알아보면 더 쉽잖아.”

    “하지만……,”

    “걱정마. 나 어릴 때 매혈해 본 적 있거든.”

    “진짜?”

    “응.”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나도 그렇게 좋은 형편은 아니야. 너처럼 동생들도 줄줄이 있고. 아버지는 일찌감치 우리 버리고 도망가서 다른 살림 차렸고, 어머니 혼자 우릴 다 키우셨어. 힘들었지….”

    그때 일을 떠올리듯 밝았던 연화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어머니는 건강이 안 좋으셨거든. 그래서 내가 대신 매혈했어.”

    마을에 매혈꾼이 오면 어머니는 어린 연화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 향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화를 매혈꾼이 있는 방으로 들여보내던 어머니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그런 어머니가 너무 미웠는데…, 지금은 아니야.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 일을 미안해하셨거든. 그때 울기만 하고 괜찮다고 말씀 못 드린 게 아직도 죄송스러워. 이렇게 시험 합격해서 어의가 된 걸 보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연화야…….”

    처음 듣는 연화의 얘기에 가비의 마음이 시큰했다. 동기 중 누구도 연화의 배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티 없이 고운 얼굴과 밝은 행동 때문에 적당히 잘사는 집의 자제일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을 뿐이다.

    “은갑이 너희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거. 나 그동안 창피했거든. 부모님도 안 계신 가난한 집안. 줄줄이 딸린 동생들. 그거 숨기느라 애 많이 썼어. 그런데 은갑이 네가 그런 걸 너무 당당하게 얘기하는 거야. 그래서 알았어. 정작 말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연화가 가비를 향해 속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너 참 멋있더라. 네가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좋은 친우로 남을 수만 있다면.”

    가비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거짓이었던 그 말이 연화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이런 진심을, 내가 과연 받아도 되는 걸까….

    연화를 향한 미안함이 샘솟았다.

    “연화야….”

    “응?”

    “실은 나 너한테 말 못한 게 있어.”

    가비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너한테 털어놓고 싶어. 네가 듣고 실망할 수도 있고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어. 그런데…….”

    “그래도 말해줘, 은갑아.”

    연화가 답했다.

    “네가 말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난 실망감도 배신감도 느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네 마음이 내키는 날 편하게 말해줘. 그게 무어든.”

    마치 어떤 말을 들어도 면죄부를 주겠다는 듯 연화의 표정은 다정하고 따뜻했다.

    “……고마워.”

    저도 모르게 울컥임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 연화의 표정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만 같았다.

    “가자.”

    괜스레 코끝을 훔치며 연화를 앞장섰다. 연화가 그런 가비를 쪼르르 뒤따르며 말했다.

    “근데 아까 그 여인들 보니까 매혈 값을 꽤 주는 것 같아. 그치?”

    “응. 아마도.”

    “그럼 나도 머리 장식 몇 개 더 살까 봐.”

    “머리 장식을 또?”

    “내 밑으로 여동생이 셋이나 있거든.”

    “그럼 그건 내가 사줄게.”

    “은갑이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번 월봉도 오정이 빌려주기로 했잖아.”

    “꿍쳐둔 거 있어. 걱정마.”

    “정말? 그럼 염치 불고하고 받을까…?”

    “어. 받아. 받아도 돼.”

    “…고마워!”

    연화가 가비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제게 미안해하는 가비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매혈 장소는 여인들이 알려준 마을의 구석진 집이었다. 집주인은 매혈꾼들에게 이곳을 매혈 장소로 빌려주고 돈을 받은 모양이었다. 높게 쳐진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리자 일꾼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왔다. 가비와 연화의 차림새를 보더니 떠보듯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수?”

    “소문 듣고 왔는데요.”

    가비가 입을 떼려는 찰나, 연화가 먼저 대답했다.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는다고요.”

    그 말에 남자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연화 옆에 있는 가비를 힐끗댔다.

    “보호자로 온 제 오라버니예요. 돈은 오라버니에게 주시면 됩니다.”

    “들어오시오.”

    가비의 신원까지 확인받은 남자가 두 사람을 안내했다.

    남자를 따라 들어간 마당에는 십수 명의 대기자들이 있었다. 모두 또래의 여인들이었고, 그들의 보호자로 보이는 부모 또는 형제자매와 함께였다.

    “일단 대기표부터 받고 기다리시오.”

    남자가 숫자가 적힌 종이 한 장을 주었다.

    가비가 남자를 비롯해 집 곳곳을 지키고 있는 사내들의 동태를 살폈다. 모두 번듯한 옷차림을 한 부잣집의 일꾼들처럼 보였지만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허리춤 안쪽이 두툼한 걸 보니 필시 칼이라도 차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 확실히 이상해.

    긴장한 눈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일이 생긴다면 연화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역시 혼자 올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다면 별다른 정보도 얻지 못한 채 입구에서 쫓겨났을 게 틀림없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랬다. 연화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들어와 볼 수 없었다.

    “29번!”

    드디어 차례가 되었다. 방문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연화의 나이를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을 요구했다. 연화가 가슴에 품고 있던 호패를 꺼냈다. 태황궁의 어의임을 증명하는 호패였다.

    남자가 호패 뒤쪽에 적힌 출생일을 보고 연화의 나이가 스물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주의 사항을 일러주었다.

    “안에 계신 선생이 맹아(盲啞)요. 허니 보호자가 따라 들어갈 거면 옆에서 괜히 울고불고하지 마쇼. 매혈하는데 폐를 끼치니.”

    보통은 형편이 어려운 처지가 매혈하니 그 보호자가 방해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했다. 가비의 확답까지 받고 난 뒤 남자는 방문을 열어주었다.

    연화가 먼저 신을 벗고 툇마루를 올랐고 가비가 그 뒤를 따랐다.

    방안으로 발을 디디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닫았다.

    쿵-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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